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51화 (25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7. 붉은 별의 저녁 (1)

그렇게 이틀이 언제나처럼 아무 일 없이 흘렀다. 기사들은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그 반면에 케빈은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와는 별 상관 없이 평화롭기만 한 나날에 슬슬 심심해져 갈 때였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것은 치료사의 강제 휴가령 덕분에 마찬가지로 생활관에만 콕 처박혀 있던 아시엘이었다.

채애앵! 두 자루의 검이 충돌하며 연무장에 큰 소음이 일었다. 억센 힘이 들어간 검을 옆으로 흘려 내고 아시엘은 손을 뻗었다.

"아이스 스피어!"

"어이쿠!"

짧은 캐스팅이 끝나고 시동어가 터져 나오자 그의 손 끝의 마법진에서 생성된 얼음의 창이 그를 향해 곧장 쇄도했다. 이크, 케빈은 재빨리 땅을 박차고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콰과곽! 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깊이 박혔다.

진짜냐, 대련이지만 정말로 인정사정 없는 그의 손속에 케빈은 잠깐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아시엘이 재정비하기 전 잽싸게 튀어나갔다.

까앙! 그 단순한 공격은 다시 아시엘의 레이피어에 손쉽게 막혔다. 하지만 케빈의 힘을 쳐내기란 아시엘에게는 불가능했다. 케빈은 히죽 웃으며 검에 무게를 실었다. 끼긱, 긱. 검이 마찰하는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아시엘의 몸이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익...!"

"꼬맹아, 슬슬 포기하는 게 어떠냐?"

케빈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하자 아시엘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죠! 헤이스트!"

소년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가속 마법이었다. 어디서 나타날 거지, 케빈은 주춤하며 날을 세웠다. 왼쪽인가, 뒤인가. 아니면- 다음 순간 금빛이 휘몰아친 것은 왼쪽이었다. 케빈은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우왓!"

황금빛 레이피어가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위험했다, 안도하던 케빈은 순간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손을 뻗어 잡아챘다.

"헹, 호락호락하게 당할 줄 알았냐!"

"이익...!"

케빈은 히죽 짓궂게 웃었다. 아시엘은 혀를 쯧 차며 잡힌 팔을 빼려 했지만 그에게는 무리였다. 손 끝에는 발동 직전의 마법진이 선명하게 맻혀 있었다. 케빈은 그의 팔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자, 슬슬 항복하시지? 아시엘 아르셰인 경."

"아직이거든요!"

아시엘은 캐스팅을 취소하고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공중에서 빙글 제비를 도는 요령으로 그를 떨쳐낸 아시엘은 선배의 어깨를 짚고 그의 등 뒤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헤헹, 탈출 성공!"

아시엘이 의기양양하게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자 케빈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약삭빠른 녀석 같으니. 그놈의 마법엔 영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그리고 어째 스피드가 더 올라간 것 같다?"

"다 선배 덕분이죠, 뭐. 그것보다 역시 전 아직 못 당해낼 것 같아요."

아시엘은 검을 갈무리하고 히죽 웃었다. 케빈 역시 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실력이 무섭도록 늘어가는데. 오늘은 슬슬 그만할까?"

"네. 저도 지쳤어요."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세 판 째였다. 적당히 상대해 준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시엘의 머리칼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후- 개운한 한숨을 내쉬고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후배를 응시하며 케빈은 조금 전의 일을 상기했다.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쉬고 있는 그에게 다짜고짜 찾아와 대련을 하자며 졸라댔다. 그리고는 연무장에 마주 선 직후부터 평소보다도 맹렬하게 덤벼 왔다. 언뜻 보기에는 언제나와 다르지 않았지만 케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차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대련을 순수하게 즐기며 임하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좀 달랐다. 마치 쫒기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혹은 뭔가를 털어버리고 싶은 듯이 소년은 대련에 매달렸다. 결국 케빈은 한 번 했던 질문을 다시 꺼내고 말았다.

"야. 괜찮은 거냐?"

"마법이라면 이제 괜찮아요. 약 꼬박꼬박 먹었더니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아시엘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그는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소년은 뻔뻔하게 씩 입꼬리를 올렸다.

"왜요? 그럼 뭐가 문젠데요? 안 괜찮을 일은 그거밖에 없는데."

"이봐..."

"괜찮아요. 천성이 이 모양이라서 미지의 뭔가에 파고드는 건 즐기는 편이니까."

그가 뭐라 더 덧붙이기도 전 아시엘이 쐐기를 박아 버렸다. 케빈은 말문이 막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한거야? 메르티스 백작가에서 그 흔적이란 걸 발견했을 때는 다 같이 있었잖아."

"선배도 아시잖아요. 별 수 없었어요."

물론 훌륭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작 16살의 소년이 떠맡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마침 그 때 아시엘이 아, 하며 귓가에 손을 가져갔다.

"왜 그래?"

"이 시간에 웬일로 통신이..."

이미 해가 지기 직전의 늦은 오후였다. 그의 붉은색 물방울 귀걸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시엘은 반신반의하며 곧바로 연결했다.

케빈은 검을 매만지며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배를 의식한 듯 아시엘은 연락해 온 상대를 확인하고는 조금 놀란 얼굴로 돌아섰다.

"지금 와서 무슨 소리에요? 네? 네..."

제법 심상치 않은 모양인지 간간히 새 나오는 아시엘의 목소리는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잠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던 그는 이내 연락을 끊고 다시 돌아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글쎄요, 갑자기 황자 전하가 나오라고 하시네요... 전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시엘은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제복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켁, 케빈은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싸웠다면서? 코빼기도 비치지 말라더니 왜 변덕이래."

"그래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다녀 오겠습니다!"

"오냐."

그가 손을 설렁 설렁 흔들어 주자 아시엘은 씩 웃어 보이고는 곧장 연무장을 빠져 나갔다. 제복의 긴 하얀 옷자락이 펄럭거리며 그의 뒤를 좇았다.

종종걸음을 치며 아시엘이 곧장 향한 곳은 황자궁의 뒤꼍이었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묘하게 조용한 공기가 감도는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는 유트리안이 말한 장소까지 빠른 속도로 걸었다.

이윽고 언제나 나란히 뒹굴거리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서야 아시엘은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전하. 저 왔어요."

그가 넌지시 말을 건네자 유트리안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무언가가 그의 뒤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에 아시엘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혹시 누가 같이 있는 거예요?"

"아, 아냐. 나 혼자 뿐이야."

어색하게 말을 더듬는 꼴이 수상했지만 아시엘은 입술만 비죽이고 그에게 타박타박 다가갔다.

"왜 부르신 거예요? 얼굴도 보기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 생각이 바뀌어버린 건가요?"

"너 진짜- "

빈정거리는 어조에 유트리안이 울컥했지만 그는 가까스러 눌러 담았다. 아시엘은 삐딱하게 서서 황자를 가만히 올려보았다.

"뭐, 뭐?"

"왜 불렀냐구요. 혹시 황자님 화가 풀렸다고 해서 저까지 기분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금빛을 담은 붉은 두 눈동자와 말간 얼굴이 정면으로 자신을 응시해 오자 유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 얼굴에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그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아시엘에게 옷 하나를 던져주었다.

"어풉!"

"그거 입어. 하얀 제복은 너무 눈에 띄니까."

아시엘은 얼굴에 직격한 망토를 간신히 떼 내고 그를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무슨 소리에요? 눈에 띈다니요?"

"날 밖으로 데리고 나가."

네? 순간 그는 자신이 헛것을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얼빠진 얼굴을 한 소년을 내려보는 유트리안의 두 금빛 눈동자 역시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목소리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날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바깥에선 지금 야시장인 걸 하고 있다면서? 구경 가고 싶어. 아바마마도 옛날엔 자주 성 밖으로 몰래 나들이 하셨다고 했고."

"하지만 전하...! 이런 시국에는 무리에요. 게다가 야시장은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런 곳에 호위도 저 혼자 뿐이라니 말도 안 돼."

아시엘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반박했다. 하지만 황자 역시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뭘 위해서 허름한 망토까지 준비했다고 생각해? 내가 황자인 것만 들키지 않으면 되잖아."

"... 이때까지 아무 말씀 안 하시다가 왜 이러시는 건데요?"

그는 지끈거려 오는 관자놀이를 짚고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꼴도 보기 싫다더니 다짜고짜 바깥으로 데리고 가 달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무모했다. 유트리안은 잠시 눈을 데구룩 굴리다가 답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야... 궁금해 지기도 했고. 난 황성 밖으로 제대로 나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역시 다른 호위 기사들보다 네 쪽이 낫다고. 넌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점차 기어 들어가려던 음성은 마지막 쯤이 되어서 다시 또렷하게 변했다. 그 확신에 찬 한 마디에 아시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금 그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엘은 깨달아 버렸다. 그리고 꽤 크게 틀어진 사이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이 황자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역시. 그리고 적어도 화를 내지 않고 있는 지금만큼은 유트리안이 진심을 담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도.

그가 다른 노림수 없이 유트리안 그 자체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믿을 만 한 사람- 혹은 친우인지 확인하려는 것일 터였다.

"그렇지? 아시엘."

유트리안이 조금 불안하게 답을 재촉했다. 아시엘은 아연해져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 하나 둘 별이 총총 떠오르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이 두 소년의 머리로 점차 어둠의 영역을 넓혀 갔다. 잠시 후-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시간의 나뭇잎 여관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다. 맛있는 요리와 푸근한 분위기, 값싸지만 훌륭한 술 그리고 미래를 보는 종업원.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손님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 역시 자리를 비운 듯 여관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텅 빈 식당의 의자에 앉은 것은 렌 단 한 사람 뿐이었다.

톡, 톡, 톡. 조명도 제대로 밝히지 않아 이미 어두워져 버린 식당에서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시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오늘. 렌은 살풋 미소를 띄며 턱을 괴었다.

"어두워진 뒤에는 단 둘이 외출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리고- 동료라 믿었던 자를 조심하시길."

언젠가 인형처럼 아름답고,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소년에게 했던 예언을 그는 한번 더 입에 담았다. 그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가려졌던 눈동자가 드러났다.

"오늘 밤, 많은 것이 바뀌겠네요."

그의 입술에 얼핏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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