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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65화 (26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 외전. 셀레니스 기사단 유령 소동 2 (2)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유령 같은 게 세상에 어디 있다고!"

휴온의 발작적인 고함에 넋을 놓고 있던 기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름 다부진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의 꼭 쥔 두 손은 애처롭게도 달달 떨리고 있었다. 루이카엔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진짜 그냥 잘못 본 거 아냐?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잖아."

"환각이 스으윽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 따위 낼 것 같냐! 그 곰인형도 분명히 진짜였다고!"

다시금 그 모습이 떠오르는지 케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사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요즘 나타난다는 소녀 유령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이카엔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진짜건 가짜건 계속 이 상태라면 곤란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일이 있는 녀석은 얼른 임무나 하러 가. 남은 놈들은 모두 진상 규명부터 하는 거야. 케빈이 멍청하게 헛것을 보고 생 난리를 피운 건지 아니면 누군가 침입자가 있는 건지, 귀신이 진짜 돌아 다니는 건지. 셋 중 어느 쪽이라도 문제가 있으니까... 아마 결말은 이 자식을 치료사 영감한테 보내는 게 될 것 같지만."

"뭐야, 이 자식아!"

케빈이 왁 소리를 질렀다.

"조사는 뭐든 해! 내가 헛걸 본 게 아니란 걸 증명해 줄 테니까."

"그건 그것대로 또 곤란한 건..."

카이스가 조용히 덧붙이자 그가 찔끔했다. 하지만 말을 돌릴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루이카엔이 짝짝 박수를 쳐 주의를 모았다.

"그럼 결정. 남을 녀석은 남고 가야 하는 놈은 가. 보고는 나중에 확실하게 해 줄 테니까."

"잠깐만, 정말로 조사할 겁니까? 그냥 케시비언 선배가 잘못 본 걸로 치면 안 될까요?"

순간 떠날 수 있는 이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남아야 하는 기사들의 얼굴에 가득 먹구름이 꼈다. 누군가가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묻자 케빈이 쏘아 붙였다.

"웃기지 마! 그럼 미친 놈 취급 받아야 하는 건 나 뿐이잖아!"

"그치만 진짜 귀신이면 어쩌려고! 찜찜하니까 그냥 너 하나로 넘어 가!"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냐!"

그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다른 기사들 역시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아우성은 아시엘의 밝은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럼 귀신의 정체부터 밝혀 볼까요. 일단 선배가 보셨다는 곳부터 가 봐요."

"너 지금 이 상황 즐기고 있지?"

어이가 없어진 케빈이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잠시 그들은 눈치를 봤지만 제일 어린 아시엘이 의욕을 보이고 있었으니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우르르 케빈을 앞세워 자리를 이동했다. 전날 밤 케빈이 유령을 목격한 자리는 계단이었다. 케빈은 계단 몇 칸을 내려가 전날 밤 자신이 서 있던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서서 뒤를 돌아봤는데 그 여자애가 보였어. 저기, 저 흰 시트 떨어져 있는 거 보이지?"

"혹시 달 그림자에 비친 걸 착각한 거 아닙니까? 저쪽에 창문이 있는데요."

카이스가 복도 한 쪽에 난 창문을 고갯짓하며 하는 말에 케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확실히 아니야. 윤곽이 뚜렷했을 뿐더러 거긴 밤엔 항상 덧문이 잠겨 있다고."

"하지만 어젯밤에 누군가가 깜빡해서 열려 있었을지도 모르죠."

아시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확 열어 젖혔다. 그리고 아직 열리기 전의 두터운 덧문이 그를 맞이했다.

"어라, 아니네."

"그렇다니까! 그리고 여자애가 나온 건 그 근방이 아니라 좀 더 안쪽이라고."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아시엘은 뒤로 물러서다 문득 아직까지 동그라니 방치되어 있는 시트에 눈길을 주었다. 아직까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그 여자애가 보였다는 자리에 그대로 널부러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워 들고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음.. 조금 젖어 있는데요."

"어제 비 안 왔었지, 아마."

카이스의 담담한 말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순간 기사들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천을 만지작대며 혼자만의 고민에 빠졌다.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 여자아이가 남긴 흔적이라곤 떨어진 천 하나, 그리고 그녀를 선명하게 봤다는 케빈 뿐이었다.

아무리 잠에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이 곳은 괴물급의 능력자들이 우글우글대는 생활관이었다. 바깥에서 생활관으로 들어올 때는 정면의 커다란 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게 열렸다면 누구든 한 명 정도는 눈치를 챘을 터였다. 더군다나 잠이 깨 있던 케빈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선배, 혹시 어제 밤에 나왔을 때 선배 방문 제대로 닫았는지 기억 나요?"

"어? 글쎄-"

갑자기 아시엘이 천진하게 묻자 케빈은 당황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아시엘은 빙글, 몸을 돌려 선배들을 마주 보았다. 갑자기 왜 저래, 그들이 의아하게 눈만 꿈뻑이고 있을 때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수수께끼는 풀렸어요."

"뭐?"

케빈이 어이없는 소리를 냈다. 자신에게 모여든 눈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는 뿅, 하고 얇은 검지 손가락을 세웠다.

"선배는 잘못 본 게 아니에요. 확실히 뭔가를 보긴 봤어요. 시트를 질질 끌고 가는 누군가를요."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아직 우리 아무것도 알아낸 것도 없는데."

"알아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던 걸요."

누군가가 따져 묻는 말에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먼저 스으윽, 하는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죠. 그건 아마 앤 녀석이 낸 소리일 거예요."

"앤이?"

"케빈 선배가 바깥으로 나온 사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혼자 빠져나와 선배를 따라온 거겠죠. 엄청 어두웠을 테니 선배는 당연히 앤을 발견하지 못했을 테고."

기사들의 어이없는 시선이 순식간에 케빈의 어깨에 자리잡은 앤에게 몰렸다. 쉬익, 그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 애완뱀 앤이 혀를 낼름거렸다. 케빈이 다급하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내가 본 건 뭔데? 그 여자애! 흰 원피스 입은 여자애!"

"진정해요. 그것도 알 것 같으니까."

아시엘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팔을 높이 뻗었다. 잔뜩 기대 어린 눈빛들이 어린 소년에게 다시 옮겨졌다. 그리고 그는 척 하고,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저에요."

"........"

생활관에 침묵이 찾아 들었다. 아시엘은 에헤헤, 하고 쑥쓰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깜빡하고 있었는데, 사실 어제 목이 너무 아파서 바깥에 잠시 바람 쐬러 나왔거든요. 추워서 가디건이랑 침대 홑겹 담요를 걸치고요. 아마 그걸 잘못 보신 게 아닐까요. 이 흰 천은 아마 제가 떨어뜨린 걸 거예요."

"확실히... 아시엘이라면 여자애로 보일 만도 하지."

루이카엔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쩌억, 케빈의 입이 벌어졌고 다른 기사들 역시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시엘을 유령이라고 착각해 소란을 피워 댄 케빈도 그렇지만 여태까지 자신이 그 시간대에 복도에 나왔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던 아시엘이나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내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라이, 그럼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잖아!"

"아시엘도 왜 그런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냐고."

"괜히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네."

볼멘소리를 내며 그들은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해산해 버렸다. 아예 넋을 놓아 버린 케빈이 멍하니 눈만을 꿈뻑거리고 루이카엔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유령 소동은 끝이 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날 저녁. 파견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루이카엔이 하소연을 풀어 놓기라도 하듯 맥 빠지는 조사 결과를 전해 주었다. 당연히 잔뜩 부푼 기대감을 안고 복귀한 그들은 어이없는 사실에 실망해 금세 일상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단 한 명, 슌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시엘이 그랬다고요?"

"응. 바람 쐬러 나왔던 걸 깜빡하고 있었대."

루이카엔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슌은 여전히 개운치 못한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그의 모습에 루이카엔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어젯밤에 그 녀석, 약 먹고 곯아 떨어졌는데요. 꽤 독한 약이라 밤새 정신 못 차리고 쿨쿨 잤을 걸요? 아침에 봤을 때도 일어났던 흔적은 없었고... 두르고 나갔다가 복도에 두고 왔다는 담요도 잘 덮혀 있었는데."

"....뭐?"

단장의 얼굴이 미소지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혼자 중얼거리다 한 가지 결론에 다다라 버린 슌 역시 차차 낯빛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 떨어져 있던 흰 천, 아시엘이 젖어 있다고 말했다고 했죠."

"그 직후에 아시엘이 진상을 알았다며 나섰어. 그거에 대한 설명은 없었... 지."

잠깐만. 그렇다면. 루이카엔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네 말대로라면 아시엘은 지난 밤에 잘 자고 있었다는 거잖아! 나온 적은 없다고!"

"그렇죠. 분명히..."

그랬는데. 처음부터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슌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을 리는 없고 케빈이 착각한 것도 아니고 잘못 본 것도 아닐 때, 진짜로 그 여자애가 그곳에 있었다는 가정 하에..."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결국 그것은 한 가지의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진짜 유령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내고 상황을 정리해 버린 건가."

미친. 두 남자는 동시에 그런 말이 튀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이내 모골이 송연해지며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게 귀신과 아시엘 중 어느 쪽 때문인 건지 헷갈렸다.

그 시간, 아시엘은 자신의 방에서 크게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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