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57화 (25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3. 달빛 아래의 세상에서 (4)

*유혈 주의*

아무것도 없이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소년. 태어난 곳도, 어디서 왔는지도 잊어버린 채 더러운 골목길에서 단지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었던 그였다. 하지만 어느날,  아이에게 투박한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함께 가자던 서툰 남자의 손길은 그 누구의 것보다 따뜻했다.

처음으로 온기를 느낀 그 날로부터, 그에게는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친구, 동료. 경계 어린 붉은 눈으로 사람을 믿지 못한 채 몸을 사리던 그 때와는 달랐다. 새로운 세상의 모든 게 그에게는 다 새롭게, 아름답고 눈부시게 다가왔다. 누구보다도 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 땅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음을 새삼 깨달았을 때. 그는 무언가를 잃었다. 많은 것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악몽. 그것은 단순히 꿈 뿐만은 아니었다. 현실이었고 과거였으며 그가 미래에 만들어 낼 광경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칼이 목을 가르는 고통따위는 닥쳐 오지 않았다. 유트리안은 의아함에 살짝 실눈을 떴고,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촤아아악! 한 박자 늦게 치솟아오른 피가 그를 덮쳤다. 툭, 투둑. 순식간에 몸에서 분리된 머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아... 아아..."

그 끔찍한 광경에 유트리안의 덜덜 떨리는 입에서 신음도 비명도 아닌 것이 흘러나왔다. 얼굴에 튄 더러운 피를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땡그랑, 힘이 빠진 손에서 검이 떨어지더니 경직된 듯 선 채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소년의 신체가 이내 무릎부터 땅에 떨어졌다. 털썩, 쿵. 붉은 제복의 어린 기사는 그렇게 순식간에 절명했다. 그리고 유트리안은 그제야 그의 뒤에 선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황금빛의 레이피어. 하얀 제복은 제 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달 그림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광채를 품고 있던 금발은 방금 자신이 직접 베어 버린 친우의 피로 엉망이었다. 그- 아시엘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의 상처에서 뚝뚝 떨어진 피가 바닥에 다시금 고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유트리안은 방금 목숨을 또 다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낯설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아시엘이 쓰러져 있던 곳을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아시엘의 머리를 밟고 있던 남자는 이미 사지가 찢긴 시신이 되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아시, 아시엘... 아시엘..!"

어떻게 움직인 거냐, 상처는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유트리안은 그의 이름을 더듬더듬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소년에게는 닿지 않은 듯, 아시엘은 휘적 휘적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관통당한 곳의 커다란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후두둑 흘렀지만 아시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방금 직접 자신의 손으로 오랜 친구였던 레이를 베면서도 그에게서는 한 점의 주저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대장을 잃은 자객들은 주춤한 듯 보였지만 이내 다시 검을 다잡고 다시 태세를 취했다. 마법사의 마력도, 검사로서의 검기도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은 탓에 그들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방금 레이의 목을 단칼에 친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도 그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이의 목이 바닥을 구를 때까지. 목숨을 잃은 본인 역시 끝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터였다.

유트리안은 주저앉은 채 넋을 잃고 말았다. 폭발적인 마력이 그에게서 솟구쳤다. 검은 안개가 꾸물꾸물 그의 손 끝에서부터 피어 나와 달빛 아래 선명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객들은 볼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번뜩인 새빨간 눈동자를. 그들이 흠칫하는 찰나, 아시엘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 남자의 얼굴이 찢겨 나갔다.

차마 그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소년의 가느다란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고 다음 순간 우드득 소리와 함께 뜯긴 것은 남자의 팔이었다.

"크아아아악!"

촤아악, 그의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훼손된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마족의 힘을 직접 받아들인 이들이지만 작금의 상황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 붉은 체액이 쏟아졌다. 아시엘은 무덤덤하게 주인 잃은 팔을 내던지고 레이피어로 그의 몸을 양단했다. 다시금 폭발하듯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뒤집어 썼지만 아시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다음 목표를 향해 돌아섰다. 자객들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차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 아시엘에게 닿기도 전 허공에서 쨍강!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아연실색한 그들이 몸을 굳히는 찰나였다. 가장 끝에 있던 이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컵... 커헉... 헉...!"

숨이 막힌 듯, 자신의 목을 쥐고 헐떡거리던 남자의 코와 입에서 주륵,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부글부글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콰아앙! 하며 그의 신체가 폭발했다. 살점이 날리고 체액이 비처럼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아시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 다음의 자객에게로 향했다. 이내 그 역시 울컥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옆, 옆옆의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부풀어 오르던 그들의 몸이 투둑, 소리를 내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안돼, 유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꽈악 쥐었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괴로워하던 이들의 몸이 바람을 불어 넣은 풍선처럼 흉측하게 우그러지며 부풀더니 이내 푸화악, 불쾌한 소리와 함께 한계에 다다른 풍선과도 같이 찢어지며 터져버렸다.

한 명, 또 한 명. 비명소리가 고요한 동산을 가득 채웠다. 역한 비린내와 죽음의 냄새가 지독하게 고였다.

"살, 살려줘! 제발! 살려주세요...!"

마지막으로 남은 한 남자가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손 마디마디가 퉁퉁 붓고 온 몸이 바람을 불어넣은 듯 둥글게 부풀어 살갗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뻘겋게 핏줄이 선 안구 역시 터질듯 말듯 요동쳤다. 아시엘은 무심하게 그를 내려보다 아내 톡, 손으로 살짝 그를 찔렀다. 우지직, 퍼어엉! 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했다.

"괴... 괴물..."

절반 이상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시점, 살아남은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년은 그 작은 손으로 자객들을 벌레 죽이듯 하나 하나 너무나도 쉽게 처리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유트리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시엘, 그만해!"

"......."

"이제 됐어, 그만 해도 괜찮잖아!"

하지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트리안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그제서야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유트리안은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그만둬. 응?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상처 벌어지고 있다고... 아시엘, 듣고 있어?"

아시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유트리안이 안심하려는 찰나- 그는 황자를 뿌리치고 다시 지면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차마 막을 새도 없었다. 자객들은 이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 붉은 검기가 선명하게 서렸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꿀럭꿀럭 액체처럼 움직이는 검은 마력이 덧씌워졌다.

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들썩이며,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요정이 빚어 만든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인형처럼 생기 없는 얼굴에 유일하게 선명한 것은 눈동자. 기묘하게 빛나는 두 눈은 새빨간 적색이었다.

아니야. 유트리안은 실성한 사람처럼 되뇌었다. 아냐, 내가 아는 아시엘은 저런 게 아냐. 한없이 친절하고 상냥하고 따뜻했던 금색의 온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아시엘의 검이 사정없이 자객들을 난자하고 있었다. 얼굴에 피가 튀고 공포에 찬 괴성이 공기를 찢었다. 도망치려던 자의 몸이 콰아앙,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후두둑 살점과 내장이 쏟아지고 지면에 움푹 패인 자국이 생겼다.

자객들의 육체가 으깨지고 마력에 녹아 내리고 검에 잘려나갔다. 공터에 곱게 자란 잔디가 시체에서 흘러나온 체액을 먹어 달빛 아래에 자주색으로 번들거렸다. 쇳소리와 혈향이 진득히 공기 중에 녹아 금방이라도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낼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의 가운데에 선 아시엘은 한없는 무표정이었다.

경악성과 고통스러운 비명, 공포에 찬 아우성과 쇳소리가 멎었을 때 그 곳에 남은 것은 스산한 침묵이었다.

마침내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곤 단 둘 뿐만이 남게 되었을 때, 아이의 두 손은 피와 살점으로 점칠되어 있었다. 시체의 조각으로 뒤덮힌 공터를 달은 공평히 그 빛을 나누어 주었다.

달빛 아래의 세상에 선 소년은 몸을 축 늘어뜨리고 그 모든 것의 가운데에 있었다.

온갖 더러운 것에 물들고 찌들었지만 월광의 가호를 받은 아시엘은 여전히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짓지 않는 그의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지만 아무것도 담지 않은 고운 얼굴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새하얀 피부에 텅 비어버린 핏빛 동공이 멍하니 이 아비규환과 자신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유유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세다 포기한듯 한없이 허망했다.

뚝, 뚝. 죽어버린 인간들의 파편이 검 끝에서 떨어졌다. 그의 발치에는 몬스터의 사체와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들이 달빛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작은 지옥을 밟고 선 그는 하나의 명작품이었다.

유트리안은 그 광경을 말을 잃고 멍청히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피에 젖은 아시엘은 매혹적이었다. 잔혹히 목숨을 잃은 시신들을 밟고 붉게 물든 새하얀 제복 자락을 흩날리는 그는 외따로이 떨어진 세계의 존재인듯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수 초 후, 털썩. 실컷 가지고 놀아지다 버려진 인형처럼 아시엘의 여린 몸은 그대로 쓰러졌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유트리안이 시체들을 밀치고 황급히 달려가 그를 안았다.

"야! 아시엘! 아시엘 아르셰인! 눈 떠!"

하지만 죽은 듯 감긴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간신히 느껴지는 호흡 역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약해졌다. 유트리안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꾹꾹 눌러 담았던 두려움과 불안이 그제야 긴장이 풀려 쏟아져 나왔다.

"제발..."

고인 눈물 한 방울이 결국 아시엘의 뺨에 떨어져 이미 굳은 핏자국을 살짝 녹이며 흘러내렸다.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터져나오는 것을 그는 막지 못했다.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방울방울 흘러 나왔다. 그는 아시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차가운 손을 꽈악 맞잡았다. 점점 멎어가는 미약한 맥박이 불안하게 전해졌다.

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일단은 살리고 봐야 했다. 여기에서 이렇게 그를 잃는다면 유트리안은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유트리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끔찍한 시신들 사이로 반짝이는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장식 부분에 금이 가 통신용으로서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대강 훔치고 끙끙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아시엘을 안아 올렸다. 힘 빠진 육체가 저항 없이 따라왔다. 질퍽, 바닥에서 묻은 살덩어리들이 옷과 얼굴에 묻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무대에서 퇴장하는 두 소년을 말없이 굽어본 것은 단지 새하얀 달 뿐이었다. 유트리안은 힘겹게 한 걸음을 옮겼다. 철퍽 하는 감촉에 다시 게워내고 싶어졌지만 유트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연재공지입니다!

안녕하세요, 가언입니다! 우선 3년이란 긴 시간동안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당!

오늘 공지를 올린 이유는 연재주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저는 고등학교 생활+입시=미친 대학교 의 루트를 타며 주 2, 3회 요일을 정해서 업데이트를 했습니다만

대학교의 자유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데헷☆

그리고 대학의 고달픔 역시 뼈저리게 실감 중이지요...

각설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월, 목 오전에 업데이트되던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은 >>>>자유연재<<< 로 업데이트됩니다

연재속도의 향상과 분량 조절, 그리고 완결까지의 막판 스퍼트를 최대한 활용하고자(그리고 가언이의 스케줄을 조절하고자) 합니다.

불안정해지고 연재가 늦어지면 다시 스스로를 재촉하기위해 요일 연재로 갈 예정입니다.

언제나 지켜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자면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은 완결 후 출판사와 공모전에 투고할 예정입니다. 글이 비공개로 돌아갈지도 몰라요....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머나먼 완결...)

+) 절정에 다다라 여러분이 보여주신 아시엘에 대한 크나큰 애정 역시 감사드립니다... 댓글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처음이야(동공지진) 그리고 카이스에게 이르지 말아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