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셀레니스 기사단 유령 소동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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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 콜록콜록!"
몇 시간째 이어져 오는 기침소리. 소파에서 노닥거리던 오스카는 저절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것은 슌도, 케빈도 마찬가지였다. 기침 소리의 장본인과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카이스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아시엘. 들어가서 자는 게 낫지 않아?"
"미안, 킁! 이것만 다 읽고..."
결국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도롱이벌레처럼 솜이불을 꽁꽁 말고 있는 무언가가 꿈틀하며 잔뜩 쉰 소리가 흘러 나왔다. 에휴, 케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불 뭉치가 몇 번 더 꼼지락대더니 이내 그 속에서 작은 머리 하나가 쏙 튀어 나왔다. 푹 숨이 죽어버린 금발과 기운 없이 시무룩한 얼굴, 미열 때문에 빨갛게 달아 오른 뺨. 반쯤 감긴 눈 속에서 빛나는 적안도 평소와 다르게 몽롱히 흐려져 있었다. 젠장 귀엽잖아, 그 자리의 모두는 목 끝까지 차오른 한 마디를 억지로 눌러 담았다. 대신 슌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아시엘은 웬만하면 나을 때까지 생활관에 있는 게 낫겠다.
"동감... 안 그래도 위험한 얼굴인데 파괴력이 더 올라갔잖아."
"콧물 질질 흘리는 멍청한 면상이란 거 나도 잘 알고 있거든요?"
오스카까지 그렇게 거들자 아시엘은 두 선배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그렇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을 카이스는 간신히 눌러 담았다. 그것도 잠시, 아시엘은 또 터져나오는 기침을 막지 못했다.
"켈룩, 콜록! 콜록! 아으, 죽겠다."
"야, 야. 괜찮냐? 무슨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 그러게 잘 좀 먹으라니까."
케빈의 퉁바리에 아시엘은 킁,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봬도 꽤 튼튼해요. 이번엔 재수가 없었다 뿐이지. 덕분에 휴가도 받고 나쁘진 않아요."
"그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전혀 없는데."
"끄으응..."
슌이 곤란하게 중얼거렸다. 아시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더워어... 안 그래도 더운 날씨인데 열도 나고 몸은 오싹오싹 오한이 들어 이불까지 둘둘 말고 있으니 땀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스카가 뒤적거리던 수상한 책 - 예의 표지가 없는 그것- 을 턱 덮고 씨익 미소지었다.
"그럼 우리 깜찍한 후배님을 위해서 시원하게 만들어 줄 만 한 이야기라도 할까?"
"별로 상관은 없는데... 어떻게 그 책은 치워도 치워도 계속 나오는 거예요?"
분명 저번에 직접 한바탕 불태운 적도 있었는데. 킁, 코를 훌쩍거리며 아시엘이 별 악의 없이 몽롱하게 말하자 오스카는 전에 없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다.
독한 감기 때문인지 평소의 그 쬐그만 녀석에게서 나오던 설명하기 어려운 박력이 사라져 버린 덕분에 정말로 제 나이대보다도 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카이스가 운을 떼 주었다.
"그래서 그 얘기가 뭔데요?"
"아, 아- 그렇지. 너희들 그 소문 알아? 요즘 말이야 황성을 떠도는 소녀가 한 명 있대."
퍼뜩 정신을 차린 오스카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모두는 호기심을 보이며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연신 콜록거리던 아시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소녀, 콜록, 요?"
"응. 하인 여러 명이 봤다는 거야. 그런데 그 모습이 심상치가 않대."
소년이 흥미롭게 묻자 오스카는 신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나는 시간대는 항상 해가 뜨기 전 새벽. 그 때 우연히 밀린 일을 하러 나왔던 정원사가 어두컴컴한 정원에서 뭔가가 스윽, 슥 끌리는 소리를 들었대. 그래서 혹시 들짐승이라도 온 건가, 하는 마음에 살금살금 가 봤더니!"
"......."
"어째서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흙 투성이의 원피스 차림의 맨발 소녀가...! 흑, 흑, 흑...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배회하고 있었다는 거야."
"분명.. 성에는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잖습니까."
카이스가 조금 꺼림칙하게 말했다. 오스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지!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냐. 그걸 뱔견한 늙은 정원사가 이상하게 여기면서 말을 걸려고 다가갔더니 갑자기 끼기긱, 고개를 돌렸다는 거야.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분명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커먼 구멍만 남은 얼굴이!"
순간 항상 꿈에서 보는 광경이 떠오른 아시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나머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케빈이 입을 삐죽이며 오스카가 아무렇게나 던져 둔 책을 끌어당겨 펼쳤다.
"아아, 그러셔. 그나저나 그건 언제적 괴담이냐? 진부하게시리."
"무시하지 마라, 이거 며칠 전에 하인한테서 직접 들은 거라고! 어쨌든 기겁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가 나중에 가 보니 하얀색 천 하나만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고 하더라. 결국 그 정원사는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대."
"아, 나도 그 얘기 들었어."
마침 집무실에서 나오던 루이카엔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단장!"
"그 왜, 옛날에 제국 끝 지방에서 큰 홍수가 있었잖아. 그때 빠져 죽은 어린애라는 이야기도 하던걸? 억울함을 못 이겨서 그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황실을 원망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라던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끝마친 그는 아시엘에게 다가가 이마를 짚어 주었다.
"좀 낫냐? 얌전해서 평소보다 좀 더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아프면 내 마음이 좀 아픈데."
"사람 놀려요? 끄응..."
벌컥 화를 내려던 아시엘은 지끈지끈 덮쳐 오는 두통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결국 그는 비척 비척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전 먼저 올라가야겠어요. 자고 나면 말끔하게 낫겠죠..."
"데려다 줄까?"
"아냐, 됐어. 그 정도로 심하진 않아."
당장에 따라 일어서려는 카이스를 웃으며 저지하고 아시엘은 어깨에 돌돌 만 이불을 질질 끌며 터덜터덜 힘없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유난히도 작아 보이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빈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저렇게만 보면 참 귀여운데..."
"이럴 때 안 놀리면 언제 할 수 있겠어."
루이카엔이 킬킬 짓궂게 웃었다. 아니, 단장은 평소에도 실컷 놀리고 있잖아요. 그러다가 호되게 되돌려 받지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슌과 카이스가 그렇게 조용히 덧붙이는 말은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지나가는 듯 꺼내졌던 수수께끼의 소녀 유령에 대한 화제는 그대로 묻혀 버렸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는데-
모두가 잠들고 난 뒤의 깊은 밤. 쿨쿨 코를 골다 문득 느껴지는 갈증에 눈을 뜬 케빈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서식지에서 숱한 장애물들을 익숙하게 거쳐 티테이블에 손을 뻗었지만 그는 물주전자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쯧, 혀를 찼다. 목 말라. 그는 별 수 없이 잠옷 위에 가운을 대강 걸치고 복도로 나섰다. 로비에 가면 아마 물이 있을 터였다.
"으으..."
새벽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서늘했다. 낮까지는 분명 더운 바람 때문에 땀이 날 지경이었는데. 그는 잠이 덜 깬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며 슬리퍼를 끌고 복도를 걸었다. 쿠우울, 커어어억! 하는 기사들의 칠칠치 못한 코 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아시엘 녀석은 좀 괜찮으려나, 하품을 늘어지게 쩌억 하며 그는 첫 번째 계단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그 때.
스으윽, 스윽. 무언가가 끌리는 듯 한 기척이 그의 예민한 감각에 잡혔다. 으응? 케빈은 내려가려던 걸음을 돌려 의아하게 주변을 둘러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잘못 들었다. 다시 그가 돌아서려던 순간, 다시 스으윽. 스윽.
분명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케빈은 순간 남은 졸음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침입자인가, 그는 몸을 긴장시키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엔 분명 아까까지는 없었던 인영 하나가. 언제 저기로 간 거야, 말문이 턱 막혔지만 케빈은 곧 정신을 차리고 사납게 말했다.
"누구냐!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냐."
인영은 우뚝 움직임을 멈추고 섰다. 케빈은 그제야 눈 앞의 그것이 상당히 작은 덩치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자아이의 뒷모습 같기도 했다. 길 잃고 아무데나 들어와 버린 어린 하녀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섰다.
"이봐, 출구를 찾는 거라면 저쪽이라고."
그가 그렇게 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거리가 좁혀질수록 아이의 실루엣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작은 몸을 감싼 하늘하늘한 하얀 천, 그 아래에 드러난 맨발. 민소매 원피스 덕분에 확연히 드러난 새하얀 어깨에서 뻗어난 가느다란 팔 끝에는 낡아 빠진 곰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케빈이 10걸음 쯤의 거리만 남겨두고 멈춰 서자 그제야 아이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섬뜩한 기분에 케빈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잠시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셀레니스 기사단의 생활관에 맨발의 소녀? 게다가 흰 원피스에 곰인형의 소녀라면-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잠깐만. 설마..."
마치 차가운 얼음물이 머리부터 끼얹어진 것 같았다. 아이가 희미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흐윽, 흑...도망쳐야 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지만 얼어붙은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돼, 돌아보지 마. 안 돼!
"흐아아아아아악!"
결국 그는 길게 비명 소리를 뽑아 내며 우당탕탕탕,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감기약 덕분인지 대낮부터 들어가 잤는데도 조금 늦은 아침까지 깨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아시엘은 한 결 개운해진 몸을 쭈욱 펴며 사뿐사뿐 복도를 걸었다. 아직 기침은 간간히 나왔지만 이제 무리 없이 임무를 수행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라?"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않아 아침부터 2층 복도 우글우글 한 곳에 모여있는 선배들을 발견하고는 의아하게 눈을 꿈뻑였다. 무슨 일이지? 그는 종종걸음을 쳐 그들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요?"
"아, 아시엘. 감기는 이제 좀 괜찮아?"
제일 바깥쪽에 서 있던 한 기사가 웃으며 그렇게 말을 건네자 아시엘은 특유의 예쁜 미소를 담고 고개를 크게 끄덕여 주었다.
"네. 이제 완전히 멀쩡해요. 그것보다 무슨 일이에요?"
"아아... 그게 말이야. 케빈이 소란을 피워 대서."
소란? 알 수 없는 설명에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엥,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여러 말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백배 낫지. 그는 덩치 큰 선배들 사이를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소란의 가운데에는 어째서인지 반쯤 패닉 상태로 주저 앉아 있는 케빈과 비슷하게 동요한 듯한 오스카, 그리고 어제 로비에서 함께 있던 모두가 모여 있었다. 늦잠 상습범인 카이스와 슌을 포함해서. 아시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 아시엘. 일어났구나. 몸은 어때?"
"훨씬 좋아요. 열도 안 나고. 그것보다 무슨 일이에요?"
슌이 반기는 말에 대답한 아시엘은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 보았다. 하지만 모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말없이 재촉하는 눈빛에 어렵게 운을 뗀 것은 카이스였다.
"새벽쯤에 케빈 선배님이 뭔가를 보셨다고 해서.."
"뭔가가 아냐! 그거, 그거 있잖아! 여자애! 황성에 돌아다닌다는 그 여자애!"
멍하니 있던 케빈이 발작적으로 외치자 순간 모여 있던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여자애? 잠시 기억을 더듬던 아시엘 역시 곧 아, 하고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골골거리는 사이에 오스카가 그런 이야기를 해 줬던 것 같았다.
"그렇다니까! 진짜 있다고? 소문이란 건 무시할 만 한 게 못 된다고!"
"네가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그딴 게 생활관까지 기어 들어온 거 아냐, 이 자식아!"
의기양양하게 오스카가 하는 말에 케빈이 멱살을 잡아 챌 기세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루이카엔은 두 사람을 떼어 놓으며 비교적 침착하게 물었다.
"네가 잘못 본 거 아냐? 꿈이라던가, 헛것일 수도 있잖아."
"헛것이라면 저건 뭔데!"
케빈은 손가락으로 복도 구석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가고 그들은 이내 아연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간 듯 새하얀 천 하나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설마 내가 시커먼 남자랑 여자애도 구분 못 할까 봐? 분명 여자애였다고! 곰인형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렇다면 우리 중의 누구랑 착각한 것도 아닐 텐데... 설마."
그러는 와중 누군가가 겁먹은 음성으로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 진짜 그 유령이 생활관에 있는 거 아냐...?"
사아아악. 생활관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카이스의 얼굴에서도 알게 모르게 핏기가 가셨고 오스카와 케빈은 아예 백짓장이 되고 말았다. 루이카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아시엘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