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3. 두 번째 서막 (2)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해서 그다지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다지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온갖 일이 있었던 삶 중 제일 깊고 편하게 잠든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늦잠을 자는 건 아닐까. 무의식의 깊은 곳, 아시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분명.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울음기 섞인 외침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때-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의 눈을 감싸 쥐듯 가려 주었다.
아냐, 아직은. 좀 더 자도 괜찮아. 보지 마. 눈 뜨지 마. 힘들었잖아.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 왔다. 거부할 수 없는 음성에 아시엘은 순순히 다시 눈을 감았다. 아아, 편하다. 하지만 그래도 곧 돌아가야지. 일어나야지.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뿌연 의식 속에 꿈틀꿈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새카맣기만 하던 시야 가운데에 붉은 점 하나가 피어났다.
저게 뭐지? 의구심에 아시엘은 그것에 집중했다. 붉은 점은 마치 물감이 퍼지듯 그 영역을 넓혀 갔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차 빨라져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삼켜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눈 앞에 하나의 풍경이 펼쳐졌다.
지독하게도 익숙한 불바다와 피웅덩이. 매캐한 연기, 무너지는 건물과 죽은 사람들. 비릿한 혈향이 코 끝을 찌르고 마침내 그 여자가 홀연히 나타났을 때 아시엘은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참사 현장과 어울리지 않는 고운 미성이 마치 웅덩위 위에 동그랗게 떨어진 물방울처럼 퍼져 나갔다. 팔락, 피로 얼룩진 새하얀 원피스를 흩날리며 그녀가 돌아섰다. 언제나 눈자위에 자리했던 시커먼 구멍과 눈물 대신 흐르던 피 대신, 그곳에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마치 거울을 가져다 놓은 듯 아시엘과 지나치도록 닮았다는 사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가여운 사람."
찰박, 그는 새빨간 웅덩이에 한 걸음 내딛었다. 여자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의 사랑스런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여느 때처럼 달콤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가여운 건 어느 쪽일까."
"그러게요."
아시엘의 입술이 비대칭으로 틀어졌다. 그녀는 그의 텅 빈 기억의 핵이기도 했고 과거의 잔재이기도 했다. 아시엘은 직감했다. 그녀는 아마 오래오래 그를 놓아 주지 않을 터였다.
"있잖아요. 하나만 물어도 되나요?"
한 걸음, 두 걸음. 아시엘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던 궁금증 하나. 그것을 풀지 않고 돌아가기엔 조금 억울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쯤부터 나한테 뭐라고 말하려고 했죠, 꿈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아시엘은 그녀에게서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우르릉-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목조 건물 하나가 불에 타 무너져 내렸다. 하늘은 새빨갛고 사람들의 생명력을 빨아 먹은 지면 역시 붉은색. 무너지는 세상 가운데에 선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가 공중에서 얽혔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시엘의 뺨을 살짝 감싸 쥐었다. 황금빛의 광택이 도는 적안은 얼핏 보면 따스했지만 냉정했다. 마치 시체의 것처럼 차가운 손이 닿자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 때,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시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고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사라져 새까만 암전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교대하듯 펼쳐진 광경은 낯선 피바다였다. 조각나 널부러진 처참한 시신들은 모두 맞춘 것처럼 검은 색의 옷차림이었다.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달빛이 지저분한 공터를 서늘하게 비췄다.
"이건...."
아시엘은 뒷걸음질치다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피투성이였다. 새하얀 제복은 살점들과 체액으로 제 색을 잃은지 오래였다. 황금색 레이피어의 끝에 점칠된 피가 방울져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살짝 시선을 돌리니 시신들 사이에 쓰러진 붉은 제복의 작은 몸뚱이가 눈에 들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 굴러다니는 것은 익숙한 얼굴의 머리.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지독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신음이 새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윽...."
익숙치 못한 고통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군가의 오열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익숙한 음성. 언뜻 그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시야가 새하얘졌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고 무언가에 억눌린 듯 숨이 턱턱 막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속이 메쓱거려 당장에라도 모든 걸 게워 내고 싶어졌지만 몸은 묵직한 추라도 매단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속에서 들끓었다. 갑갑해, 움직이고 싶어. 아시엘은 무의식적으로 손 끝에 힘을 주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금 상태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꼭 쨍그랑 소리가 난 착각이 든 것과 동시에 그는 가위에서 해방되었다.
"허억!"
신선한 공기가 한꺼번에 폐에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몽롱한 정신을 차마 추스릴 새도 없이 그는 가쁜 숨만을 몰아 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여태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던 많은 것이 감지되었다. 희미한 약 냄새,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시트. 보글보글 무언가가 끓는 소리와 사락 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역시 들려왔다.
"그대로 뒈지나 싶더니 끈질기게 숨은 쉬어서 명줄은 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하도 안 깨어나길래 잠자리가 너무 편한가 했는데 결국엔 악몽이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멍한 의식 속에 파고들었다.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흐릿한 시야에 어둠에 잠긴 방이 차차 담기기 시작했다. 독서 중인 치료사 노인의 앞에 놓인 작은 촛불 하나가 일렁이며 붉은 그림을 천장에 그려냈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숨부터 가다듬어. 두 달만에 정신 차리자마자 과호흡으로 졸도하고 싶지 않다면."
"... 여기..."
두 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귀를 의심하며 아시엘은 간신히 입술을 뗐다. 오랫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은 성대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쯧, 혀를 찬 치료사는 책을 탁 덮고 몸을 일으켜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황궁. 기사단 생활관이다. 네가 깨어날 것 같다고 알렸으니 곧 시끄러운 놈들이 몰려들겠지."
"생활관..."
그렇구나. 돌아온 건가. 아시엘은 멍하니 중얼거리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상체를 움직였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아릿하게 덮쳐온 격통에 그는 다시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 뒹굴고 말았다. 치료사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시선을 쏘아 보냈다.
"멍청하긴. 상처 벌어지니까 얌전히 머리 박고 누워 있어."
"답답해요."
고집스럽게 대꾸한 아시엘은 팔에 다시 힘을 줘 낑낑거리고 다시 상체를 반쯤 세웠다. 결국 치료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앉혀 주고 등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입술을 앙다물고 참아낸 아시엘은 간신히 몸이 다시 편해지자 끄응 소리를 내며 사양하지 않고 몸을 기댔다.
"윽... 아아..."
"내가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조그만게 그렇게 쏘다니니 험한 꼴을 보지."
핀잔에 차마 대꾸하지도 못하고 아시엘은 호흡을 안정시키는 데 정신을 쏟아 부었다. 타들어가는 통증 때문에라도 정신을 다시 놓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차차 가빠졌던 숨결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는 그는 이미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깊은 상처에서 전해지는 통증은 둘째 치더라도 오랜 시간동안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탓인지 약간의 움직임도 꽤나 버거웠다.
그 떼, 방 밖에서 우당탕탕 성급한 발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아시엘이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을 때 콰다당! 거칠게 문이 열어 젖혀지고 우르르 제복 차림의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시엘!"
"아."
정말로 급하게 뛰어온 듯 잔뜩 흐트러진 머리들와 당황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선두의 카이스와 루이카엔, 그들의 뒤를 곧장 뒤따른 아델레트와 제르닌. 그리고 마찬가지로 헐레벌떡 몰려들어 50일만에 눈을 뜬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 달려든 이들. 아시엘이 한참동안 말이 없자 슬그머니 걱정이 된 카이스가 한 발짝 그에게 다가섰다.
"아시엘... 괜찮은 거야?"
"카이..."
곱지만 여전히 쉰 목소리가 말라 붙은 목구멍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그리고 후두둑. 뭔가 따뜻한 것이 뺨을 타고 이불 위에 놓인 여윈 손등 위에 떨어졌다. 엥? 아시엘은 순간 스스로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어느새 눈가에 가득 고인 맑은 물이 또다시 투둑 하고 떨어졌다.
카이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뒤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치료사의 주름진 미간이 살며시 구겨졌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아시엘이었다. 그는 멍하니 눈가를 만져 보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게 죽어있던 감정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주먹이 시트 위에서 꼭 쥐어졌다. 전보다 더욱 얇아진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꼭 깨문 아시엘은 이내 미소지었다. 눈물은 계속해서 똑똑 떨어졌다.
뒤늦게 찾아온 현실 감각이 너무 쓰라렸다. 긴 시간 잠들어 있었던 것은 결국 도피였을까. 스스로의 손으로 레이를 죽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간이 꽤 흘렀다고 했지만 그에게는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꿈 속에 있던 그 광경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참극이었다. 아픈 상처를 후벼 파던 오랜 친구의 목소리와 그의 변해버린 모습, 그리고 목숨을 잃는 그 순간 스러지던 육체가 선명히 각막 안에 새겨져 있었다.
아시엘은 달달 떨리기 시작한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싫은데, 왜 하필 다들 여기에 있는 거야. 하지만 결국 그는 꾹꾹 참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왜 이제야 왔어요..."
루이카엔은 안타까움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고작 저 정도의 원망이었다. 서글픈 웃음기 담긴 목소리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버티고 버티던 그가 내비친 것은 아주 약간의 원망이었다. 계속해서 통신을 시도했지만 답신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리고 그런 결과가 나왔을 때 아시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카이스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은 그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떨고 있는 아시엘에게 다가선 그는 친구의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그 일련의 행동을 모두는 숨을 죽이고 지켜 보았다. 저항 없이 품에 안긴 아시엘의 등을, 카이스는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 미안."
아시엘에게서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카이스의 옷자락을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꽈악 붙잡았다. 카이스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잘 왔어."
나지막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엘은 겨우 고개만을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로 살아 돌아온 것이 다행인 일일까.
꿈 속 그녀의 목소리가 의식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 오려는 것을 그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어째서 살아 있는 거야? 수없이 꿈에 나타나며 자신과 닮은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은 결국 그것이었다. 어째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느냐고. 동의하지 않은 실험으로 인해 남편은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스스로는 마을 하나를 괴멸시키고 자멸했다. 그런 와중에 홀로 살아 남아 삶을 이어가는 아들에게 건넨 그 말은 커다란 칼날이 되어 박혀 들었다.
자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조금 편해질 거란 안이한 생각을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시엘은 카이스의 옷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까. 당장 곁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만 해도 어떻게든 일어서서 휘청휘청 걸어갈 수는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결국 아시엘은 그것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흙바닥을 구르고 짓밟혀도 꿋꿋하고 고고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