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5. 흔들리는 균형 (2)
새벽에 벌어진 일들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일파만파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다. 소식에 둔한 셀레니스 기사단은 모르고 있었지만 황자가 호위 기사 하나만 대동한 채 모습을 감춘 덕분에 이미 저녁부터 밤까지 내내 황궁 안에는 소란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몰래 황궁을 빠져 나갔었고, 함께 갔던 그의 기사가 빈사상태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이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간밤에 셀레니스 기사단의 생활관에 몬스터가 침입했다는 소식 역시 전해지면서 궁은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졌다.
황자는 자신의 처소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그 누구도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 덕분에 자세한 상황은 아무도 모르게 되어 버렸지만 귀족들 중 태반은 그 사건의 배후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궁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두 시간마다 귀족들 간의 회의가 열리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러던 중, 황성의 내벽 정문에서는 또 다른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방문객 한 명 덕분이었다.
[간밤의 생활관 몬스터 습격 사건에 대해서는 잘 들었습니다. 황궁 내에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별일이로군요.]
수정구에서 슈베이만의 음성이 흘러 들었다. 라이펜은 희미하게 빛나는 수정구를 앞두고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몰래 황궁을 빠져 나갔던 황자가 어제 기습 공격을 받고 그를 지키던 기사가 중태에 빠졌습니다.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측의 기사 하나 역시 행방불명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테지요.]
"물론입니다."
라이펜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의 입술 역시 미미하게 비틀렸다. 어째서 갑자기 황성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을 습격한 것이 붉은 제복의 소년이라는 사실은 이미 루이카엔에게서 전해 들은 바였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귀에 들어 갔다는 것은 슈베이만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무슨 속셈이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그러면 나중에 회의에서 뵙도록 하지요.]
결국 라이펜이 그렇게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통신은 툭, 하고 끊겨버렸다. 라이펜은 빛이 사라진 수정구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미 벌인 일이라 이건가."
멍청하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당해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기분은.
"더럽군."
그 때, 콰아앙! 황제의 집무실의 첫 번째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당황한 근위병들이 말리다 나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쿵쿵 성난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소란에도 라이펜은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싱숭생숭한 기분에 늦게까지 침소에 들지 못하고 있던 어젯밤- 이 아니라 새벽녘 들어온 보고를 받자마자 대충 예상했던 바이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탕! 안쪽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벽과 충돌했다.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이 폭발했다.
"라이펜!"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그에게 다가가, 남자- 루이스는 멱살을 잡아 올렸다. 우당탕, 고급스러운 의자가 뒤로 넘어지고 라이펜의 몸이 우악스럽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 새끼야!"
"루이스 경, 진정하십시오!"
허둥지둥 따라 온 근위병들이 당황해 떼어 내려 했지만 그들은 맥도 추지 못하고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라이펜의 멱살을 쥔 루이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말 해, 무슨 일이냐고!"
"얘기할 테니까 진정해, 일단."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라이펜의 말에 그의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그의 갈색 두 눈에서 진한 농도의 증오가 배어나왔다. 라이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으니까 진정해. 여기에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는 눈짓으로 뒤의 근위병들을 가리켰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칫, 혀를 차며 라이펜을 내던지듯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쩔쩔매는 병사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꺼져. 그리고 내가 나갈 때까지 들어오지 마."
"하지만..."
"나가. 황명이야."
그들이 망설이자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라이펜이 말했다. 결국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탁, 열렸던 문이 다시 닫히자 벽에 부닥치며 난 흠집이 커다랗게 보였다. 라이펜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저거 비싼 건데."
"지금 농담이 나오냐, 이 개자식아."
루이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라이펜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눈은 완전히 맛이 가 있었으니.
"얘기하고 싶으면 앉아. 아무리 너라도 여기에서 칼 뽑이 들면 체포할 수밖에 없으니까."
"......"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쏘아보던 루이스는 이내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며 별 수 없이 손님용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여나오고 있었다. 라이펜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는 기대하지 마라."
"어떻게 된 거야."
루이스는 잔뜩 일그러진 미간을 주물렀다. 의도치 않게 잔뜩 갈라져 나온 목소리가 거슬렸다. 라이펜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유트리안이 억지를 부려서 아시엘을 데리고 나갔나 봐. 그 때를 노려서 놈들이 공격한 거지. 아니, 애초에 유트리안을 들쑤셔서 아시엘을 데리고 단 둘이 나가도록 유도한 게 그쪽이라고 하더라. 유트가 루이카엔한테 직접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하더군. 본인도 아직 제정신은 아니라 자세한 건 나도 듣지 못했지만."
"...그건 루아 이클립스만의 관여였냐. 아니면 '그쪽' 일인 거냐."
라이펜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허공을 바라보다 버릇처럼 턱을 괴었다.
"어제 그 녀석들이 사라졌을 때 셀레니스 기사단 생활관에 몬스터들의 습격이 있었다. 죄다 변종이었고, 유트가 아시엘을 데리고 돌아올 때 쯤 시체 빼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예의 구슬이 남아 있었지."
"......"
"구하러 가지 못하도록 한 거야."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하지만 미미한 미소를 담고 있는 입술과는 달리 그의 눈썹은 불쾌하게 찌뿌려져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라이펜이 툭 내뱉았다.
"미안하다."
"뭐?"
"내 잘못이야. 내가 조금만 더 황자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건 아버지로서의 실책이다. 그리고 그 녀석을 형님의 눈 닿는 곳에 밀어 넣은 것도 나니까."
"......."
루이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도는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 입궁한다."
"뭐?"
이번에 의아한 소리를 낸 것은 라이펜이었다. 10년을 고집스럽게 버틴 친구였다. 루이스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아들이 저 꼴이 됐는데 날더러 두 손 놓고 보고 있으란 건 아니겠지. 심지어 내가 진행하던 일 때문이야. 난 지금도 하루에도 골백번씩 그 날, 아시엘이 비밀을 알아 차리고 아카데미로 찾아온 날 그냥 돌려 보내지 않았는지 후회하고 있어."
"루이..."
"그리고 모든 게 다 끝나면 그 때 떠날거다. 어디에서 농사를 짓건 장사를 하건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어. 평범하게 살게 할 거야. 재능? 능력? 그딴 거 다 필요 없어.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아이야. 더 괴로워하게 두지 못해."
그렇게 못 밖는 그의 눈빛이 너무 단호해서 라이펜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 저 속에는 자신과의 연 역시 끊겠다는 속 뜻이 숨어 있었다. 이 제국의 정점인 그만큼 위험한 자는 없으니.
라이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렇게 해."
오랜 친구를 붙잡을 자격 따위,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황좌에 앉은 자신에게는 없었다.
동생과의 통신을 마친 슈베이만이 곧장 향한 곳은 대공궁의 가장 안쪽에 놓인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티 테이블에서 향긋한 차를 음미하던 아울이 손을 들었다.
"여- 대공 전하. 왔어?"
"잠시 용무가 있어 늦었습니다."
슈베이만이 느긋하게 대답하던 목소리에 아울의 무릎에 폭 안기듯 앉아 다리를 달랑 달랑 흔들던 에스테반이 고개를 빼곰 내밀었다. 그리고 또 그의 위에 앉아 손장난을 치던 슈베이만의 어린 아들, 디안이 눈을 반짝였다.
"아버지!"
"안녕!"
"나들이는 즐거우셨던 듯 하더군요."
아들의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에스테반의 천진한 인사에 슈베이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는 녹스와 루아 이클립스의 단장 에피로스 드 헤이타 역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에스테반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 디안이 쪼르르 슈베이만에게 달려갔다. 그는 웃으며 아들을 안아 들었다.
"그나저나,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렇지?"
아울이 은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스테반 역시 재미있다는 얼굴로 방긋거렸다.
"맞아! 설마 그 자리에서 몽땅 다 죽여버릴 줄이야. 그 친구라던 꼬맹이까지 단칼에 목을 날렸잖아?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렸던 거겠지. 황자님이 그렇게나 소중했던가."
"일단 친구였던 녀석이 그런 식으로 나왔다는 것부터가 충격이었을 거야."
고개를 갸웃하며 아울이 덧붙이자 그는 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다. 녹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표정이 영 좋지 않군. 계약자."
"예?"
갑작스러운 말에 에피로스가 움찔했다. 녹스는 무심하게 책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아닙니다."
에피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석연찮은 표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슈베이만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늘 아침 루이스 아르셰인이 궁으로 쳐들어 왔다더군. 아시엘 아르셰인이 우리 쪽으로 돌아섰다면 가장 좋은 결과였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아."
궁 밖에 머물러 감시하기 힘들었던 루이스 아르셰인이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궁에 드나든다면 지금 상황에서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소드마스터가 돌아온다면 라이펜에게 힘이 조금이나마 실리겠지만 그것은 내일 회의에서 해결될 문제였다.
"소년의 피가 뿌려진 무대에 배우가 모두 모였어. 이제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승기를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품에서 디안이 천진하게 머리칼을 붙잡고 장난을 쳤다. 슈베이만은 아이의 등을 찬찬히 쓸어 주었다. 막이 오르기 전 조금 손 봐야 할 쥐새끼가 한 마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