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66화 (26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1. 변화 (3)

라이펜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먼저 와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유트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아버지로 됐어,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아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라이펜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데굴 굴리던 유트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버지."

"그래, 유트. 오랜만이네. 내가 미리 찾아 갔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아닙니다. 저 때문에 정신 없으셨을 거 잘 아는데요, 뭐."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라이펜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내 앞에서는 항상 예를 취하는구나."

"예?"

순간 유트리안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 모습에 라이펜은 더더욱 쓴 입맛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최근 욕심이 많아진 건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버린 건가. 사랑해서 황후를 맞이한 게 아니었고, 황자 역시 사랑의 결과물이라 말할 수는 없으니-그리고 유트리안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접었지만 요즘따라 자꾸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칼칼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최근에 질책을 받았기 때문인지, 또 그게 아니라면 단지 루이스와 아시엘의 모습에서 조금의 질투를 느꼈는지 스스로도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 아니다, 아무것도. 그것보다 유트, 어젯밤에 생활관을 방문했다고? 내 대신 움직여 줘서 고맙다."

"대신... 이란 말씀은."

유트리안은 그의 뒷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그 뜻을 읽어낸 라이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것 아니었어? 넌 황자다. 네 권한을 네가 지금부터 제대로 사용하겠다고 해서 내가 그걸 막을 권리는 없지."

"이제 막는다 하셔도 얌전히 있을 생각은 이제 없습니다."

"그래서,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네 아버지에게 바라는 건?"

황제는 픽 웃으며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잠깐 말을 고르듯 눈동자를 데굴 굴린 유트리안은 이내 고개를 들고 라이펜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금안이 새로운 색채로 반짝 빛나는 것을 라이펜은 볼 수 있었다. 이때까지 그에게서는 볼 수 없던 빛을. 그리고 유트리안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뭐?"

이번에 얼빠진 목소리를 낸 것은 라이펜이었다. 유트리안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힘을 쌓아갈 생각입니다. 이제 와서 별 소용 없을지도 모르겠지만요."

".. 이유는?"

잠깐 뜸을 들이던 라이펜이 짤막하게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 아주, 아주 사적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아시엘이 그리 지켜 주었으니 그만큼의 가치는 되어야겠죠."

유트리안은 언젠가 카이스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라이펜은 생각에 잠겨 톡, 톡 턱을 두드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어? 내가 왜 이때까지 널 그냥 내버려 뒀다고 생각하냐. 네가 그토록 치를 떨던 자들과 같은 자리를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보다 더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질 거야. 널 지키려 할 사람은 늘어 가겠지만 그들 모두가 네 짐이 될 거야. 너 때문에 목숨을 잃는 자도 늘어가겠지. 때로는 누군가를 속여야 할지도 모르고, 속을지도 몰라. 그걸 모두 감당할 자신이 있어?"

"......."

"굳이 네가 지금 뛰어들지 않아도 아시엘은 원망하지 않을 거야. 이대로 그녀석이 죽어버린다고 해도, 나중에 깨어나서 널 지켜낸 대가로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는 지금 상황을 마주한다고 해도 널 살린 것 자체로 만족할 녀석이다."

"그래도 하겠습니다. 말했잖아요, 제 사소한 욕심 때문이라고요.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상관 없어요. 그땐 그 때의 문제니까. 지금은..."

유트리안은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가슴에도 새겨 넣듯이 한 글자 한 글자 확실하게 힘주어 말했다.

"눈 앞의 쓰레기를 치우고 싶습니다."

"...그래."

조금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라이펜은 고개를 부드럽게 끄덕여 주었다.

"황태자가 되겠다고. 그 말은 곧 내가 너에게 이 제국을 넘겨 줄 계획을 해야 한다는 거군. 그 정도의 믿음을 나에게 줄 수 있어? 이때까지 황자궁에서 모셔지기만 하던 네가."

"아버지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 얘기하더라고요. 자신의 손에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하라고."

누군가와 조금 닮은 듯한 아들의 말에 황제는 킥킥 소리를 냈다.

"계획은 있고?"

"일단 외조부님인 파슬렌 공작님을 통해 사람을 모을 것입니다. 그 분을 통한다면 아마 도와 주실 분을 찾을 수 있겠죠.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아버지의 업무를 돕겠습니다."

호오. 진심인가. 유트리안의 두 눈은 진지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보며 라이펜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렇다면 나도 이 거추장스러운 짐을 너한테 넘길 각오를 나도 해야 겠군, 아들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물어 볼게."

"예?"

너무나도 쉽게 돌아온 답에 유트리안이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곧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질문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라이펜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마... 그 녀석들에게 공격받았을 때, 이 제국에 대해. 그리고 아시엘에 대해 들었겠지. 그들이 했던 말들은 아마 모두 사실이다. 그런데도 넌 후회하지 않는 거냐? 나 역시 아시엘의 태생에 대해서는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그 녀석을 네 곁에 붙여 둔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아?"

"조금요. 걸핏하면 협박질에 바락바락 성질이나 내는 싸가지 꼬맹이를 호위랍시고 붙여 주셨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신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상하신 겁니다."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날카롭게 대꾸가 쏘아졌다. 라이펜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푸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그는 이내 배까지 잡고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부탁이니까 너, 제발 아시엘 그 녀석 닮아가진 마라. 감당하기 힘드니까."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유트리안이 바락 신경질을 냈지만 라이펜은 책상을 탕탕 때려가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오랜 시간 황제들이 격무에 시달려 오던 집무실에서는 간간히 황자의 짜증 실린 퉁바리가 새어 나오는 와중에 오랜만에 한동안 웃음 소리가 떠나가지 않았다.

잊어버릴 만 하면 한숨이 터져 나와서 일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루이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라앉히려 돋보기를 벗고 미간을 주물렀다. 나머지 한 쪽 손은 언젠가부터 생긴 버릇대로 옷깃의 뱃지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아시엘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것이었다. 받은 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몇 달동안 매만졌던 탓에 한쪽 귀퉁이는 벌써 조금 뭉툭해져 있었다.

눈 앞에 놓인 서류들은 다 똑같이 암담하기만 했다. 흑마법이 시도되었던 흔적은 처음 발견한 네다섯 개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 대공의 곁에 소환된 마족은 아시엘이 보았다던 아울과 녹스라는 자와 유트리안을 조종했다는 소년 모습의 마족이 다일 터였다.

아시엘이 따로 조사하던 것들은 그의 서랍에 이중의 잠금 마법이 걸린 채 방치되어 있어 꺼낼 수가 없었다. 벨킨에게 부탁해 마법이 걸린 서랍을 찾아 냈지만 해제는 할 수 없었던 터였다. 벨킨이 아시엘보다 위 서클의 마법사이지만 잠금 마법은 같은 시전한 사람과 같은 마력을 가진 이가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후우..."

그리고 레이- 언젠가는 갈라설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아꼈던 제자를 잃고 아들까지 중상을 입은 지금, 그렇지 않아도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그를 벤 게 아시엘이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친구를 베어 버린 그 녀석의 마음은 어떨까. 지금까지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너덜너덜해져 있을 터였다.

게다가 시신은 손상이 심하게 되어 있었지만 단칼에 목이 날아간 모습에서는 망설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렸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시엘. 뱃지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 일어나기만 해라."

부탁이니까. 그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뜬 뒤에 닥쳐 올 세상은 전보다 조금 더 거칠어져 있겠지만 그래도.

치료사가 아시엘의 방에서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과는 다르게 약간 훈훈하게 데워진 공기와 항상 올 때마다 반겨 주는 약 냄새가 그의 피부에 달라붙어 왔다.

"안녕."

속삭이듯 건넨 인사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새하얗고 깨끗한 시트에 감싸인 소년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상처는 어떻게든 치료했지만 여전히 회복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슌은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카펫을 밟고 아시엘의 침대 맡으로 다가갔다.

세공품처럼 아름다운 그는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환기를 위해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살짝 들었다가 내려 놓았다. 슌은 홀린 듯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이대로 일어나지 않아도 돼. 너에게도 차라리 그 편이 좋을 거야. 슌은 작게 되뇌었다. 손 끝에 닿는 도자기처럼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래도 숨 쉬고 있었다. 깊이 잠든 와중에도 반짝이는 금발이, 긴 속눈썹이 저물어 가는 해의 볕을 머금고 부드럽게 빛났다.

영영 움직이지 않을 인형처럼 보이지만, 눈을 뜬 순간 넌 다시 되살아 나겠지. 생기가 돌아온 이 앳된 얼굴을 자신은 아마 반가워하지 않을 터였다.

"... 그냥, 쭉 잠들어 있어. 적어도 꿈 속은 편안할 테니까."

다시 한 번 가벼운 바람이 불어 커튼을 흔들었다. 이 작은 몸으로 온갖 것을 해 내던 소년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편안한 표정을 보아하니 적어도 언제나 그를 괴롭히던 악몽은 아닐 터였다.

"많은 게 바뀔 거야. 황자도, 셀레니스 기사단도 모두 네가 눈을 뜬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을 전제로 움직이고 있어. 어쩌면 네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걸까."

그로 인해 모두가 이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게으른 루이카엔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굴었고 루이스가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지 발에 채이는 무력한 걸림돌이던 황자조차 공식적으로 움직이겠다 말했다. 귀족들은 숨을 죽이고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눈치 싸움을 시작했고, 이제 조만간 힘을 키운 유트리안 디아란 세튼이 조금씩 두각을 나타낼 터였다. 그리고 그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때 아시엘이 눈을 뜬다면-

"그땐 내가 널 죽여야 하겠지."

슌은 속삭였다. 이제 한치 앞은 예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세를 잡은 것은 대공, 슈베이만. 미묘한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속에서만 끓던 용암이 치솟을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