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47화 (24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4. 물밑 게임 (2)

"잠깐만요, 내부 감시자라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잠시 어버버거리던 케빈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져 물었다. 라이펜은 흐응, 하며 나른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 모습은, 황제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밉살맞았다.

"사실 이쪽이 내 본론. 방금 얘기한 건 나중에 루이카엔이나 아시엘한테 자세히 들어. 아, 지금은 아시엘한테 묻는 게 나으려나. 어쨌든 말 그대로야. 셀레니스 기사단을 안쪽에서 감시 해줬으면 좋겠어."

"예...?"

"잠깐만요, 전 아직 이 녀석을 끌어들이는 데 찬성한 적 없습니다."

이야기가 진전될 기미가 보이자 루이카엔이 급하게 두 사람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라이펜이 뭐라 답하기도 전 케빈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할 거야. 그게 뭐든지. 그러니까 폐하. 말씀을 계속 해 주십시오."

"야! 케빈!"

루이카엔이 아연히 소리치자 케빈은 곧장 날카롭게 받아쳤다.

"뭐가 됐던 할 거야. 딴 말 하면 죽여버린다. 나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시엘이랑 네가 뭔가 하고 있었던 거지? 그건 이번 교단 사건이랑 관련된 걸 테고. 그리고 그 여자가 갑자기 사라진 것도, 거기에 대해서 네놈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아냐? 말을 안 해 주는 건 분명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란 말인데 설마 내가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 있겠냐?"

"자자. 그만. 어쨌든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지금은 내 얘기부터 들어주겠어? 나도 오래 집무실을 비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황제가 재촉하며 그렇게 말하자 루이카엔은 끙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상황이 진정된 뒤 황제는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단 케빈을 사용하라는 명령이야, 루이카엔. 너희 셋이서 어찌할 수 있는 게 못 되니까 기왕 쥐여 준 패, 잘 써 보라고. 그리고 감시자 건에 대해서는... 너희들에겐 좀 가혹할 수도 있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기사단 내에 스파이라도 있다는 뜻입니까?"

루이카엔이 심각하게 묻는 말에, 라이펜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추측 단계이지만. 어쨌든 어디선가 정보가 새 나가고 있다는 건 확실해. 그게 기사단 내부의 인간인지 아니면 내 아래의 귀족 중 한 사람인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다."

"정보가 샌다는 건 어디에서...?"

이번에는 케빈이었다. 라이펜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는 루이카엔에게서 아무도 없다는 확신을 받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의 사건에서 에쉬리아란 여자의 존재는 아예 덮어 버리려고 했어. 하지만 목격자도 너무 많아서 위험성이 높아... 그래서 그냥 대부분의 일을 제스퍼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 여자는 별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었지. 루이카엔?"

"아, 네. 저랑 그렇게 얘기 하셨죠. 회의에 참석할 케빈과 제르닌에게도 그대로 전달했고."

하지만 그게 왜요? 하고 묻는 듯한 루이카엔의 눈을 마주보며 라이펜은 씁쓸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그게, 그 전에 이미 누군가가 발설한 모양이야. 그녀의 존재를. 분명 관련된 몇몇과 직접 그 자리에 있던 너희들, 그리고 대 탈주극을 벌인 셀레니스 기사단 이외엔 아무도 모르도록 보안은 꽤 단단히 했는데도. 주범이 셀레니스 기사단이 놓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회의 전부터 귀족들 사이에 떠돌기 시작했었다고 "

"놓쳤다는 점에 주목해서 발목을 잡으려고...?"

"그런 셈이겠지. 하지만 그녀와 직접 거래했던 인간들은 차마 함부로 말을 꺼내진 못 했을 거야. 잘못하다간 자신이 덜미를 잡히고 마니까. 그렇다고 형님이나 그 측근들이 이야기했다는 가정도 아냐. 그렇게 되면 형님이 그다지 믿지 않는 다른 허섭스레기들에게까지 지금 자신이 꾸미는 일이 알려질지도 모르고. 형님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남은 것은 누굴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꼬리가 슥 여우의 것 마냥 휘었다. 루이카엔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내부의 다른 사람이란.. 뜻이네요."

"그저 내가 예민한 건지도 모르지. 얼핏 보면 우리를 공격하는 것 같지만... 글쎄. 오히려 위험한 곳에서 시선을 돌려 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케빈, 그런 의미로 부탁할게."

뒷말을 흐린 라이펜은 분위기를 바꿔 밝게 말했다. 갑작스레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케빈이 화들짝 놀랐다.

"뭐, 뭘 말씀이십니까?"

"감초 역할. 내 눈이 되어서 목숨을 걸고 루이카엔과 아시엘을, 그리고 결과적으론 날 도와. 셀레니스 기사단의 케빈 경이 아니라 내가 신임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믿고 맡긴다."

황제는 눈을 찡긋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얼떨떨하게 눈만 꿈뻑이던 케빈은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맡겨 주세요."

도대체 난 뭘 한 거야. 왜 미안해 했던 거지. 루이카엔은 지끈거려 오는 이마를 짚었다. 백수가 되었던 친구가 능구렁이 100마리는 뱃속에 기르고 있는 황제의 손발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손님이 찾아 왔다더니..."

예의 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역시 아시엘이었다. 소년은 헤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교수님."

"오랜만은 무슨. 안 그래도 언제 오나 하고 있었어."

캐롤은 픽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제자를 요모조모 살피던 그는 이내 이상을 감지하고는 미간을 구겼다.

"뭐야, 너 안색이 왜 그래? 마력도 흐름이 엉망이잖아. 어떻게든 끊기진 않은 모양이다만. 파견 갔다더니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여러가지로요. 별 건 아니에요. 약도 먹고 있고. 그것보다 뭔가 진전은 있었어요?"

아시엘이 그렇게 화두를 돌려 버리자 캐롤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금."

"정말요?"

아시엘의 어린아이다운 큰 눈동자가 반짝였다. 솔직한 그 얼굴이 옛날 자신에게 마법을 배우던 시절의 그와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많아서 캐롤은 쓴 입맛을 다셨다. 아카데미를 엉망 진창 뛰어다니던 녀석이 어쩌다가 이런 일에 엮여버린 건지.

"너, 조사도 좋지만 몸은 챙겨라. 너무 무리하진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나나 루이스 녀석한테 재깍 얘기해.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

"헤헤. 고마워요. 그것보다 어서, 어서 말 해 주세요. 저도 따로 말씀드릴 것도 있고."

그가 재촉하자 캐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따라 와. 내 연구실로 가자. 별 건 아니지만 보여줄 것도 있고 여기에서 얘기하긴 곤란하니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시엘은 히죽 장난스럽게 웃으며 곧장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랐다.

그의 연구실은 꽤 외진 곳에 있었다. 마탑에 거주하는 실력 좋은 마법사들이 지내는 연구실들이 죽 늘어선 복도를 따라 걸으며 굳게 닫힌 방 각각에서 풀리지 않는 연구에 괴로워하는 마법사들의 비명이 간간히 새 어 나왔다.아시엘은 하하, 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야. 들어가."

"아, 네."

캐롤이 문을 열어주는 대로 방에 들어선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조명도 제대로 켜지지 않은 연구실에서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한 것은 엉망으로 쌓인 산더미같은 자료들이었다.

"아..."

"미안. 좀 복잡하지?"

아시엘이 탄식 같은 감탄사를 터뜨리자 캐롤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복잡 정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게 쏘아 주고 싶은 것을 그는 간신히 눌러 담았다.

분명 연구실이 좁은 것도 아닌데 온갖 곳에 탑을 이룬 자료와 계산 술식이 정리된 양피지, 고문서 따위가 모여 부딪히지 않고 걸으려면 상당히 주의가 필요했다. 그 밖에도 넓은 테이블 위에는 사용한 후의 플라스크가 멋대로 굴러다녔고 실험 후의 일지 같은 것들 역시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물론 케빈의 서식지보다는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지만 아시엘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교수님... 웬만하면 정리는 좀 하고 사세요."

"시끄러, 인마! 루이스랑 똑같은 잔소리 하지 마. 어쨌든 들어와."

불퉁하게 대꾸한 캐롤은 앞서서 안쪽으로 조심 조심 들어갔다. 아시엘 역시 종이 뭉치들을 피해 힘겹게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거야."

교수가 방의  가장 안쪽에 멈춰서자 아시엘 역시 간신히 장애물들을 뚫고 그의 옆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소중히 모셔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사면이 막혀 있는 투명한 수조 안에서 둥실 떠오른 채 희미한 빛을 내고 있는 동그란 구슬 하나. 아시엘은 무언가에 홀린 듯 가까이 다가섰다.

"너무 다가가진 마.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이거... 뭐에요?"

캐롤이 주의를 줬지만 아시엘은 듣지 못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손을 살짝 들어 유리 벽에 갖다댔다. 은근한 열기가 유리를 타고 전해져 왔다.

지면과 약간 거리를 둔 채 아주 천천히 회전하며 새하얀 빛에 감싸인 구슬은 마치 은은한 안개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우웅- 구슬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마치 구름에 맺힌 달무리. 구슬 안에 출렁이던 검은 연기는 그 안개에 조금씩 녹아들어 아주 조금씩이나마 사라지고 있었다. 한밤중의 달빛에 어둠이 깎여 나가는 것 같아-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빛 계열 마법이야. 얼마 전에 발견했어."

"네?"

캐롤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처럼 말하자 그제야 아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빛 계열... 이요?"

"어어. 그냥 단순한 마법은 아니지만."

가까이에 있는 서랍을 뒤적이던 교수는 그에게 수식이 빼곡히 적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아시엘은 눈을 꿈뻑이며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이게 뭐에요?"

"너 나한테 감사해라? 이거 알아내다 죽을 뻔 했으니까."

캐롤은 의자를 끌어다 걸터앉고 유리 상자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솔직히 하나하나 세세히 뜯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은 안 되니까 마력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찾는 걸 위주로 이리저리 고민해 봤지. 그래서 그 결과가 이거."

"소멸요?"

"어어. 구슬을 깨 버리니까 집 한채가 그냥 날아가 버리고, 그 뒤로도 마력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머물다가 어디론가 가 버렸어. 그건 없앴다고 말할 수 없지. 그래서 여러가지 실험을 해 보다가 한 가지 방법을 찾았어."

캐롤은 아시엘이 든 종이를 몇 장 넘겨서 보여주었다. 수식과 함께 그려진 복잡한 그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마력은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분석해 보니 기본은 우리가 사용하는 마력과 비슷해하더군.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요령이랑 비슷하게 이 구슬의 마력을 끼고 마법을 시전해 봤어."

"그래서요?"

아시엘이 급하게 재우쳐 묻자 그는 손가락을 세 개 꼽아 보였다.

"성공한 마법은 빛 마법, 화염계 마법, 물 계열 마법 뿐이야. 그것도 다 2서클 이내의 초급 마법이 한계였고 정신계열이나 다른 건 무리였어. 억지로 시전하려다 내 마력이 뒤집어질 뻔 했다고."

"빛, 화염, 물... 이라."

아시엘은 그의 말을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캐롤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이 마력은 다른 방면에서는 모두 다 우리의 마력보다 상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로서는 운용이 불가능할 테고- 빛, 화염, 물의 속성에 대해서는 평범한 인간의 것과 비슷한 파장을 가졌어. 그래서 나도 운용할 수 있었던 걸 테고. 그리고 또 한가지. 빛 마법을 시전하면 마력이 꼭 타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져 버려. 소비되는 것과는 좀 달라. 꼭 자기 힘에 데미지를 받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시엘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다시 구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은 빛 마법을 시전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천천히 소멸시키고 있다는 말이었다.

"화염이나 물은요?"

"시전은 가능하지만 그런 현상은 없어."

캐롤이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평범하게 시전된 빛 마법과는 조금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더 짙고 농밀한 느낌. 어쩌면 이게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열쇠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아시엘의 고운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정말 고마워요, 교수님!"

"됐네요. 네놈 속 타들어가는 게 보이는데 손 놓고 있을 수 없잖아. 그나저나 넌? 할 얘기 있다면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캐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아참, 하며 아시엘은 주머니를 뒤져 종이 몇 장을 꺼내 내밀었다.

"황실 전용 도서관에서 찾은 걸 옮겨 적은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마력에는 고유의 속성이 있다고 하니까... 그 구슬들에 어떤 종류의 마력이 있는에 대해서도 조사 부탁드려도 될까요?"

"속성이라... 그것보다 넌 황실 전용 도서관엔 어떻게 들어간 거야?"

그 특유의 정갈한 글씨를 살피던 캐롤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시엘은 헤죽 장난꾸러기처럼 웃었 다.

"본인의 능력과 뒷배를 잘 사용해야죠."

"뭔... 가 황제 폐하가 조금 안타까워지는데."

캐롤은 키득거리며 종이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알았다. 그쪽으로 조사해 볼게. 여기에 적힌 종류의 속성을 참고하면 되는 거지?"

"네. 항상 죄송해요."

"죄송하긴."

그는 제자의 결 좋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으와악! 아시엘이 기겁하고 뒤로 물러나자 그는 피식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놈의 뻔뻔함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거야, 아시엘 아르셰인. 뭐든지 잘 해 나갈 거잖아?"

"... 그렇죠."

흐트러진 머리를 만지작대던 아시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죠.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덧붙인 그는 이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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