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4. 흔들리는 균형 (1)
믿을 수 없는 모습에 기사들은 아연해졌다. 생활관 바깥으로 나가려는 것을 방해하는 몬스터 무리와 싸우던 그들 역시 상처와 몬스터들의 사체로 엉망 진창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지만 하지만 절대로 이런 걸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맹렬하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일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보랏빛 구슬이 바닥을 구르고 있다는 것을 채 인지하기도 전 검을 내던지고 생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간 루이카엔과 케빈이 수정구를 붙들고 연결을 시도했지만 황자와 함께 있을 아시엘에게서의 회신은 없었다. 그제야 다른 기사들 역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직접 수색할 요량으로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들의 앞에 비틀비틀 나타난 것은 유트리안과 그의 품에 죽은 듯 안긴 아시엘이었다.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추측되는 것을 온 몸에 덕지덕지 묻힌 그에게서 지독한 혈향이 풍겨 왔다.
"....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이야기는 나중에 해. 그것보다 치료사... 치료사부터 불러."
눈물에 얼룩덜룩해져 지저분한 얼굴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아시엘의 상처는 당장 숨이 끊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워 보였으니. 루이카엔은 아시엘을 급하게 넘겨 받았다.
"제르닌, 영감을 불러 와. 빨리!"
"알았어."
제르닌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뛰어 나간 뒤, 루이카엔은 아시엘을 로비에 옮겨 눕혔다. 힘겹게 몸을 가누는 유트리안은 오스카가 부축했다.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밝은 곳에서 본 상처는 더욱 처참해서 그들은 말을 잃고 말았다. 옷소매는 모두 붉게 물들었고 덕지덕지 붙은 이물질 아래로 벌겋게 피를 문 상처가 보였다. 찔리고, 베인 부상은 작은 몸에 너무도 커다랗게 보였다. 루이카엔은 자신의 손과 옷에 묻은 그의 피를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출혈이 너무 심해. 이러다간..."
"비켜 봐."
칫, 혀를 찬 벨킨이 그에게 다가가 축 늘어진 피투성이 손을 잡았다. 마치 시신처럼 차가운 감촉에 그는 흠칫했지만 이내 마력을 운용해 시동어를 외쳤다.
"큐어!"
그의 손 위로 새하얀 마법진이 번쩍 떠올랐다 사라지고 빛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벨킨의 손이 마력의 반발로 퍼엉, 튕겨나오고 말았다. 그는 저릿해진 손을 주무르며 신음을 흘렸다.
"치료 마법이 안 통해. 응급 처치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케빈이 조용히 읊조리자 소란스럽던 생활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향한 곳은 소파 한구석에 앉아 있는 유트리안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당신과 외출했던 아시엘이 이꼴이 되었나, 묻고 있는 겁니다."
"... 이야."
황자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 나왔다. 잠시 후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하지만 조금 더 선명하게 말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억지로 나가자고 해서, 아시엘이..."
"나중에, 나중에. 일단은 아시엘이 먼접니다."
루이카엔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리 될 줄 미리 알았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을 때부터 그가 표적이 될 줄은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피투성이로 돌아온 소년은 미리 예견된 악몽이었다.
점점 호흡이 약해져 가는 아시엘을 기사들은 차마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모두 애타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카이스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담담한 검은 눈동자로 가만히 친구를 내려보았다. 하지만 꽉 쥐어진 그의 주먹이 그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제르닌과 함께 치료사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그는 아시엘을 확인하고는 곧장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야? 이 애송이는 왜 다 죽어가?"
"늦었어, 영감!"
케빈이 신경질적으로 재촉하는 것을 흘려 들으며 그는 곧장 아시엘의 곁에 앉았다.
"두 놈만 남아.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다 꺼져!"
"제가 남을게요. 벨킨도 여차하면 마법으로 서포트 해."
베르칸의 말에 벨킨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황자까지 모두 한밤중에 생활관 바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한순간에 쫓겨난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그들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앞 정원에는 아까 전까지 몬스터들과 벌이던 사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들이 한순간에 소멸하며 남긴 보랏빛의 구슬들 역시 달빛을 받아 영롱히 반짝였다. 루이카엔은 멍하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제 숨길 때가 아니지 않나?"
제르닌의 한 마디가 짙은 침묵을 깼다. 루이카엔은 그의 곧은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갑자기 변종 몬스터가 나타나더니 거기에선 이상한 구슬이 나왔고. 그것도 흐지부지 넘어가 버리더니 최근에는 계속 이상한 일만 터졌어."
"......."
"아시엘도 저 꼴이 되어서 돌아왔고.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루이카엔은 여전히 대꾸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최근에야 모든 것을 알게 된 케빈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슌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엉망이 된 잔디밭. 몬스터의 습격. 그리고 공격받은 아시엘과 유트리안. 이미 일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던 거였다. 아시엘이 은밀히 움직인 것과 같이 그쪽도 숨을 죽이고 틈을 노려 왔을 터였다.
기사들은 재촉하지 않았다. 아델레트도, 제르닌도 가만히 루이카엔을 응시할 뿐이었다.
"... 그 자식들, 아시엘을 데려가려고 했어."
그 때, 유트리안의 목소리가 한밤중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모두의 시선이 정원용 돌에 대강 걸터 앉은 그에게로 모였다. 유트리안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애쓰며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었다.
"내가... 내가 그 녀석에게 속아 넘어간 탓이야."
"그 녀석이라뇨?"
아델레트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 앉히려는듯 눈을 감고 짧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조금씩, 그들의 앞에 꺼내 놓기 시작했다.
"에스테반. 놈은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처음 그게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아시엘이 파견을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
그는 달콤하게 유트리안을 유혹했다. 당신에게 그 어린 기사님은 어떤 사람이지요? 황자님은 그를 신뢰하고 있지만 과연 그는 어떨까.
그 기사님은 비밀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속삭이던 미성이 다시금 머릿속에 독약처럼 스며 들었다. 죄악감이 다시 고개를 들며 심장을 콱 틀어쥐었다.
"녀석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라고 했어. 그래서 난 아시엘이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시장에 나가자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둘이 나갔어."
"일전에 싸우셨다는 이유가..."
"내가 의심했거든."
누군가의 물음에 유트리안은 쓰게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에 모두가 멍해진 것도 모르고 그는 중얼중얼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 에스테반의 함정이었던 거야. 결국 내가 멍청하게 내 손으로 아시엘을 그 속으로 끌고 들어간 셈이라고."
루이카엔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이 지끈거렸다.
"그러면, 놈들은 황자님을 노린 게 아니었습니까?"
"난 죽이고 아시엘은 데려가겠다고 그랬어. 중간에 들은 이야기는 나도 잘 모를 말들이었지만 어쨌든 날 버리면 살려 주겠다고 말했어."
"누가 말입니까?"
이번에는 카이스가 재우쳐 물었다. 유트리안은 아시엘이 입에 담았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시엘이 뭐라고 부른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어. 친구 어쩌고 하는 소리도 지껄였고. 나보다 어린 남자애였는데 루아 이클립스의 제복을 입고 있었지."
"뭐...?"
카이스의 얼굴이 급속도로 딱딱하게 굳어갔다. 사정을 대충 아는 루이카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객을 수십 명 데리고 왔었어. 이상한 몬스터도. 그 애가 이끄는 것 같았는데..."
유트리안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달빛 아래 춤추던 무표정의 아시엘. 점점 늘어가던 사체들. 비명소리. 혈향.
"다 죽었어. 아시엘한테."
"죽어...?"
순간 그들은 모두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아시엘의 소매와 손이 피로 젖어 있어 사투를 벌였다는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시엘이 죽였단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럴 리가..."
"나도 모르겠다고! 아시엘이 크게 상처 입어서 쓰러지고 나도 그 기사한테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녀석이. 유트리안은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처럼- 아니, 그 모습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항상 인간적인 녀석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인형이 되어 버렸다.
결국 다시 시야가 뿌얘지는 느낌에 그는 급하게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 때, 카이스가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유트리안은 의아하게 그를 올려보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뭐?"
특유의 무뚝뚝한 한 마디에 유트리안이 어리둥절해 하는 찰나, 빠아악! 강한 주먹이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유트리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잔디밭을 뒹굴었다. 아델레트가 고함을 쳤다.
"카이스!"
"당신한테 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카이스는 유트리안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때까지 덤덤하다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그의 눈은 진득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유트리안은 쓰러진 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카이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자님을 지키려고 그랬던 겁니다. 그건 전하도 잘 알고 계시겠죠. 제 몸 하나 건사하려고만 했다면 저 녀석이 저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격앙된 외침에 모두는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이스의 어깨가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그 멍청이가 왜 당신을 목숨 걸고 구하려고 했습니까. 끔찍하게도 살생을 싫어하는 녀석인데 손에 피까지 묻혀 가면서요. 당신이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곰곰이 잘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그 뒤에 울든 저를 한 방 후려 갈기든 알아서 하세요."
고함이 잦아들고 정원에는 카이스의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가득 찼다. 유트리안은 그제야 비척 비척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그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내일부터 아주 난리가 날 겁니다."
아델레트가 조용히 말했다.
"그쪽은 무려 황자를 죽이고 기사를 납치하려 했고, 그게 실패한데다 기사까지 한 명 잃었으니 어떻게든 움직일 거야. 지금 후카덴 영지의 사건으로 줄다리기하던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더 모르겠고. 루이카엔, 뭔가를 말해야 한다면 지금 말 하는게 좋아. 뭐가 닥쳐 오건 알고 대비하는 게 훨씬 낫잖아?"
기사들은 조용히 동조했다. 그들은 모두 루이카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힘 있게 덧붙였다.
"적어도, 뭐 때문에 아시엘이 저렇게 되었는지 정도는 알아야겠어. 그게 누가 됐던 있는 힘껏 조져버릴 거니까."
아직 내부 첩자가 누구인지 밝히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