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71화 (27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6. 예기치 않은 손님 (2)

"네가 말한 손님 말이다."

묵묵히 소독약을 발라 주던 치료사가 입을 열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삼키려 낑낑대고 있던 아시엘이 고개를 돌렸다.

"네?"

"아픈 거 알면 몸이나 사리지. 어쨌든 네놈의 몸뚱이에 치료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것과 관련 있냐?"

"치료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니요?"

아시엘이 되려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치료사는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네가 걸레짝이 되서 돌아왔던 날, 늑대가 치료 마법으로 응급 처치를 하려고 했다지. 그런데 통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몰랐나 보지?"

"으음- 그랬구나."

"무슨 사정인지 몰라서 얘기는 아직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만."

치료사는 거친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복부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제법 익숙해진 약 냄새가 썩 나쁘지만은 않아, 아시엘은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네 마력의 흐름이 또다시 이상해졌던데. 그 때처럼 끊긴 것만이 아니야. 아주 제멋대로 들끓고 있어. 그리고-"

"원래 제 것과는 조금 다른 마력도 같이 뒤섞였다고요?"

아시엘이 킥킥 웃음을 터뜨리자 치료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그의 손이 호되게 아시엘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아얏!"

"그런 얘기 하면서 실실 쪼개다니, 그건 어느 동네 버르장머리냐. 루이스 녀석이 교육 한 번 끝내주게 시켰군. 검기의 마력과 마법의 마력 정도의 얘기 정도가 아니야. 원래 네놈이 마검사니까, 마력의 흐름이 독특하기는 했어. 하지만 이건 아예 다른 종류의 것이란 말이다. 아직 다른 녀석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걱정 말아요. 저도 알고 있으니까."

투덜거리며 얻어맞은 곳을 쓰다듬던 아시엘이 뾰루퉁히 답했다. 알고 있다고? 치료사의 눈이 미심쩍게 휘어졌다. 그때 아시엘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영감님은 왜 그게 절 찾아 온다는 손님이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감."

"으와, 무서워라."

아시엘의 얼굴이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급하게 덧붙였다.

"완전히 정답은 아니지만 비슷해요. 사실 저도 아직까지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그냥 대충 어림 짐작이지만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는 건 맞아요."

"어림 짐작이라고?"

"저도 감이라고 하죠 뭐. 영감님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이라고 한다면 전 직감이라고 해 둘게요."

건방진 꼬맹이. 그렇게 말하는 듯한 치료사의 삐딱한 시선이 닿았지만 아시엘은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 때, 바깥에서 루이카엔의 의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어라, 당신이 왜 여기에 왔어?"

"아. 정말로 와 줬나 보네."

아시엘은 곧장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료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붕대를 마저 꼼꼼히 고정시켜준 뒤 아무렇게나 벗어둔 셔츠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아시엘은 히히 웃는 걸로 감사 인사를 대신한 뒤 옷을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루이카엔 씨."

렌은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어째서 그가, 시내에 있는 나뭇잎 여관의 종업원이 이 곳까지 찾아 왔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일반인은 내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었으니.

"어떻게 온 거야?"

"조금 용무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아시엘이 걱정되기도 했고."

당연하게 대답하는 그의 말은 더욱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루이스가 긴가민가하며 말했다.

"설마 아시엘이 말한 손님이란 게 저 남자?"

"하지만 그는... 아시엘이 종종 들르는 여관의 종업원일 뿐인데-"

"아시엘이 손님이 올 거라고 말했다면."

그 때 렌이 선명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일순 그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자 렌은 생긋 미소 지었다.

"아마 그건 제가 맞을 겁니다. 역시 그는 당해내지 못하겠어요."

"뭐? 정말 당신이라고?"

루이카엔이 황당히 되물었다. 슌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 보면서도 슬쩍 경계심을 키웠다. 평범하디 평범한 얼굴에 렌은 그 다운 웃음을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로비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할 때,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렌 씨."

"안녕, 아시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사들이 당황하건 멀건 렌은 태연하게 웃으며 아시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장 먼저 수습한 루이스가 침착히 물었다.

"아시엘. 네가 말한 손님이 정말 이 남자야? 그냥 여관 종업원이라면서?"

"네. 맞아요. 이제 시간 지체하지 말아요. 저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다들 바쁜데 저만 게으름 피우기도 싫고요."

마지막 말은 루이카엔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모여드는 황당하다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렌은 어색하게 입술을 휘었다.

"아무래도 잘못 걸려든 것 같은데..."

로비의 커다란 소파에 기사들이 둘러 앉았다. 가장 상석에는 루이스, 그 바로 곁은 루이카엔과 아시엘. 카이스는 아시엘을 보좌하듯 바싹 붙어 곁에 앉았고 불려온 아델레트와 제르닌, 그리고 생활관에 있던 모두가 모였다. 슌 역시 그들 사이에서 자리를 지켰으며 모두의 시선은 시종이 내온 차를 음미하는 렌에게 향해 있었다.

"있잖아, 아시엘."

어색한 공기를 찢고 겨우 제르닌이 입을 열었다.

"저 청년은 분명 나뭇잎 여관의... 예언자 종업원 아니었던가."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저희끼리 할 얘기나 하죠, 뭐."

아시엘은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모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개 종업원이 어째서 이런 자리에 끼어 있는 건지. 게다가 그는 아시엘이 직접 부른 손님이라고 한다. 평소 신중에 신중을 기하던 그의 성격 상 기밀을 유지해야 할 지금의 상황에 렌을 불러들인 것이 도대체 뭐 때문인지 그들로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다.

"설마 예지 능력 때문이야?"

"그런 걸까요. 하지만 케시비언 경, 전 아시엘이 불러서 온 게 아니에요. 제 발로 직접 걸어 들어왔답니다."

케빈이 머리를 쥐어 짜 묻는 말에 답한 것은 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의구심을 더욱 키우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아시엘이 자자,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일단 지금은 회의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 일단... 알았어."

움직여지지 않으려는 머리를 루이카엔이 억지로 끄덕였다. 만약 아시엘의 판단 미스라고 해도 나중에 자신이 수습하면 그만이었다. 그 방법이 렌에게는 조금 가혹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시엘도 슬슬 상황을 알아야겠지. 사실은 좀 더 쉬게 해 주고 싶었지만... 네가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고 있지?"

"네. 대충 눈치껏? 아무도 말은 안 해줬지만요."

아시엘이 히죽 웃자 나머지는 뜨끔하며 몸을 사렸다. 그가 은근슬쩍 떠보듯 묻는 것을 요양을 위해서라며 죄다 흐지부지 묻어 버렸던 그들이었다. 루이카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흠흠... 너무 원망하진 마. 어쨌든... 그것 때문에 말인데. 네가 대전 회의에 출석해야 할 것 같아. 그 때는 나도, 다른 녀석들도 따라가지 못할 테니 혼자서."

아마 문책을 하는 자리가 될 듯했다. 아직까지 대공파의 주축 몇과 황제파의 몇몇 역시 아시엘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그를 범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이들 역시 아시엘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피해가긴 어려웠다. 루이카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네. 뭐가 어렵다고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아시엘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렇게 간단히 말 할 문제가 아니야, 하고 울컥 쏘아 붙이고 싶어졌지만 그는 눌러 담았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녀석이었지만 요즘은 더한것 같았다.

"어쨌든 조심해. 아시엘이니 별로 걱정은 안 하지만 점점 위험해지는 건 너니까. 절대 무리는 하지 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너한테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네. 주의할게요. 그리고요?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계속되는 걱정에 아시엘이 재빨리 화두를 돌렸다. 케빈은 렌을 신경쓰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 발견된 시종 녀석이 에쉬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흘리고 다녔다는 말은 했지. 그런데 아무리 뒤를 더 캐봐도 누가 그 놈한테 그걸 알려 줬는지는 도통 모르겠어. 혼자 알아낼 방법은 없었을 텐데."

"그렇군. 케빈, 예의 그 소문은. 윤곽이 잡혔냐?"

루이스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하지만 뭔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 아주 잠깐 대공궁의 시녀들 사이에서 떠돈 말일 뿐이지만... 그 일에 대해 떠벌린 이들 모두 갑자기 사라지거나 휴가를 받아 고향에 내려간다던 뒤로 소식이 없답니다. 아마 제거당한 게 아닐까요."

"소문이라뇨?"

처음 듣는 말에 아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이스는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대공궁에 보랏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여자가 한 명 나타났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어. 정말 며칠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에쉬리아란 여자인것 같아서."

"아아..."

아시엘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취를 감춘 그녀가 다시 대공의 곁에 나타난 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면상 구경할 날이 얼마 멀지 않은 거지, 뭐."

"굳이 입막음을 한 걸 보면 켕기는 게 있단 건 확실한 거고. 하지만 이미 그녀의 존재가 드러났는데 왜 숨기는 거지?"

아델레트의 의문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깐의 침묵 후 루이스가 툭 뱉었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게 있는 거겠지."

"아마 들키기 싫어서 그런 걸 거예요. 그녀가 뭔지."

아시엘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일순 모두의 눈이 그에게 쏠렸지만 아시엘은 렌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 무거운 대화 주제와 자신은 관련 없다는 듯 차만 홀짝이던 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에쉬리아는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자에요. 대공이 그녀를 숨기고자 한다면 아마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겠지요. 하지만 저들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아시엘이 멀쩡히 숨 쉬며 이곳에 있는 한."

"뭐?"

"잠깐만, 너-!"

루이카엔이 벙찐 소리를 내고 케빈이 검을 뽑을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이스는 반사적으로 아시엘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다른 이들 역시 얼굴을 굳히며 검자루를 살짝 쥐었다. 그러는 와중에 침착한 것은 루이스와 씨익 웃는 아시엘 뿐이었다. 루이스가 딱딱하게 물었다.

"... 자네 예언 능력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아뇨. 얼추 비슷하긴 하지만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란 거죠."

아시엘의 은근한 시선이 렌에게 향했다. 그 붉은 눈동자는 평소 렌을 바라보던 마냥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다. 특유의 빛을 내면서 약간의 냉기 역시 품은 독특한 분위기는 아시엘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렌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런 그의 주변에 흐르는 공기 역시 다소 바뀌어 있었다.

"언제부터 눈치 챘어요?"

"글쎄요. 죽다 살아나니 전엔 안 보이던 게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전부터 계속 얘기했죠? 어떤 일이 있어도 곁에 있겠다고. 당연히 그건 그 잘난 예언이겠죠? 그게 아니라면 살아 남은 대가인가."

"어쩌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제가 한 말은 지켜요. 그러니까 걱정 마시길."

둘 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기사들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참다 못한 제르닌이 따져 물었다.

"알아 듣게 얘기해. 저 사람은 여관 종업원이잖아."

"맞아요. 하지만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란 거죠. 렌 씨지만 렌 씨일 뿐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본인이 얘기한 것보다 훨씬 예언 능력은 엄청나요. 그리고 마냥 착하진 않죠. 사람 목숨을 가지고 도박질을 할 정도니."

마지막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시엘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그렇죠? 이제 슬슬 자기 소개를 다시 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죠. 이럴 계획은 전혀 아니었지만."

"거짓말. 알고 있었잖아요. 사표는 내고 오셨죠?"

렌은 대답하는 대신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모두의 긴장된 시선이 그에게 따라 붙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렌은 분위기를 바꿔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무대에 선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레키아노스 로렌- 좀 더 길지만 이 정도로 해 두고."

바닥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이내 그것은 렌을 빠르게 휘감았다. 기사들이 차마 경악하기도 전 연기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평범한 얼굴의 렌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뻗친 짙은 감색의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장난기가 가득 묻어 나오는 미소 안쪽엔 삐죽 송곳니 하나가 돋보였다. 고양이같이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 안에 자리잡은 것은 오렌지 빛의 영롱한 눈동자. 옷 역시 수수한 종업원의 의상에서 검정색의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정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허리를 바로 세우자 소름 끼치도록 정교하고 준수한 20대 중후반 남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일동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남자는 그 시선들을 즐기듯 가볍게 덧붙였다.

"당신들이 흔히 지칭하는 마족이란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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