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73화 (27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7. 예기치 않은 손님 (4)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에요. 제가 이 땅에 소환된 건 200년도 더 된 일이랍니다."

아시엘의 의아한 물음에 레키아가 간단히 답했다. 200년, 까마득한 시간에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그런 그들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때 흑마법사들 중 자신이 죽더라도 마족을 이 땅에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이들이 있었어요. 흑마법사가 혹시 전쟁애서 죽어 버려도 계속 마족의 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연구를 지시한 지배자라거나.

개중엔 마족과 각별한 우정을 쌓아버린 나머지 자신이 어디에서 전사하거나 살해당하는 경우, 마족이 함께 목숨을 잃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별난 인간도 있었죠."

"... 그 연구가 성공했단 말인가?"

냉정을 잃지 않은 루이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레키아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그렇답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폐기되고 말았어요. 인간보다 훨씬 강력하고 무자비한 마족들이 유일하게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계약자들의 손아귀에서마저 벗어나 버린다면 그 후에 이어질 일은 뻔하니까요. 연구가 완성된다면 대부분의 마족들은 제일 먼저 제 족쇄가 되던 계약자를 죽이고 인간계를 활보할 게 분명했어요."

동족에 대해서 신랄하게 말하는 그의 준수한 얼굴은 한없이 담담했다. 하지만 눈동자에 일순간 스쳐가는 경멸은 그도 숨기지 못했다. 이내 레키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원래의 편안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 제 계약자 역시 그 연구에 참여했고, 대부분 흑마법사들의 의견에 동의해 그 연구서를 폐기했죠. 하지만 그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맙니다. 자신이 죽기 직전 저에게 그 주술을 걸었어요. 제 의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말이에요."

"그래서 귀공은. 그 긴 세월 동안 인간계에서 살아왔다고? 마계로도 돌아가지 않고? 어째서 그런 거지?"

루이스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잠시 어떻게 설명할지 눈을 데굴 굴리며 고민하던 레키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주술에는 부작용이 있어요. 생각보다 힘이 너무 강력해서 제 의지로는 마계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정처 없이 인간계를 떠돌게 된 거죠. 슬슬 느긋하게 혼자 유람하고 다니는 것도 지겨워지던 찰나였는데... 아주 오랜만에 이 땅에 소환된 발칙한 아우들과 재미있는 꼬마 기사님을 발견했지 뭐에요."

그의 시선이 아시엘에게 닿았가 떨어졌다. 아시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뒷이야기를 종용하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레키아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 어쨌든. 그 때는 흑마법이 금지되지도 않았었고 오히려 현재 마법이라 불리는 백마법과 쌍두를 이루며 제국을 이끌어 가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 대공... 그러니까 이름이 슈베이만이라고 했던가. 그 자에게 소환된 아울 역시 이 땅에 있었지요.

그는 제가 받은 주술을 강력히 원했지만 그러기 전  모든 자료가 잿더미로 변해 버렸죠. 결국 그는 계약자의 수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마계로 역소환되어 돌아갔는데. 설마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는 사이인 겁니까?"

이번 물음은 루이카엔에게서였다. 레키아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의 이름은 아울 테리에셸 러시 아샤란. 창조와 재구성이 특기인 녀석이죠. 아마 일의 진행은 그가 도맡아서 할 거예요. 실험의 목적들은 당연히 고대 주술의 재완성이에요. 주술이라고 해야 할까, 그 때 공식적으로 부르던 명칭은 암브로시아 호레이샤. 지금 말하자면 고대의 술법과도 비슷하죠."

"어째서요? 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어쨌든 이때까지 행한 실험들은 옛날의 그것과 비슷해요.

아시엘의 미심쩍은 말에 그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구슬에 힘을 따로 담아 사용하는 건 계약자와 관련 없이 마족 개인의 힘이 유지 가능하도록 실험하는 방식이었어요. 지금처럼 어딘가에 설치해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건 인체 실험과 더불어 대공의 의뢰로 행해진 거겠죠. 아울 본인의 호기심도 충족할 겸."

그것을 마지막으로 로비에는 진득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아직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적대시 하기도 석연치 않았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이고 정말로 아시엘의 말대로 힘이 되어 준다면 레키아는 놓치고 싶지 않은 전력이 되어 줄 터였다. 아시엘이 입을 열었다.

"... 고마워요. 잘 들었어요, 레키아 씨."

"아시엘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속일 생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본의는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레키아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아시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잠깐만, 이 흐름은. 기사들은 순간 무언가를 직감하고 주춤했다. 상황을 읽지 못한 것은 레키아 본인 뿐이었다. 레키아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흐음, 그렇구나."

아시엘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며 턱을 쓸고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일은 눈 깜짝할 새 일어났다. 빠악, 아시엘의 부츠 앞코가 그의 정강이를 인정사정 없이 걷어 찼다. 커헉 소리를 내며 급소를 공격당한 마족은 속수무책으로 주저 앉으면서도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저놈 성질 좀 죽이라니까."

루이스의 탄식을 배경으로 레키아는 표정을 관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아시엘을 올려보았다. 소년은 위풍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대 마족의 앞에 척 버티고 섰다.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뻔뻔하게 그 반반한 면상 들이민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죠? 그렇죠, '레키아' 씨."

"어...?"

"아,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 더럽네. 내가 머저리처럼 황자님이랑 손 잡고 룰루랄라 황성 나갈 거 알고 있었으면서도 싱글싱글 웃으면서 예언 어쩌고 지껄이면서 아주 구경 나셨다, 그렇죠?"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깨달은 레키아의 이마에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아시엘의 일갈에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끄럽고, 미안하다는 말로 모든 게 다 끝날 것 같으면 우리가 왜 범죄자 잡으러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개고생을 하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눈앞의 작은 소년의 싱긋 웃는 얼굴에 압도당해 버린 레키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그가 원할 만 한 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아주아주 오랜만에 만난 초조함에 굴복해 결국.

"다, 당연히 그렇죠... 반성의 의미로 협력할게요. 앞으로도."

"당분간 생활관에 머물 거죠? 떠나지 않고?"

"... 네. 그럴게요."

노예 계약을 성립해 버렸다. 설마 인간 꼬맹이가 지독하면 얼마나 지독하겠어. 그런 안일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쉽게 내려진 결론이었다. 여태까지 렌으로만 지내며 아시엘의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 한 그의 불찰로 빚어진 참사였다.

"나 참, 어이 없는 하루였다고."

케빈이 투덜거리며 루이카엔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여전히 제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그가 조금 낯설어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낮의 일을 떠올리고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덕분에 좋은 전력을 얻었으니까 됐지, 뭐."

"그 망할 꼬맹이는 겁도 상실한 건가. 멋대로 생활관에 눌러 앉히기나 하고 말이야. 자기가 누구 때문에 그 꼴을 봤는지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케빈은 그의 맞은편 의자에 대충 걸터 앉았다. 루이카엔은 애매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했다.

"뭐, 해를 끼친 본인도 아니고 아시엘도 믿는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그 녀석은 결국 제 얘기만 쏙 빼고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잖아, 이번에도."

친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더 날이 서 있는 것을 느꼈지만 루이카엔은 별로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실험체, 마을의 괴멸. 거기까지 이야기했으니 아마 그 당시에도 기사단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그가 무슨 사건을 이야기하는지 대충 짐작은 했을 터였다.

"결국 제대로 물을 타이밍도 놓쳐 버렸다고. 그 녀석 일부러 그런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겠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루이카엔이 킥킥 웃음을 터뜨리자 케빈이 그를 못마땅하게 응시하다 지나가는 말처럼 툭 내뱉었다.

"네놈 면상도 엉망이로군. 물 먹은 종이마냥 축 처져선 단장이란 놈이 무슨꼴이야?"

"아주 힘들어 죽겠다. 요즘 일거리 폭발하는거 네놈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지?"

"그런 주제에 잠도 안 자고 잘 하는 짓이다."

그가 쏘아 붙이는 말에 루이카엔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잽싸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보다 넌. 내가 부탁한 일은?"

"...곧 갈 거니까 걱정 마셔. 덕분에 나까지 수면 부족이라고."

잠시 못마땅히 그를 바라보던 케빈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루이카엔은 킥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쳐 주었다.

"뭐, 설마 하는 마음일 뿐이니까. 그래도 잘 부탁한다."

"알고 있다고. 하여튼 사람 부려먹기는."

케빈은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은 그다지 싫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루이카엔은 다시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찬물이 쏟아져 고스란히 머리칼을 적셨다. 제대로 배수구로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발치에 고였다. 하지만 그 모든 감각들은 슌에게 제대로 닿지 않았다. 여러가지 사고가 얽히고 설켜 그의 머릿속은 완전히 포화 상태였다.

"하..."

그러니까 11년 전의 사건이란 말이지. 슌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갓 10대 초반을 벗어난 나이였지만 당시에도 대공의 곁에 은밀히 머물고 있었으니. 하지만 설마 그것 때문에 슈베이만이 아시엘을 주시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존재는 위험했다. 대공의 그늘 아래에 있지 않는다면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원래 인간의 행세를 하고 있었고 아시엘에게 호감을 가졌다지만 레키아는 마족이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그런 그를 한순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위험해."

슌의 입 밖으로 그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분명 이대로 둔다면 그는 점점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 뻔했다.

제거해야 해. 그는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물을 잠궜다. 뚝, 뚝. 머리카락 끝에 맻힌 물방울들이 바닥에 고인 물과 충돌해 동그란 파장을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은 그를 위해. 위험 요소는 일찌감치 없애야만 했다.

물기를 대강 닦고 다시 로비로 터벅터벅 돌아갔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조명은 다 꺼져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정신 없었던 하루는 어떻게든 대강 접어 두고 모두 잠자리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루이스 역시 아까 아시엘과 짧게 대화를 나눈 뒤 본성의 거처로 향했으니 남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슌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소파 쪽에서 낯익은 음성이 불쑥 튀어 나왔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요?"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건지, 마치 어둠 속에서 솟아난 검은 고양이처럼 레키아가 빙그레 웃으며 소파에 걸터 앉아 있었다. 슌은 허탈해져 몸의 긴장을 풀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사람 놀래키지 마세요."

"당신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지만 이미 고른 모양이네요."

레키아가 턱을 괴며 의미 있는 시선을 보냈지만 슌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레키아는 이내 뭐 어떠냐는 듯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분명히 나중에는 불행하게 될 겁니다, 희고 붉은 기사님."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슌은 그에게 차갑게 대꾸하고 다시 돌아서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그것은 오늘 낮 아시엘이 그에게 내뱉은 말이기도 했다. 슌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 이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레키아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인간은 재미있다니까."

모두가 이미 잠들어 버린 듯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창문 역시 두터운 커튼으로 덮혀 달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방이 점점 가까워 올수록 심란하던 마음은 침착하게 가라 앉아만 갔다.

그 원인이 지금 자신이 제거하려 하는 소년이 아무렇게나 툭 내뱉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는 한 마디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소리 없이 방문을 여니 뒤에 들어올 자신이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밝혀진 작은 촛불이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연이어진 일들과 벅찬 상황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큰 부상을 입은 게 그의 체력을 약하게 만든 건지 걸핏하면 밤을 새 가며 책을 읽던 아시엘은 답지 않게 일찍 곯아 떨어지곤 했다.

슌은 문가에서 잠시 자신의 침대에 파묻히듯 잠든 아시엘을 바라보다, 문을 살짝 닫았다. 그리고 굳이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그의 침대가로 다가갔다.

푹 잠든 앳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약 냄새가 풍기는 방에서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던 그 때와는 다르게, 여전히 안색은 좋지 않지만 생기가 보였다. 인간의 것이라곤 밑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에 슌의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졌다. 그래도 여전히 그 특유의 청력은 깊은 숙면을 방해하는지 아시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잠시 뒤척이던 그는 이내 멍하니 실눈을 떴다.

"엥... 아. 오셨어요."

"응."

그리고 곧 침대밭에 선 슌을 향해 잠에 취한 인사를 건네며 헤실 웃었다. 슌은 그에게 마주 미소 지어 주고 손을 뻗어 베개 위에 흩어진 금발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리고 막 다시 잠들려는 그의 가느다란 목을 콱 틀어 쥐었다. 붉은 눈동자가 놀람, 경악에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미안."

그는 작게 속삭였다. 악어의 눈물이라고 하는 건가, 이건. 서글픈 미소가 조금 일그러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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