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3. 물밑 게임 (1)
"... 이 녀석들."
제르닌은 소파의 두 사람에게 어이없는 시선을 보냈다. 어젯밤에 들어온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건지, 아시엘과 루이카엔은 서로 몸을 푹 기댄 채, 해가 뜬 것도 알지 못하고 쿨쿨 곯아 떨어져 있었다.
"나 참."
창문으로 스며 들어오는 햇볕이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것 때문인지 아시엘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지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커튼을 내려 주었다. 신세 한탄이라도 한 건가, 닮은 녀석들끼리.
언젠가 루이카엔이 장난스럽게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아시엘과 대전회의에 들기 전이었던가- 나 그 녀석 형 할래, 하고.
"그냥 형제가 따로 없는데."
그는 이내 픽 웃음을 짓고 말았다. 운 좋게 일찍 일어난 덕분에 이런 것도 구경 했으니 잠시 내버려 둬도 괜찮지 않을까. 제르닌은 고개를 내젓고는 살짝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날 아침부터 기사단은 꽤 어수선했다.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케빈의 징계 건. 언제나 크고 작은 사고를 꽤 쳐 대는 셀레니스 기사단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근신 처분이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황제, 라이펜이 옹호하긴 커녕 그 자리에서 처분을 내렸다는 것 역시 꽤 충격인 소식이였다. 그리고 그 케빈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거기에 항상 아침 일찍부터 황자궁에 가야 할 아시엘도 생활관에 처박혀 있으니 무슨 사달이 나겠다며 자유로운 영혼인 셀레니스 기사단의 단원들이 농담을 해 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작 본인인 아시엘은 태평하게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겠다며 방에 들어가 버렸지만.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분위기가 완전히 팍 가라앉아 버렸지만 그래도 일거리는 끊임없이 생겨났고 한가한 몸이 아닌 이상 모두는 다시 일터로 나서야 했다.
그리고 비번인 몇몇만이 남아 완전히 조용해진 생활관- 아시엘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전날 유트리안과 싸우기 전 찾아 냈던 종이를 펼쳤다.
"하아아..."
글자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 다시금 골이 지끈거려 아시엘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유트리안은 완전히 골이 난 듯 하니 원래대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아시엘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북북 헝클었다. 눈에 띄지 않게 도서관을 드나들지 못한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많은 하인들과 호위병이 항시 대기하며 그를 지키고 있지만-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는 유트리안의 말은 반쯤 맞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때까지 속이고 있었다는 게 되어 버렸으니. 그런 주제에 상대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 주길 바란 꼴이 이기적이기 그지 없었다.
"... 정신 차리자."
상념을 털어내기 위해 아시엘은 양 뺨을 탁탁 소리 나게 때리고 흘러 내리는 머리칼을 짧은 끈으로 질끈 묶었다.
일단은 이것부터 해결하자.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눈앞의 문제를 어떻게 하지 못하면 끝이었다. 아시엘은 양피지의 명단을 옮겨 적은 노트를 꺼내 빈 공간을 펼치고 다시 펜을 들었다.
우두둑, 루이카엔이 목을 꺾자 뭔가가 부러지는 듯한 살벌한 소리가 났다. 그와 나란히 걷던 케빈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나 참. 아침까지 아시엘이랑 둘이 소파에서 그러고 잤으니까 몸이 그런 거 아냐."
"나도 아니까 좀 조용히 해. 그나저나 순찰 간다는데 네놈은 왜 따라온 거야?"
욱씬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루이카엔이 투덜거리자 그는 못마땅하게 대꾸했다.
"야, 아무리 백수가 됐다지만 어떻게 하루 종일 생활관에 처박혀 있으라고? 그래도 제복 대신 평상복 입고 나왔잖아."
"쳇, 말이 징계지 이거 완전 장기 휴가 아냐?"
"진짜 그렇게 생각하면 그 우거지상 하는 거라도 치우던가."
지나가는 말처럼 케빈이 툭 던진 한 마디에 루이카엔이 움찔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는 친우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음 소리를 냈다.
"하하하하, 내가 언제 그랬다고."
"내가 네 놈 옆에 있던 세월이 얼만데 그걸 모르겠냐?"
하지만 케빈이 간단히 퉁바리를 주자 그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루이카엔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것을 그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꽁한 낯짝 보면 알지. 네놈이 어디 속 시원하게 말 해 주는 게 있어? 게다가 너 뿐이냐, 어쩌다 들어온 콩알만 한 후배 놈도 똑같은데 이쯤 되면 눈치 없기도 힘들다고."
"... 미안."
잠시 뜸을 들이던 루이카엔은 결국 솔직한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냈다. 케빈은 질색하며 얼굴을 구겼다.
"사과하지 마, 멍청아. 기분 나쁘니까. 솔직히 네 놈의 그 복잡한 고민엔 별로 관심 없거든? 굳이 묻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거기에 내가 얽혀 있으면 기분 나쁘단 말이다."
"그래..."
쓴 웃음을 띄우고 루이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푸우, 갑갑한 한숨을 내쉰 케빈은 슬쩍 손을 들어 올려, 퍼어억! 단장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끄아악! 야, 임마. 무슨 짓이야!"
"그냥. 좀 열 받아서."
루이카엔이 비명을 지르자 그는 딴청을 피웠다. 어느새 두 사람은 황성의 인적이 드문 곳까지 다다라 있었다. 마침 적당한 바람이 휘잉, 불어 두 사람의 머리칼을 들썩였다. 끄응차- 케빈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 좋다. 적어도 3개월동안은 할 일 없을 텐데 뭐 하고 놀까?"
"누가 그렇게 팔자 좋게 놔둔댔어?"
"그렇지. 그렇겠... 응?"
문득 두 사람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네가 말 한 거야? 그가 눈짓으로 묻자 루이카엔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닌데. 잠깐만- 가만 있어봐. 그러면.
"으아아아아악!"
"귀청 떨어지겠어, 이 녀석들아."
그들이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사이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응? 루이카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케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홱 돌렸고- 대충 예상했던 얼굴을 마주했다.
"폐, 폐하?"
"기사란 놈들이 이 정도 기척도 못 알아 차리냐? 소드마스터 루이카엔 경은 어디로 간 거야?"
케빈이 얼빠진 소리를 내자 라이펜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옆 풀숲이 바스락거리더니 곧 보좌관 페이튼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우왓, 루이카엔과 케빈은 다시 비명이 튀어나올 뻔 한 것을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당신은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실례했습니다. 루이카엔 경의 순찰 시간을 알아 보고 여기에 계실 거라고 추측했지요. 케시비언 경도 함께이신 모양이니 잘 되었습니다."
페이튼은 황당히 묻는 케빈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라이펜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목소리를 죽였다.
"어쨌든 잠깐 할 얘기가 있어. 주변에 아무도 없지?"
"... 네. 우리 이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루이카엔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석연치 않은 표정에 라이펜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너무 화내지 마, 루이카엔. 나도 조금 미안하게 생각하니까."
"사과는 저보다 케빈에게 하셔야죠. 그것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굳이 여기까지 혼자 오시다니."
"비밀 이야기 하기엔 집무실은 위험하지. 차라리 여기가 나아. 페이튼, 수고했어."
라이펜이 살짝 눈짓하자 페이튼은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고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마침내 정말로 셋 만이 남게 되고,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케빈. 미안하지만 백수가 되는 건 죽은 뒤로 미뤄 둬라. 개인적으로 해줄 일이 있어."
"설마... 일부러 근신 처분을 내리신 건-"
"맞아. 녀석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지."
루이카엔이 아연하게 묻자 라이펜은 씩 입꼬리를 올리고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무슨 말이에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케빈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에게 슬쩍 웃음기 어린 시선을 준 라이펜은 다시 케빈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여태까지와 조금 다른 미소가 짙게 걸렸다.
"케빈, 네가 손발이 되는 거야. 네가 걸려든 건- 운이 없었다고 생각 해. 마침 딱 사고를 쳐 줘서 다행이지.믿을 만 한 녀석이 너 밖에 없었거든. 자신들이 성공적으로 배제했다고 생각하는 장애물만큼 관심을 안 받는 건 없으니까."
"아..."
기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걸까. 케빈은 삐걱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자신을 향한 루이카엔의 시선이 점차 차갑게 식어가자 황제는 쿡 웃으며 그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단장인 네놈은 물론이고 아시엘도 눈에 띄는 녀석이라 움직임에 제한히 있잖아. 루이스는 황성 밖에 있고. 그리고 하나 더. 케빈."
"네, 네?"
케빈은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했다. 라이펜은 짐짓 쾌활하게 검지 손가락을 뿅 세웠다.
"내부 감시자 역할도 좀 해 줘야겠어."
하지만 결코 그 내용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케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루이카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톡. 아시엘의 손에서 펜이 굴러 떨어졌다.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찾았다."
아시엘은 자신이 양피지의 글씨들을 옮겨 적은 노트를 집어 들었다. 손의 진동과 함께 종이의 끄트머리 역시 함께 떨려 나왔다.
"아울 테리에셸 러시 아샤란..."
이게 당신의 본명이였어. 고유 능력은 창조와 마력의 재구성. 고대에 소환되었을 당시 요구한 것은 모든 것을 연구할 권리와 그 실험에 대한 지원. 다른 마족들이 요구한 것들과 비교하자면 굉장히 독특한 조건이었다.
미미하지만 어쨌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 셈이었다.아시엘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곧 아직 분석 전인 자료들을 서랍에 아무렇게나 정리하고 잠금 마법을 건 뒤 자신이 옮겨 적은 노트를 북 찢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평상복 겉옷을 대충 걸친 다음 곧장 방을 빠져 나갔다. 목적지는 물론 마탑의 캐롤 교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