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60화 (26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6. 흔들리는 균형 (3)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따스한 햇살을 가져다주며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감탄하던 한 소년은 깊이깊이 잠이 들어 버렸다. 하얀 배게 위에 흩어진 금발을 조금 떨리는 손으로 살짝 넘겨주는 루이스에게 치료사가 잔인한 말을 툭 뱉어냈다.

"정말 간신히 숨만 붙여 놓은 거다. 어떻게든 살려는 놨지만 이 애송이가 눈을 뜬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루이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치료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피투성이 붕대를 한 아름 안고 그대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방 안에 맴도는 진한 약 냄새가 지속적인 환기에도 불구하고 코끝을 찔렀다. 파란 하늘이 무색하게도 아시엘의 눈꺼풀은 닫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는 한없이 옅었다. 그래도 일단은 살아 있다는 데 안도하며, 루이스는 아들의 차가운 뺨을 쓸었다.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을 때 생기 넘치게 웃으며 씩씩한 눈을 반짝였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는 곱디 고운 도자기 인형이었던 것처럼, 창백한 얼굴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숨을 멈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이스는 가슴 한켠이 섬뜩해졌다.

"정말 걸작인 아들을 두셨네요, 루이스 경."

그 때 뒤에서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루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아카데미에 있던 그에게 소식이 전해진 것은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에 보일 정도로 푸석해진 그의 얼굴에 케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못된 녀석. 제 아버지 얼굴을 이렇게나 상하게 만들다니."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려고 온 거냐?"

"그럴 리가요. 경이 오셨다길래 고자질이나 좀 하러 온 겁니다. 저 녀석이 못 듣는 동안에요. 귀는 유별나게 밝으니까."

케빈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그의 맞은편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루이스의 무심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그는 입술을 삐죽였다.

"처음에는 여자앤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루이카엔 급으로 막가파이질 않나. 처음에 착각했다가 발광하는 바람에 기겁했다고요. 경은 못 보셨죠? 사악하게 히죽거리는 이 녀석 얼굴. 그럴 때 걸렸다가 뼈도 못 추린 놈이 여럿 있죠."

경비대의 헨슨과 니엔이라던가. 루이카엔과 케빈 역시 놀리다 몇 번 호되게 걷어차인 전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가 온 뒤로는 항상 있던 일상이었다. 케빈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 별난 놈입니다.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서 사람 간 쫄리게 만들질 않나 쪼그만 게 커다란 눈만 반짝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대는지. 덕분에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전부 홀려 버렸어요, 이 녀석한테."

루이스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케빈은 다시 얼굴을 굳히고 말을 이었다.

"징계 처분을 내리신 다음,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녀석을 도우라고. 그리고 이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던 상황을 알게 되고 나서는 놀라기보다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만.. 결국 도울 기회조차 없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숨겼어요. 그 전까지 벅찬 기색도 전혀 안 보였다고요."

"......"

"루이스 경은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렇게 완벽하게 감출 수가 있어요? 적어도 루이카엔한테는 먼저 말 해 주셨어도 괜찮았잖아요."

루이스는 의식 없는 아들의 낯선 모습만을 바라보며 무의식중에 옷깃의 뱃지를 매만졌다. 언젠가 아시엘이 첫 월급을 받았다며 내민 선물이었다. 그 때, 그냥 귀여운 아들로만 지내게 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을 수 있었을까. 케빈이  말을 고르듯 눈을 데굴 굴리다 이내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었다.

"에이, 씨. 어쨌든... 죄송합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키지 못한 건 저희니까요. 이 녀석이 외출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게 저였어요. 그 때 어떻게든 따라 붙었어야 했는데."

"다른 놈들은."

드디어 루이스가 짧게 툭 말했다. 그게 무엇을 묻는지 케빈은 모르지 않았다.

"루이카엔도 아직 고민 중입니다. 갑자기 본 적도 없는 몬스터가 대량으로 나타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마치 아시엘을 구하러 가지 못하도록 막기만을 위해서 나타났던 것처럼요. 기사단의 다른 녀석들이 뭔가 있단 걸 느끼지 못하는 게 문제 있는 겁니다."

"... 그렇지."

"하지만 폐하가 말씀하셨습니다. 기사단 안에 내부 첩자가 있는 것 같다고요. 이 상황에 모든 걸 다 밝혀버리면 놈을 잡아 내긴 더 어려워질 거예요."

루이스의 입이 다시 굳게 닫혔다. 케빈은 재촉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 보기만 했다. 이윽고 여전히 아시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루이스가 짧게 말했다.

"상관 없어.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숨겨 봤자야. 그리고 이제 뒤에서만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예...? 그렇다면."

"내가 앞에 나설 거다."

케빈의 놀란 목소리에 그가 차분히 대꾸했다. 이렇듯 대놓고 움직였다는 것은 분명 저쪽도 준비가 다 되었다는 뜻일 터였다. 하지만 아시엘과 유트리안, 그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예상 외일 터. 루이스가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첩자는 내 손으로 처리한다. 이쯤 되면 그 놈도 얌전히만 있기는 힘들겠지."

그 살벌한 기세에 케빈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루이스는 그에게로 차가운 시선을 옮겼다.

"루이카엔에게 전해. 그리고 네놈도 새겨 들어라."

"예?"

케빈은 다시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시엘의 뺨에 닿아 있는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의 회색 눈동자는 채 숨기지 못한 분노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내 아들을 이 꼴로 만들면 네놈들부터 죽여 버린다. 그리고, 똑같이 이 꼴이 되어서 나타나도 죽여 버린다. 알겠냐?"

".....예."

케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를 거스를 수 없었다. 루이스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나가라는 조용한 종용에 케빈은 그대로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의 그를 방해하는 것은 도저히 못 할 짓이었다.

탁, 문이 닫히고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넌 여기서 뭐 하냐."

"숨 쉽니다."

아래쪽에서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까 그가 들어갈 때에도 똑같은 상태였다. 케빈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이 녀석이 더 문제일지도. 방문 옆에 등을 기대 앉은 채, 카이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밥은 먹었냐?"

"대충요."

카이스는 간단히 고개를 까닥였다.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데 케빈은 자신의 손을 걸 수 있었다. 후배의 쾡한 눈자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어제 일 때문에 어차피 아무도 궁 밖으로 나가진 못할 테니까. 아니면 차라리 들어가 있던지. 청승맞게 이게 뭐냐?"

"... 오늘까지만 이러고 있겠습니다."

카이스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결국 케빈도 포기하고 그의 붉은 머리를 헝클어 준 뒤 그 자리를 떠 버렸다.

곧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하지만 슈베이만은 느긋하게 궁, 자신의 처소에 앉아 차 향긋한 차 한 잔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여유로운 공기 속,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이 곳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제복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슈베이만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남자는 주저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대공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슈나리엔."

"예."

남자, 슌은 더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다. 슈베이만은 빙그레 입꼬리를 휘고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온기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이름을 준 사람이 누구지?"

"대공 전하이십니다."

슌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은 힘이 들어간 듯 부르르 떨렸다. 양 손에 식은땀이 가득 찼다.

"어째서 보고하지 않았지? 그 소년이 흑마법에 대해 알아 차리고 있었다고."

"... 제 불찰입니다. 전하의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습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흠, 그렇군. 슈베이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쓸었다.

"하지만 실패했지.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쪽이 옳았던가."

"송구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송구... 합니다."

슌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대공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슌과 시선을 맞췄다.

"고개를 들어라."

"......"

슌은 명령을 따랐다. 대공의 황금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몸이 얼어붙을 듯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그 때도 그랬었다. 그의 손에 목숨을 구원받았을 때. 감사보다 먼저 몰아친 두려움을 동경으로 착각해 그에게 충정을 바쳤다.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베이만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마지막 기회야, 슌. 여태까지 했던  모든 실수들은 잊어 주지. 앞으로가 중요한 거니까. 안 그래?"

"감사합니다."

"소년을 감시해. 그 누구보다 성공적인 실험체지만 우리를 상대로 그 마력을 폭발시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굳이 네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괜찮아. 지켜보다 조용히 숨이 끊어지면 시신을 빼돌려 와라. 인형으로는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만약 눈을 뜬다면."

슌의 손 위에 대공의 손이 얹혔다.

"네 이 두 손으로 그를 죽여. 그리고 복귀하는 거다, 내 곁으로. 그게 네 임무의 전부야."

슌의 주먹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턱까지 차오른 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언제나 여유로움을 담아내던 두 눈 역시 요동쳤다. 그것을 숨기듯 살짝 눈을 감은 슌은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슈베이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따로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걸쳐 둔 겉옷을 두르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그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슌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 모든 것은 그를 위해..."

그의 입에서 멍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을 그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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