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56화 (25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2. 달빛 아래의 세상에서 (3)

아시엘이 한 발짝을 떼는 것과 동시에 전투는 시작되었다. 유트리안은 순간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기도 전 소년의 작은 몸 앞에 나타난 몬스터의 신형에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카아아앙! 금빛 레이피어와 몬스터의 거대한 팔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아시엘은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었다. 우득,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나 싶더니 이내 촤아악! 검기 서린 레이피어가 몬스터의 팔을 찢어 놓았다.

"키에에에!"

몬스터가 녹색의 점액질을 내뿜으며 괴로워하는 찰나, 옆에서 다가온 자객이 단도를 휘둘렀다. 아시엘은 뒤로 풀쩍 뛰어 거리를 벌린 뒤 손을 뻗었다.

"파이어 스피어!"

허공에 마법진이 커다랗게 떠오르고 굵은 불의 창들이 밤하늘에 소환되어 맹렬히 쏘아졌다. 그들이 주춤하는 찰나 그것은 몬스터들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어 놓았다. 아시엘은 앞으로 튀어 나가며 다시 외쳤다.

"버스트!"

콰아앙! 거센 폭발음이 고요한 언덕을 뒤흔들며 시뻘건 불꽃이 일고 폭풍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자객들이 그것을 헤치고 간신히 시야를 확보했을때- 이미 아시엘은 그들에게 바싹 접근해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푸욱, 불유쾌한 감각이 손 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그는 간신히 무시했다. 레이피어 끝에 심장을 내어 준 남자는 두어 번 파르르 몸을 떨다 그대로 피를 쏟으며 절명해 쓰러졌다.

아시엘은 숨을 고르려 했지만 그럴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등 뒤에서 달려든 남자가 그의 목을 노리고 장검을 휘둘렀다. 아시엘은 간신히 몸을 숙여 피했다. 서걱, 머리카락 끝이 살짝 잘려 나가는 감각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지면을 짚고 시동어를 외쳤다.

"스톤 스피어!"

아직까지 허공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 콰가각! 지면이 치솟으며 자객의 몸을 찢어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그의 시신이 마법이 취소되는 것과 동시에 지면으로 툭 떨어졌다.

아시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심호흡을 했다. 그의 하얀 제복은 이제 그의 피 이외의 것으로도 붉게 물들었다. 유트리안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일전 황자궁으로 암살자들이 습격해 왔을 때 그는 그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끝냈다. 살생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피한다고 언젠가 기사단의 사람에게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레이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는 숨을 고르는 친구를 바라보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죽이지 않으려 애쓰더니, 역시 무리였지? 첫 살인을 축하해, 아시엘 아르셰인."

"닥쳐. 내가 저것들까지 사람으로 취급할 정도로 여유롭게 사는 건 아니거든."

아시엘은 입가를 비대칭으로 일그러뜨렸다. 새하얀 얼굴에 튄 자객의 피는 너무나도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결국 그들도 인간인 셈이었다. 그는 대충 뺨을 소매로 닦아냈다.

"레이 베르튼.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너."

레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아시엘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렇구나. 나구나."

"맞아. 너 때문이야.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날, 네가 안일하게 루아 이클립스에 입단한다는 나를 웃으며 보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네가 실험체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될 일도 없었겠지."

그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잠시 주춤했던 이들이 한꺼번에 아시엘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유트리안을 자신의 뒤로 숨기고 검을 다잡았다. 그래, 나 때문이구나. 검 끝에 흐르는 낯선 피가 묘하게 정신을 차분히 만들었다.

푸욱, 푹! 미처 피하지 못한 검이 박혀 드는 충격에 그는 휘청했지만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섰다. 곁에서 유트리안이 고함을 지르는 것을 무시하고, 그는 다시 마력을 운용했다.

"아퀴나 루 엔사 이피스트 아렌. 워터 체인."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 끝에, 그의 손 끝에서 푸른 마법진이 꽃처럼 피어나 물줄기를 쏟아냈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챈 남자가 검을 갈무리해 피하려 했지만 물의 쇠사슬은 아시엘의 어깨에 박힌 검날부터 손독까지 빠른 속도로 휘감았다. 그리고 아시엘은 마주한 눈동자가 당혹으로 가득 차는 것을 무심히 마주하며, 그의 몸을 검으로 갈라 놓았다.

툭, 투둑. 힘을 잃은 신체가 무릎을 꿇었다. 결박이 풀리며 그의 어깨를 관통했던 검이 그 주인을 따라 뽑혀 나가며 피를 튀겼다. 아시엘은 시큰한 통증을 무시하고 연속해서 달려드는 남자의 복부에 망설임 없이 검을 꽂아 넣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뜨끈한 피가 얼굴에 튀었다. 검 끝에 실린 무게와 전해지는 열기가 자객이 방금 전까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악몽 속의 그 광경과.

그 때, 숨이 끊어져 가던 남자의 눈이 크게 떠지며 축 늘어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차 한 그 순간에는 이미 푸욱, 아시엘의 복부에 검이 깊숙히 파고들고 있었다.

"아시엘!"

"아윽.....!"

아시엘은 비집고 나오려는 비명을 억눌렀다. 내장이 다친 건지 속에서 불 덩어리 같은 무언가가 왈칵 올라와 입가를 타고 주륵 흘러 내렸다. 순간 레이피어를 놓칠 뻔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남은 힘을 다 해 자객을 뿌리치고 그 목숨을 끊어 놓았다.

"허억, 헉... 윽..."

휘청거리던 아시엘은 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하지만 멀찍이 선 레이만큼은 너무나도 선명히 보였다. 레이- 그는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 했다.

"휘유- 대단한데? 역시. 그래도 너무 날뛰면 곤란해. 죽이면 아울 님과 슈베이만 대공 전하가 아쉬워하실 테니까."

"너...! 사람 물건 취급 하지-"

유트리안은 울컥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다 주춤 멈춰서고 말았다. 시신에서 흘러 나와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가 그의 부츠 끝을 적셨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어째서.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소년은 피투성이가 되어 위태롭게 서 있다. 그의 검 끝에서는 채 마르지 않은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져 붉은 웅덩이에 파장을 만들어 냈고 새하얀 제복에 감싸인 작은 몸은 얼룩진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막 목숨을 잃은 시신들이 뒹굴며 새빨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왜겠어? 너 때문이지.

그 때, 선명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분명 들어본 적 있는 낭랑한 미성. 곱디 고운 소년의 그것. 에스테반이었다. 유트리안은 이를 북 갈아 붙였다.

"네놈... 믿으라면서. 믿으라고 했잖아!"

갑자기 그가 허공에 대고 외치자 아시엘이 놀라 뒤돌아 보았다. 레이 역시 더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유트리안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너, 처음부터 날 속였던 거야. 이 자리에 아시엘과 나 단 둘만 불러내기 위해서!"

[그래도 난 일단 사실만 말했어. 저 아이가 너에게 뭔가를 감추고 있었단 건 정말이었잖아? 날 믿기로 택한 건 바로 너였어.]

정원에서 대화를 나눌 때와 다르지 않은 느긋한 어조로 에스테반이 말을 이었다. 유트리안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뭘 원하는 거야? 날 죽이고 아시엘을 납치하고 싶었어? 그런 거냐고!"

[글쎄. 그건 네 눈으로 확인해 봐.]

뭐? 그의 정신이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시엘의 방어에서 벗어난 자객 하나가 그의 코 앞까지 닥쳐 왔다. 유트리안은 그대로 얼어 붙었다. 피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두건 위로 빛나는 암살자의 두 눈만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거기에 비친 얼빠진 자신의 모습 역시. 남자의 거대한 검에 미끄러진 월광이 야속하게 번뜩였다. 영원과도 같은 몇 초 뒤- 콰드득.

그의 검은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게 젖은 도신이었다. 툭, 투둑. 굵은 핏방울이 바닥에 둥글게 떨어졌다. 어..? 멍한 의식이 차차 돌아오며  시야가 넓어졌다.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살아 남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그제서야였다.

새하얀 제복이 점차 붉어진 영역을 넓혀 갔다. 고통을 삼키지 못해 벌어진 입술 끝에서 피가 주륵 흘러 내렸다. 금가루를 뿌린 듯한 적안에서 빠른 속도로 생기가 사라져 갔다. 등에서부터 파고들어 완전히 그의 몸을 관통한 검 끝에서 새어 나온 피가 방울졌다.

유트리안의 머리는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기사의 신체를 무자비하게 헤집은 검이 쑤욱 뽑히며, 아시엘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커헉!"

힘을 잃은 그의 무릎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털썩. 그의 작은 몸이 쓰러지며 만들어 낸 작은 소음이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스산히 쓰다듬고 지나갔다. 유트리안은 멍하니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때,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봤지? 너 때문이지? 넌 짐짝에 불과해. 널 지키려 들지 않았다면 저 아이가 대신 검에 맞을 일도 없었겠지! 저 애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너, 함정에 빠지게 만든 것도 너야. 네가 조금만 더 강해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에스테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스치듯 황자를 비웃고 지나갔다. 유트리안은 쓰러진 아시엘에게 멍하니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그는 이제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안 돼, 어째서. 어째서-

"아시엘!"

"어허, 거기까지야."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어느새 다가온 레이가 검을 뽑아 들고 유트리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트리안은 멍하니 소년을 올려보았다. 단정한 붉은색의 제복의 소년은 가늘게 미소짓고 있었다.

"넌 여기서 죽어. 저 녀석은- 글쎄. 아직 숨이 끊어지진 않은 모양이니까 운 좋게 살아남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시체라도 들고 돌아 가야 아울 님께 혼나지 않을 테니까."

레이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유트리안은 초점 없는 눈으로 가만히 그것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의 완전히 망가진 정신은 차마 피할 마음도 들지 않게 했다. 죽어? 죽는 건가? 아시엘도 저 꼴이 되어 버렸고. 내 탓에.

이제, 상관 없어. 유트리안은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칼이 날아드는 검풍이 느껴졌다.

새카맣게 지워졌다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뺨에 닿는 뜨거운 액체였다. 그것이 자신이 쏟아낸 피라는 것을 알아 차리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소요되었다. 뿌연 시야가 차차 넓어지며 두 소년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였던 레이와 밉살맞지만 이제는 소중해진 유트리안이었다.

왜 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거지. 그것도 저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레이의 눈이 이상해. 내가 알던, 조금 소심하지만 당차고 밝았던 그 애가 아닌 것 같아. 왜 이런 상황이 되었더라. 난 어째서 쓰러져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줄줄이 이어가던 그는 곧 가까운 풀밭에 나뒹구는 황금빛 레이피어를 발견했다. 도신이 붉게 물들어 번들거렸다.

아. 나 때문이구나. 순간 모든 것을 떠올린 아시엘은 몸을 일으키려 필사적으로 상체를 움직였지만, 곧 다가온 한 남자가 그의 머리를 짓밟아 버렸다.

"으윽...!"

"얌전히 있어라. 네가 살아 남는다면 목숨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니."

몽롱한 의식에 낮은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입에서 꿀럭 꿀럭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나왔다. 귀에서 삐이익- 하는 이명이 들려 왔다. 점점 정신이 흐려져 갔다. 마구 흔들리는 시야에 유트리안에게 다가서는 레이가 보였다. 안 돼, 가지 마. 하지 마.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차마 실드 마법을 시전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움직인 몸은 유트리안을 밀쳐 내고 대신 칼을 맞고 있었다. 결국 안이한 판단을 내린 그의 잘못이었다.

마족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레이에 대해서 생각했더라면. 아니, 생각은 했다. 두려움에 외면하고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 뿐. 그 때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빼내려 애썼다면- 애초에 아카데미에서 루아 이클립스에 들어간다는 그를 말렸더라면 친구가 마족에게 삼켜져 저렇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였다.

제발 움직여. 움직여. 아시엘은 몸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까닥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통증과 메스꺼운 속, 귀의 이명 속에서도 악몽의 환각이 계속해서 덮쳐 왔다.

유트리안을 노린 레이의 검이 위로 치솟았다. 황자는 그 자리에 허망히 주저앉은 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안 돼. 도망쳐요. 그 간절한 말은 신음이 되어 입 밖으로 새 나왔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불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지만 아무리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치려 해 봐도 무리였다.

은빛 검날이 떨어졌다. 그것은 정확히 황자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안 돼, 안돼, 안돼- 죽어가는 의식 속에 경종이 울렸다.

악다문 이 사이로 피가 흘러 내렸다. 주먹이 발작적으로 떨렸다. 레이의 광기 어린 미소와 유트리안의 무력한 모습이 머릿속에 커다랗게 박혔다.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구해야 해. 모든 것을 다 게워내고 싶었다. 마력이 서서히 들끓기 시작했다. 안 돼, 죽게 둬선 안돼.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끔찍한 비명과 아우성, 삐이이이익 찢어지는 이명과 환각 , 쿵쿵쿵쿵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이 그를 괴롭혔다. 숨이 격렬하게 가빠졌다. 그는 손을 필사적으로 뻗었다. 닿을까, 닿지 않는다.  왜 안 움직이는 거야. 움직여. 저 두 사람을 멈추기만 하면 좋으니까 조금만 더 움직여 줘. 그 뒤라면 죽어도 괜찮아. 간절함과 집념이 의식을 마침내 가득 채웠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암전.

그리고 뚜욱.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에서 끊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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