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52화 (25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8. 붉은 별의 저녁 (2)

"대신, 나간다면 조건이 있어요."

"조건?"

유트리안이 미간을 구겼다. 그는 이미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고 망토에 후드까지 눌러 쓴 상태였다. 아시엘은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트러블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꼭. 알겠지?"

"야, 너 어째 말이 짧다?"

"이제부터 적응해야 해요. 바깥에서 당신은 황자가 아니에요. 혹시라도 신분을 들키면 곤란하니까- 음.."

후드 속의 작은 얼굴이 갸우뚱했다. 잠깐 생각하던 그는 검지를 뿅 세웠다.

"일단 밖에 나가면 전 황자님에게 말을 놓을 겁니다. 그냥 도련님 정도만 되도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까. 호칭도 바꿀 거예요. 그냥 평민인 척 하는 거예요. 알겠죠? 아니, 알겠지? 유트."

그 뻔뻔한 말에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유트리안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자, 참아.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시엘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혹시라도 바깥에서 시비가 걸린다면 일단은 무시하거나 아니면 날 불러. 때려 눕히든 날려 버리든 뭐 그건 그 때 생각하면 되는 거고."

"... 넌 도대체 어떤 식의 인생을 살아온 거냐."

유트리안이 어이없이 중얼거렸지만 아시엘은 모르는 척 했다. 이미 황궁을 몰래 빠져나갈 길은 유트리안이 -정확히는 에스테반이 알려준 것이지만- 파악해 둔 상태였으니 이제 신중히 빠져 나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후우-"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먹은 듯 굳건한 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이제 거의 다 어둠에 잡아 먹힌 태양은 빛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선선한 저녁즈음의 공기가 상쾌할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깐 실례할게요."

"어?"

아시엘은 살짝 까치발을 들고 그의 뺨을 살짝 감싸쥐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트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년의 굳은살 박힌 작은 손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은 아시엘은 작게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일루전."

고운 미성이 짧은 음절을 밖으로 내 놓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움직이더니 미풍이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어라?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혀 유트리안이 멍하니 있는데, 어느새 바싹 앞까지 다가온 아시엘의 얼굴에 씨익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언제나 마주하던 얼굴이었지만 그는 새삼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 이제 끝. 아직 다른 사람한테 시전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유지하려면 마력 소모도 심해서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대충 머리 색만 바꿨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혹시 후드가 벗겨져도 안심이고."

"어? 어, 어어..."

유트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은 킥 웃고는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퍽, 두드렸다.

"그럼 가 볼까요? 아, 그리고 제가 이런다고 화가 풀린 건 아니니까요. 황자님은 부자니까 나가서 책 다섯 권 정도는 사 주셔야 해요. 알겠죠?"

"네놈은 하다 하다 이젠 삥까지 뜯냐..."

어이없이 중얼거린 그였지만 그래도 싫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유트리안은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야,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는 뭐야? 내가 황자라서야? 아니면-"

"대놓고 말해서요, 이 시국에 당신의 황자 신분에 뭔가를 바라고 움직이기엔 얻을 게 너무 없어요. 황자님은 단지 이름만 가졌을 뿐, 힘도 권력도 아무것도 없잖아요."

아시엘은 제 망토를 다시 세심하게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사실이지만 그래도 너무나 신랄한 그 말투에 유트리안이 말문이 막혔을 때 소년은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도 전하라는 인간 자체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어요. 아니꼽고 짜증나긴 해도 황자님이랑 10년 뒤에도 말싸움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보답은 없을 거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어린 기사의 밝은 미소는 그저 환하기만 했다. 유트리안은 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 거짓됨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금빛의 적안과 후드 아래의 고운 도자기 같은 하얀 얼굴은 아직 떠오르지도 않은 월광에 젖어든 것처럼 새하얗게 빛났다.

"자, 이제 가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는 아시엘은 그 어느 때 보았던 만월보다도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금발이, 거짓말 같은 눈동자가 그랬다. 유트리안은 마치 홀린 듯이 그 손을 잡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몰래 성을 빠져 나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늘 빽빽하게 황자궁을 호위하던 병사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고 유트리안이 미리 몰래 빠져나갈 길을 알아 둔 덕분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수월하게 내성에서 빠져나와 외벽의 개구멍에 다다랐을 때 아시엘이 어이없이 말했다.

"도대체 이런 길은 어떻게 안 거예요? 설마 매일같이 탈주할 궁리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냐. 그리고 아바마마도 옛날엔 이 길을 꽤 자주 이용하셨던 것 같고."

에스테반이 알려줬다는 것은 입이 찢어져도 못 할 말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 녀석은 도대체 뭐지? 이때까지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째서 자신은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까.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나타나고 심지어는 자신의 방까지 드나들었던 녀석이었다. 잠깐 유트리안은 생각에 잠겼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아시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참... 폐하답다고 해야 하나요."

"그 루이스 아르셰인 경도 홧김에 한 가출 중에 만나셨다는 모양이니까. 어렸을 때 들었어."

"엑, 정말요?"

다음에 꼭 제대로 물어 봐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아시엘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얼른 가요. 여기서 미적거리다 걸리면 목이 날아가는 건 저라고요."

"알았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유트리안은 몸을 숙여 좁은 개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거지적거리는 수풀을 뚫고 간신히 두터운 성벽을 빠져나가자 곧장 닥쳐오는 이질적인 빛에 그는 움찔하고 말았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차차 밝은 것에도 적응해 가고 제대로 초점이 잡히자, 먼 곳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그대로 소년의 시야에 파고 들어왔다.

"아-"

황성의 화려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밤의  길 끝에 자리잡은 민가의 작은 불빛들은 저 하늘의 별들과 닮아 있었다. 중심가에 모여든 와글와글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처음 보는 인간적인 냄새, 수많은 사람들이 가진 삶의 기척이었다.

"어때요? 소감이."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아시엘이 빙그레 웃으며 물어 왔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서민들이 살아가는 곳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살벌한 호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휘양찬란한 마차 안에서만 구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태까지만 해도 제대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바깥 나들이었지만 갑자기 가슴이 제멋대로 울렁이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쿡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자, 유트. 여기에서 멍 때리고만 있을 거야? 책 사준단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알았다고."

설레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유트리안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시엘은 킥킥거리며 본격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불 꺼진 거리를 종종걸음을 쳐 걸어 내려갔다. 황자까지 데리고 온 마당에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오랜만의 야시장 나들이에 아시엘도 기분이 좋아졌다. 점차 사람들의 소음이 가까워지고 야시장이 열린 번화가가 두 사람 앞에 펼쳐졌다. 지글지글 길거리 음식이 튀겨지는 고소한 냄새와 상인들의 왁자지껄한 호객 소리, 길거리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과 수상한 물건들이 잔뜩 늘어진 가판대와 어깨를 부대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에 유트리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시엘은 신이 나 떠들었다.

"멋지죠? 아니, 멋지지?"

"저건 뭐야?"

유트리안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긴 아시엘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꼬치나 간단한 군것질거리를 파는 간단한 포장 마차였다. 그는 황자의 옷을 잡아 끌었다.

"역시 처음은 군것질이지. 따라 와."

"어? 어어."

그는 엉겁결에 아시엘을 따랐다. 쩔쩔 끓는 기름 앞에 선 아시엘은 헤죽 웃으며 상인에게 동전 두 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닭꼬치 두 개 주세요! 그리고 튀김도 하나!"

"오냐! 형이랑 놀러 나왔나 보지?"

남자는 푸근한 미소를 담고 그에게 달짝지근한 양념이 발린 닭고기를 내밀고 봉투에 튀김 여러 개를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형? 유트리안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을 때 아시엘이 아뇨,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친구에요!"

"호오, 그래? 자. 맛있게 먹어라."

초면에도 반말을 내뱉는 그가 불쾌할 수도 있었지만 아시엘은 생글생글 웃으며 튀김을 받아 들었다. 이상한 것은 유트리안 역시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시엘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고 몸을 돌려버리자 그는 잠시 어찌할까 고민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우적우적 군것질을 하며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아까는 입구라 유독 더 혼잡했던 건지 깊이 들어오니 길이 넓어지며 제법 편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으로 길거리 음식을 손에 쥔 유트리안은 잠시 꺼림칙하게 꼬치를 바라보다 곧 용기를 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어...!"

"그렇죠? 튀김도 맛있어."

벌써 꼬치 하나를 다 먹어 치운 아시엘은 벌써 튀김을 꺼내 입에 넣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닥 많이 먹지 않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잠시 그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유트리안은 그에 질세라 꼬치를 다 먹어 버리고 야채 튀김을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말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열심히 튀김에 집중하는 그를 보며 아시엘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자, 다음은 어디로 가 볼까?"

"뭐가 있는데?"

"으음..."

그의 물음에 아시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장신구 상인들만 모인 골목도 있고, 책만 파는 골목도 있고. 이쪽 큰 길은 온갖 게 다 있어. 저번엔 동방에서 올라왔다며 살아있는 전갈을 파는 것도 봤다니까."

"잘 알고 있네. 자주 나왔나 봐?"

유트리안은 궁금증을 드러냈다. 아시엘은 간단히 웃어 보였다.

"아카데미 다닐 때부터 매번 카이랑 같이 왔으니까. 이 귀걸이도 졸업할 때 카이가 사 준거야."

"카이라면, 그..."

잠시 기억을 더듬던 유트리안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 무뚝뚝 면상 빨간 머리 말하는 거냐? 메르티스 가의 아들이라던."

"푸핫, 무뚝뚝 면상이라니 너무 심한 거 아냐?"

아시엘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여전이 못마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결국 그는 불퉁하게 말했다.

"그래서, 뭐 사달라고 했었지?"

"책! 마법서! 고대 기술서!"

조금의 뜸도 없이 바로 튀어 나온 말에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어른스러운 듯 하면서 눈까지 반짝거리는 꼴이 처음으로 제 나이대로 보였다. 그런 자신 역시 지금은 평범한 소년 정도로밖에 눈에 비치지 않는다는 것은 유트리안은 모를 일이었다.

"책벌레로 악명이 높다더니 사실이었네."

"악명이라니, 기왕이면 탐구심이 높다고 해... 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던 아시엘은 문득 하던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변하자 유트리안은 의아하게 눈을 꿈뻑였다.

"뭐야, 왜 그래?"

"... 방금 시선이 느껴졌는데..."

아시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은근한 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덩달아 황급히 주위를 살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수상한 한 사람을 알아 차리기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인파 사이로 유트리안은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라? 그것이 자신에게로 날아들고 있다는 것을 그가 차마 깨닫기도 전, 아시엘이 뛰어들어 그를 와락 감싸 안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작게 들려온 것도 그 때였다.

우당탕탕! 두 사람은 흙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부딪힌 머리가 지끈거려 신음을 흘리던 유트리안은 얼굴에 뚝, 뚝 떨어지는 무언가에 정신을 차리고 실눈을 떴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경악하고 말았다.

"야, 너...!"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시엘은 그렇게 대꾸하며 유트리안의 위에서 내려왔다. 작은 화살이 콱 박힌 그의 어깨가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지 영민하게 주변을 살피고는 아직도 굳어 있는 유트리안을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그럴 시간 없어요, 달려요!"

"어, 하지만-"

"빨리!"

아시엘이 다급히 소리를 지르자 유트리안은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도 어떻게든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어느샌가 그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와 부딪힌 사람들이 불평을 마구 터뜨렸지만 그것이 귀에 들릴 리 없었다. 방금 목숨이 노려졌다는 것과 아시엘의 부상 때문에 유트리안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아시엘 역시 멀쩡한 팔로 검을 뽑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피를 뚝뚝 흘리는 소년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어엇,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황급히 피해갔다.

짧은 유희는 이걸로 끝이었다. 그 인파 속에서 어떻게 노린 거지,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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