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63화 (26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9. 변화 (1)

"말도 안 돼."

심부름꾼에게서 회의 결과를 전해 들은 루이카엔의 한 마디였다. 생활관 로비에 모여든 다른 기사들 역시 그와 크게 차이 날 것 없이 경악하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델레트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게 말이 돼? 목숨 걸고 지켜낸 게 누군데 그걸 다 뒤집어 씌운다고? 하, 참! 어이가 없어."

"아주 물고 늘어지기로 작정한 모양이지. 아직 수수께끼인 점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벨킨의 조용한 말에 모두가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유트리안의 증언을 직접 들은 그들이지만 석연찮은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아시엘이 정말 거기에 있던 자들 모두를 죽였다는 말이지."

"그렇죠."

한참 망설이던 케빈이 입을 열자 휴온이 대꾸하고 베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닌이 미간을 구겼다.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군. 그쪽... 그러니까 흑마법. 거기엔 우리가 손 대려고 해도 이젠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이해할 것이 따로 있습니까. 그냥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죠."

그 때, 묵묵히 지켜만 보던 카이스가 툭 내뱉었다. 일순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카이스는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바닥만 응시하며 덧붙였다.

"그 녀석이 거기에 있던 레이를 죽였고, 암살자들도 모두 쓸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아시엘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대공이 그 녀석에게 모든 것을 다 뒤집어 씌우려 하려는 거죠. 다른 귀족들의 동조 하에. 그리고 귀족들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이그니스 교단의 사건이고."

"네 말대로야. 그게 지금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의 전부고... 또 둘도 없는 사실이지."

아델레트가 한숨처럼 말했다. 잠시 카이스는 생각하는 듯 검은 눈동자를 데굴 굴리다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루이카엔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어디 가?"

"이번 사건의 또 다른 당사자한테요. 직접 벌인 건 아니겠지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 형편없는 바보로부터 시작된 것이니까."

"뭐? 야!"

루이카엔이 다급히 그를 붙잡았지만 카이스는 그대로 등을 돌려 생활관을 나가버렸다. 기사들은 아연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스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녀석... 요즘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어련하겠냐. 아시엘이라면 아주 목숨을 걸었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케빈이 대꾸했다. 어디 가서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원에 홀로 앉아, 유트리안은 멍하니 맑은 하늘만 응시했다. 황자궁의 주변은 병사들로 이중 삼중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의 죽어버린 황금색 눈동자에 느긋하게 흘러가는 구름이 비쳤다.

시종들도 그의 근처에 갈 때마다 엄중한 검열을 받았고 식사는 매 끼니마다 쥐나 작은 새에게 먼저 먹여 보았다. 그런 철저한 방비 속에도 호위를 담당한 근위대장은 불안한 듯 직접 궁을 드나들며 방비 상태를 체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은 유트리안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아시엘을 탈취하는 것이었으니, 자신의 목숨은 단지 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지금 그가 행동 불능이 된 이상 굳이 유트리안을 공격해 올 이유는 없었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도 대공과 황제가 절반씩 권력을 나눠 가진 지금 걸림돌조차 되지 못한 그의 가치는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저벅 저벅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근위대장이 아무도 출입시키지 않고 있을 터인 지금 상황에 나타날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유트리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왜? 한 번 더 갈기러 왔냐?"

"마음 같아서는 골백번은 더 갈기고 싶습니다만."

대충 예상한 대로 무뚝뚝한 대꾸가 돌아왔다. 유트리안은 힐끗 그를 곁눈질했다. 카이스는 저벅 저벅 스스럼없이 황자에게 다가갔다.

"너희들은 기사 예절 교육을 한 번 더 받아야 해. 이놈이나 저놈이나 황자한테 태도가 그게 뭐냐."

"이런 시국에 한가롭게 광합성이나 하는 황자님께 듣고 싶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윗사람 다워야 대접을 해 주는 거죠."

카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그의 앞에 우뚝 섰다. 그의 몸에 볕이 가려 유트리안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궁에 처박혀서 혼자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바깥이 아주 난리가 난 건 황자님도 알고 계시겠지요."

"혼자 반성회 하고 있었다, 왜? 꼽냐?"

유트리안의 곱지 못한 금색 눈동자가 그를 흘겨 보다 이내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꿈틀, 카이스의 눈썹이 언짢게 움직였다.

"반성이라도 하고 계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래서 결론은 내리셨습니까?"

"... 아니. 내가 생각보다 허섭스레기라는 사실밖에는 모르겠어."

"잘 파악 하셨네요."

"뭐야?"

무덤덤한 그의 말에 유트리안이 울컥해 쏘아 붙였다. 하지만 카이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칭찬해 드린 겁니다. 황자님이 무가치하다는 걸 이제서라도 깨달으셨다니."

"하여튼 밉살맞은 놈."

그것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는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애초에 카이스가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아시엘이 없이 단 둘이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 나눌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유트리안은 눈을 데굴 굴리다 떨더름하게 입을 열었다.

"아시엘은?"

"여전하죠. 미동도 안 해요. 어떻게든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 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카이스는 믿었다. 당장에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그는 아직 아시엘에게서 들을 이야기가 많았다. 가장 가까이 지냈던 자신조차 모르게 혼자 조사하고 있었다던 흑마법에 대해서, 그리고 레이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뒤의 일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지위 이외에는 쥐뿔도 없는 인간이죠. 그러니 현장에 있던 당신의 증언도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것 아닙니까."

"뭐? 무슨 소리야?"

"귀족들이 모든 일을 아시엘에게 덮어 씌우려 하고 있어요. 그 녀석과 친분이 있는 당신이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거짓말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며."

무턱대고 던져진 말에 유트리안은 분노보다 황당함을 먼저 느꼈다. 하지만 그를 무시하고 카이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저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후에 아시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슨 소리야?"

그제야 유트리안의 미간이 좁게 변했다. 카이스는 힐끗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위 말고는 아무것도 별 볼일 없는 게 당신이지만 아시엘이 제 몸을 버려 가며 살려낸 만큼 당신이 그만큼의 가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를 계기로 단지 물 밑에서만 벌어지던 조용한 싸움이 표면으로 나오게 되었고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계기로... 그 녀석은 다른 길로 향했던 제 친구를 베어 버렸으니."

"......."

"아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틀렸습니까? 그의 딱딱한 물음에 유트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친분이 있었던 거지? 그 루아 이클립스의 이상한 애송이랑."

"그렇죠. 그런 대형 사건의 가운데에 서 계신 게 유트리안 황자 전하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아무도 황자님께 관심을 보이는 자는 없죠. 지금 전하의 위치는 단순한 피해자, 그 이상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냉정하지만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황자는 계속 하라는 듯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카이스는 힘을 실어 또박또박 말했다.

"이만한 제국에서 그 나이에 제 1황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놀고 먹는 것도 능력이죠. 올해 19살이 되셨지 않습니까. 내년이면 성년입니다. 그러니 바뀌셔야 합니다. 지위를 이용해서 사람을 구워 삶든 어쩌든 황자님의 편을 만들어서 더러운 정치판에 뛰어 들란 말입니다. 물론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황자님께도 은혜를 갚을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잠깐 숨을 고른 그는 마지막 쐐기를 꽂았다.

"내키지 않는다면 이대로 지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목숨을 구함받을 정도로 값어치 정도는 하셔야죠. 그래야 제가 납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 황자님이 스스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돕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황자님이 정말로 아시엘의 보호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진다면 제 모든 걸 바쳐서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 말, 잊어버리지 마."

묵묵히 듣기만 하던 유트리안이 마침내 묵묵히 툭 뱉었다.

"아주 수족으로 부려먹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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