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61화 (26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7. 흔들리는 균형(4)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건의 며칠 뒤.

하루가 멀다하고 크고 작은 회의에 들썩이던 황궁에서 대대적인 회의가 열렸다. 대전은 여느 때와 달리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이미 아들의 문제로 10년 동안 제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루이스가 입궁 한다는 소문 역시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어딘가의 백작과 정세에는 영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늙은 후작과 심지어는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준 은퇴 귀족들까지 황도에 있던 이들이라면 모두 몰려들었다. 원래라면 국무위원 이외에는 출입을 금해야 했지만 라이펜과 슈베이만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따로 병사들에게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찾아오는 귀족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덕분에 회의 시작 전부터 대전은 소란스러웠다. 두문불출 중인 황자를 걱정하는 말부터 습격의 충격 때문에 유트리안이 아예 정신을 놓아 버렸다는 소문까지 떠돌고 있었다. 황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바, 셀레니스 기사단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대신-

끼이익. 귀족들이 드나드는 주 출입구가 천천히 열리고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렇게나 시끄럽던 대전에 한순간 정적이 찾아들었다.

뚜벅, 뚜벅. 자신에게로 쏠린 놀란 눈동자들을 무시하며 루이스는 걸음을 옮겼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제복과 닮은 하얀 정복과 어깨의 휘장, 그리고 붉은 망토가 그의 등 뒤에서 펄럭였다. 허리춤에는 과거 황제가직접 하사한 명검이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의 자리는 당연히 황좌의 바로 아래,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과거 10년 동안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세월은 흘렀고 그가 정계에서 떠난지는 오래 됐지만 루이스 아르셰인 그의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만 한 것이 못 되었다. 싸늘하게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는 그가 젊었을 무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루이스 경!"

미리 와 있던 웨슬린 백작이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루이스는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이내 미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리오넨이로군. 아니지, 이제 웨슬린 백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경은 잘 지내셨습니까?"

백작은 기쁘게 말하다 이내 얼굴색을 흐렸다.

"아시엘 경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그래."

순간 루이스의 얼굴이 굳었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백작은 속으로 개운치 못한 입맛을 다셨다.

전대 아버지를 따라 궁에 가끔 드나들면서 10대 시절부터 루이스와 안면을 익힌 그였다. 자취를 감추었단 소식을 들었을때는 그만큼 실망했고, 그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가 양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만큼 놀랐다.

직접 그 아들인 아시엘 아르셰인을 몇 번 대면했을 때 그 비범함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만남의 모양새는 영 좋지는 못했지만-당사자 역시 여장을 하고 있었고 자신은 그런 그에게 대시를 했으니- 어째서 루이스가 그토록 애지중지 한다는 소문이 도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웨슬린 백작은 무어라 더 말하려 다시 입술을 뗐다. 하지만 마침 그 때, 입구에서부터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슈베이만 디아란 세튼 대공 전하 드십니다!"

그 말에 귀족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신속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곧 황가의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거대한 중앙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곧 슈베이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묘하게 정적에 휩싸인 대전을 의아하게 둘러보다 이내 루이스를 발견하고는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루이스 아르셰인 경.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

루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는 평민이고 슈베이만은 서자이기는 하나 황가의 핏줄을 이은 자였다. 마땅히 예를 취해야 했지만 그의 태도를 문제 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신분 고하를 따지고 무뚝뚝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는 모두가 이골이 난 터였다. 슈베이만은 픽 웃으며 덧붙였다.

"폐하를 잘 부탁 드립니다."

그제야 루이스의 곱지 못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슈베이만의 눈꼬리가 곡선을 그렸다. 루이스는 잠시 무뚝뚝하게 그를 마주보다 툭 뱉었다.

"부디 그런 걱정 마시길.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이제라도 제 역할을 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대 되는군요."

순간 루이스는 슈베이만이 다른 뜻을 담아 한 말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냥 예의상 아무렇게나 던진 말인지 헷갈리고 말았다. 하지만 자세한 것을 묻기도 전 그는 몸을 빙글 돌려 자신의 자리로 가 버렸다. 그리고 마침 타이밍 좋게 바깥에서 시종이 다시 한 번 황제 폐하 듭십니다-! 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바람에 그는 질문을 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문이 열리고 라이펜이 뚜벅뚜벅 회장에 들어오자 귀족들은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라이펜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곧장 가장 상석인 황좌에 착석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자리를 지키는 루이스에게 살짝 웃음기 어린 눈길을 보내고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간만에 모두가 생활관에 모여 있었지만 답지 않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공기를 무겁게만 만들었다. 루이카엔 역시 몇 날 며칠을 집무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언제나 그와 드잡이를 하던 케빈도 연무장에 처박혀 독하게 수련만을 반복했다. 두 사람이 그 모양이니 다른 이들 역시 차마 먼저 입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아델레트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루이스가 궁에 들어온 뒤 다음 날, 루이카엔은 모두를 모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대공에 의해 소환된 마족들이 황궁 안에서 활개를 치고 있고, 루이스가 10년 전 황궁을 떠난 것도 그것의 조사를 위해서였으며 아시엘은 그것을 조사하다 너무 깊이 관련되는 바람에 그들의 표적이 된 거라는 어찌 들으면 황당하기만 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때까지 일어났던 숱한 이상 현상들이 설명이 되었다. 기괴한 힘을 가진 구슬과 갑자기 나타난 변종 몬스터. 지하 감옥의 암살자들이 한꺼번에 살해된 일까지 그들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벌어진 일들이라면 납득이 가능했다.

그들을 상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에 기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먼저 알고 있었던 케빈과 대충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던 제르닌만이 뜻 모를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그걸 들은 게 과연 잘 한 일일까.'

지끈지끈 골치가 아파 와 그녀는 미간을 주물렀다. 왜 여태까지 숨겼느냐고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외려 그것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을 감춘 아시엘의 판단력에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16살 소년에게는 많이 벅찼을 테고, 홀로 끌어 안고 가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하지만- 아델레트는 아직까지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루이카엔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었다. 유트리안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아시엘을 끌고 가려고 했다. 단지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면 굳이 황자를 이용해 성 밖으로 단 둘이 끌어낼 필요 없이 궁 내에서, 혹은 파견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는 쪽이 훨씬 편리했을 터.

그리고 아시엘이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를 죽여 버렸다는 유트리안의 말 역시 납득할 수 없었다. 단지 아시엘이 유독 살생에 약했다는 이유 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출중한 실력이긴 했지만 아시엘은 그들 모두를 정면으로 상대할 만큼 노련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는 유트리안을 데리고 빠져 나오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터였다. 그런 중상을 입은 채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다음 날 현상을 시찰하러 나갔던 병사들과 경비대가 전달한 그 곳의 모습은 지옥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경험 많은 그들이 조각난 시신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 댔다는 이야기까지 들려 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견된, 목이 날아간 루아 이클립스의 기사의 시신. 최근에 아카데미를 졸업해 아시엘, 카이스와 비슷한 시기에 입단한 소년이었다.

거기에서 아델레트는 결국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루이카엔이 전해 준 정보 중에는 그들이 능력을 쓸 때 눈이 적색으로 물든다는 것이 있었다. 적안과 대형 참사, 납치 시도. 거기에서 유추되는 터무니없는 짐작은 단 하나 뿐이었다.

아시엘과 그쪽이 셀레니스 기사단과는 관계 없이 무언가 연관이 있다는 것. 아마 루이카엔과 케빈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심란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아..."

아델레트는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을 터뜨렸다. 무언가 또 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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