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0. 달빛 아래의 세상에서 (1)
"아시엘~ 기다리고 있었어."
저벅, 저벅. 환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가 그에게 다가가,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아시엘의 두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아시엘이 당황해 손을 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보고 싶었지? 그렇지? 황성에 들어와서는 거의 못 봤잖아."
"... 레이. 너 눈이..."
아시엘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눈 앞의 소년은 분명히 레이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했다. 레이는 그가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린 것이 기뻐 죽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 멋지지? 그 분들의 선물이야! 나도 이제 너랑 같아! 아시엘이랑 같아질 수 있어!"
선명한 적색으로 물든 레이의 눈동자는 달빛을 안에 품어 비현실적으로 반짝였다. 순간 아시엘은 섬뜩함을 느꼈다. 차가운 칼날이 그대로 심장을 관통한 듯한 감각에 휩싸여, 그는 지금 상황도 잊어버리고 눈 앞의 친구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설마, 설마. 저 붉은색 눈은 설마. 그의 눈동자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가 눈꼬리를 가늘게 휘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났잖아, 우리. 아카데미 때는 매일매일 함께 다녔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름답고 착한 아시엘.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시엘 아르셰인."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아시엘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아시엘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아주 가까이에 다가온 레이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황홀경에 젖어들었다.
"넌 항상 내 동경의 대상이었어. 니스에게 당하고 있는 걸 구해 줬었던 그 때부터 말이야... 넌 참 멋진 친구인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왔어."
"무... 슨.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그 눈은 어떻게 된 거냐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시엘이 그를 뿌리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목소리에 레이는 악의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화내는 거야? 기쁘지 않아? 내가 직접 데리러 왔는데."
아시엘은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가슴에 무언가 가득 들어찬 듯 갑갑했다. 차라리 심장이 터졌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하지만 그의 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는지 레이는 아시엘의 뒤쪽에서 굳어 있는 유트리안에게 관심을 옮겼다.
"저 사람이구나? 요즘 아시엘을 괴롭힌다는 멍청한 황자님이."
"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굳어 있던 유트리안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레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헤죽 미소지었다.
"소문이 자자한걸. 아둔하고 능력도 없고, 아무 재능도 없이 단지 성격만 더러운 제 1황자. 황제와 대공 전하의 기 싸움이 팽팽한 지금, 당신의 존재는 아무것도 되지 못해. 그런 주제에 아시엘을 귀찮게 하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소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레이는 성큼 큰 보폭으로 유트리안에게 바싹 다가섰다.
"네놈을 노린 건데. 네놈이 둔하게 있는 바람에 아시엘이 대신 맞아 버렸잖아. 눈치 있게 그냥 좀 뒈지지."
"그렇게 두진 않아, 레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시엘이 그렇게 쏘아 붙였다. 그의 한쪽 손 끝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혈이 어렵도록 만들어진 화살촉인지 시간이 지나도 출혈량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시엘은 상처 부분을 꾹 누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너는 적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
"글쎄- 과연 그럴까. 성급하게 굴지 말고 내 얘기를 좀 더 들어 봐."
레이는 다시 아시엘 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다시 헤실헤실 웃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방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시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때, 그의 감각에 또 다른 기척들이 잡혔다. 부스럭, 부스럭. 어둠에 잠긴 숲에서부터 시작된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갔다. 유트리안 역시 그것을 감지해 내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숲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돌풍이 그를 향해 불어 닥쳤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정체 모를 무언가가 그의 코앞까지 바싹 닥쳐 있었다. 뻥 비어버린 눈자위와 허물어진 코의 구멍 두 개, 썩은 내가 나는 입은 입술이 다 뭉개져 침을 뚝 뚝 흘렸다. 어-? 유트리안은 차마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자신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을 때도.
하지만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움직인 아시엘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 와락 끌어당겼다. 갑자기 휙 젖혀지는 몸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우당탕! 유트리안은 어느새 아시엘과 함께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윽...!"
"황자님, 괜찮아요?"
아시엘은 자신 아래에 깔린 유트리안을 면밀히 살피다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곧장 레이를 쏘아보았다.
"레이, 무슨 짓이야!"
"아- 참.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이번에야 말로 정말 끝장낼 수 있었단 말이야. 난 널 해칠 생각은 없다니까?"
레이는 아쉽다는 듯 툴툴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스윽, 스으윽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크고 작은 인영들이 휘적휘적 걸어 달빛 아래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그 모습들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작 다섯 정도라 생각했던 것이 큰 오산이었다.
검은 옷의 수많은 자객들과 방금 전 유트리안을 공격한 정체 불명의 몬스터가 둘 더. 아시엘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몸을 일으키고 유트리안의 앞을 지키며 가로막고 섰다. 저벅, 저벅. 그들이 서서히 다가서며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아시엘은 유트리안의 팔을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익숙한 기분 나쁜 검은 마력이 그들 모두에게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두 소년을 포위하며 공터의 중앙으로 몰아갔다. 앞, 뒤, 옆 모두 적이었다. 레이는 그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지켜보았다.
"아아, 안쓰러운 광경이야. 뭐가 널 그렇게 억척스럽게 만들었을까? 아시엘."
"목적이 뭐야? 그리고 너한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고."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까. 아시엘의 입가가 비틀리며 조소를 만들어 냈다. 대답은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이제 도움을 요청할 때도 아니었다. 레이는 어린아이같은 웃음을 함박 담았다.
"나, 아까 말했었지. 아시엘을 동경했다고. 어디에서나 1등이고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겁 먹는 일이 없고 항상 당당하지.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절대 당하고는 있지 않는 아시엘 아르셰인. 그래서 난 네가 부러웠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고아에다 돌봐주는 루이스 교수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기는 주제에 왜 저렇게 잘 난 건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점점 네가 미워지더라고. 하지만 루아 이클립스에 입단하면서 너의 모든 잘난 면의 비밀이 그 예쁜 눈동자에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다 대공 전하의 은덕이야."
자신의 세계에 푹 빠진 소년은 달빛 아래에서 홀로 춤추는 인형과도 같았다. 제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실에 엮여 세심하게 조종당하고 있는. 내가 알던 레이는 죽었어.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레이는 제 덩치보다 훨씬 큰 몬스터의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도 그 분들의 은총을 받은 거라면서? 에쉬리아 님과 같이. 그리고 나도 이제 그 분들의 힘을 이어 받았으니까 너와 같아질 수 있어."
"무슨 소리야, 그 분들이라니."
아시엘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레이는 어라, 하며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가득 입가에 웃음을 담았다.
"모르고 있었구나! 너도 모르는 게 있었어. 그렇다면 레이가 가르쳐 줄 수밖에 없네. 있잖아 아시엘, 네 시작이 어땠는지 넌 기억하고 있어?"
"뭐...?"
"네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이야. 고향은 어디고, 누구의 몸에서 태어났고, 어떤 식으로 네 그 삶이 시작되었는지. 넌 알고 있어?"
여전히 뜻 모를 말들이 이어졌다. 레이는 아시엘을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하긴, 알 리가 없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 모든 걸 누리던 녀석이 알 리가 없지! 운도 좋은 녀석이야, 넌. 있잖아, 그러면 내가 얘기해 줄게. 궁금할 테니까."
"아냐, 됐어. 입 다물어. 듣고 싶지 않아."
아시엘은 목소리가 떨려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 담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불안을 읽어낸 레이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킥킥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트리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가 곧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 녀석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네놈 같은 괴물이랑 똑같은 취급 하지 마."
"말이 심하네, 황자님. 바보같이 사탕 발린 말에 속아 넘어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은 입 다물고 있는 게 어때? 그래도 용기는 가상했어. 그리고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어 봐."
레이는 살풋 눈을 감았다 떴다. 이질적인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아냐, 내가 아는 적안은 저런 게 아냐. 유트리안은 되뇌었다. 아시엘의 것은 좀 더 밝고 따뜻한- 사랑스러운 빛이었다. 저런 피에 굶주린 짐승같은 것이 아니라. 레이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황자님, 내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 줄게. 당신 아버지와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니까 귀 활짝 열고 잘 듣는 게 좋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