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74화 (27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7. 소환 명령 (1)

며칠 동안과 별다를 바 없이 밤중의 생활관은 조용했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하루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걸핏하면 밤 늦게까지 술을 들이키며 떠들거나 밤마실을 나서던 골칫덩이 기사들 역시 얌전히 들어가서 정신없이 잠을 청하고는 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인듯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코 고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에휴, 짧게 한숨을 내쉰 케빈은 벽에 몸을 기댔다.

"그래도 그렇지, 마족이란 놈이 나타났는데 이렇게 태평하게 자버리는 게 뭐냐고. 그렇지, 앤?"

그의 목에 둘둘 감긴 애완 뱀이 대답이라도 하듯 혀를 낼름거렸다. 루이카엔이 그에게 한 부탁이란 다름 아닌 밤에 생활관 복도를 지켜 달라는 것이었다.

습격을 받은 아시엘이 깨어난 지금, 그를 해하려 들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생활관을 야습할 만큼 간덩이가 큰 암살자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내부의 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특히나 더.

그래도 역시 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케빈은 쩌억 크게 하품을 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미 며칠 동안이나 밤을 새워 복도를 지켰지만 무슨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시엘이 있는 방에는 슌 역시 함께 있으니 만일의 상황이 생기더라도 그가 어떻게든 해 줄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된 것은 꾸벅꾸벅 벽에 기대 조는 와중 난데없이 들려온 쨍그랑! 하는 소리였다.

"큭...!"

아시엘은 반사적으로 슌을 떼어내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슌 역시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작은 손이 간신히 덥석 그의 손목을 꽈악 잡았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실린 아시엘의 손이 손톱을 세워 그의 살을 파고들어 이내 피가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어째, 어째서..."

꽉 틀어 막힌 숨통에서 억지로 그런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색색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 나왔다. 하지만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은 없는 것 같았다. 슌은 조용히 답했다.

"네가 말했잖아.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아시엘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점차 눈 앞이 새하얗게 변해가기만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기절할 것만 같아 아시엘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호흡을 하지 못해 그의 하얀 얼굴이 더더욱 백짓장처럼 질려 가고 있었다. 몸에 휘감기는 이불 때문에 발버둥 역시 제대로 칠 수 없었다.

호흡곤란이 가져온 고통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아시엘은 슌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손톱으로 인한 상처가 깊어져 손목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목을 조르는 슌의 손아귀에는 점점 더 힘이 실려 갔다.

안돼, 위험해. 뿌옇게 물들어가는 의식에 경종이 울렸다. 아시엘의 손이 슌과의 힘겨루기를 포기해 버린 건지, 그게 아니면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져 버린 건지 풀려 버렸다.

슌의 표정이 흐려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시엘의 손이 향한 곳은 침대 바로 옆의 서랍장이었다. 남은 힘을 쥐어짜내 아시엘은 꽃병을 넘어뜨렸다.

와장창, 쨍그랑! 곧장 바닥에 격돌한 꽃병이 산산조각이 나며 파열음을 만들어 냈고 놀란 슌의 손에서 힘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틈타 아시엘이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정통으로 얼굴을 직격당한 슌은 균형을 잃었고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며 한꺼번에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시엘은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뇌가 마구 흔들리고 혼미해졌던 정신이 제대로 들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숨을 헐떡이며 망연자실해 그 자리에 우뚝 선 슌을 올려다 보았다. 방금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독기를 품고 있던 얼굴은 어디로 간 건지, 슌은 마치 영혼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다시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아시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선배가 해야 했던 일이, 이건가요."

"... 응."

슌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실패했네. 이젠 돌아갈 시간인가 보다."

쿵쿵쿵쿵, 꽃병이 깨지는 소리에 놀란 누군가가 방으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왈칵 열어 젖혀지고 케빈이 뛰어 들어왔다.

"야, 무슨 일이야! -슌?"

그리고 방 안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쓰러지듯 주저앉은 아시엘의 목에는 시퍼렇다 못해 거무죽죽한 멍이 들어 있었다. 침대 맡에 산산조각이 난 꽃병이 뒹굴었고 슌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슌은 고개를 돌려 케빈을 힐끗 곁눈질하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꽃병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은 케빈 뿐만은 아닌지 이곳 저곳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여기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 작별이야, 여러분. 정체가 탄로난 배우는 이제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지."

"뭐라고?"

케빈이 망연히 묻는 말에 답하지 않고 슌은 창문을 열어 젖혔다. 밤의 싸늘한 바람이 순간적으로 방 안으로 불어 닥쳐 커튼이 심하게 흔들렸다. 상황 파악을 끝낸 케빈은 이를 북 갈아 붙이며 그를 잡기 위해 한 걸음 디뎠다.

하지만 그보다 슌이 더 빨랐다. 그는 창틀을 밟고 그대로 뛰어 내렸다. 파사삭,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차가운 공기와 함께 귓가를 간지럽혔다. 케빈이 재빨리 창가로 뛰어가 아래를 확인했지만 슌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쳇, 이 자식! 언제부터..."

"아마 처음부터 아니었을까요."

거칠게 혀를 찬 케빈은 문득 들려오는 아시엘의 힘 빠진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법 냉정한 말과는 다르게,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잔뜩 흐트러진 금발이 식은땀으로 창백한 뺨에 달라붙어 있었고 부르터 갈라진 입술은 멍하니 벌어져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 선명히 빛나며 슌이 사라진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소동을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방에 들이닥쳤다. 거의 다 타들어간 초가 마지막 불꽃을 내며 방을 희미하게 밝혔다. 무슨 일이냐, 괜찮냐고 다급하게 물어 오는 것들을 흘려 들으며 아시엘은 고스란히 앉아 한참이나 창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멍청한 사람."

그가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것은 아무도 없었다. 이내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쉬게 해 주실래요? 이야기는 아침에 해요."

"아시엘."

오스카가 걱정스럽게 한 걸음 다가서려 했지만 아시엘이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기사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결국 제르닌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자라. 푹 쉬어."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다지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시엘의 덤덤한 말에 그 자리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윽고 하나 둘씩 어깨를 늘어뜨리고 그들이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에는 아시엘과 카이스 단 둘만이 남게 되었다.

"넌 안 가?"

"안 갈거야."

카이스의 짧은 대꾸에 아시엘은 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아시엘은 터덜터덜 걸어 아직까지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창문을 닫았다. 달빛 한 조각, 별 한 점 없는 밤이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다 이내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 조금, 진짜 조금은 지친다, 이제."

다음 날 아침, 아시엘은 아주 오랫동안 늦잠을 잤다. 기상 시간에 눈을 뜨기는 커녕 깨우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쿨쿨 자다 눈을 떠 보니 시곗바늘은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와중에도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멍청하게 시계만 들여다 보던 그는 이내 자신과 비슷하게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 중인 카이스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좋은 아침, 카이."

"잘 잤어?"

카이스는 슬쩍 미소 짓고 부스스하게 뜬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아시엘은 그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하품을 늘어지게 쩍 하다 문득 맞은편의 거울을 발견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하얀 목에 새겨진 시커멓고 퍼런 상흔은 전날 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거야, 난. 누구한테 원망 살 일... 은, 음. 자주 했지만."

"넌 그런 소리가 나오냐."

카이스가 퉁바리를 놓자 아시엘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인생에 대한 고찰 쯤은 해 봐야 하잖아. 이쯤 되면."

"진짜 죽을 뻔 했다는 감각은 없는 거냐?"

카이스는 따악, 아프지 않게 그의 이마를 때렸다. 아야, 답지도 않게 엄살을 부리는 아시엘을 흘겨보다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옷 갈아입고 내려가 봐. 교수님이 오셔서 아까부터 네가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계시니까."

"혼날 것 같은데."

"당연히 그렇겠지."

이렇게 태평한 얼굴로 나타난다면 루이스가 아니라 누구라도 복장이 터질 터였다. 자신을 비롯해서. 카이스는 계속해서 눈에 거슬리는 상처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척 보기에도 자신의 작은 친구는 몸무게가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마음에만 담아 두려던 말을 툭 내뱉고 말았다.

"...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넌 슌 선배.. 아니 그 사람이랑 사이 좋았잖아."

"그렇지. 뭐,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아시엘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평소 정이 많은 그의 성정 상, 조금은 더 후유증이 클 거라 생각했던 카이스는 묘한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뭔가 다른 거라도 있는 거야? 원망스럽지도 않아?"

"당연히. 지금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되갚아 줄지 머릿속으로 골백번은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원망보다."

잠시 말을 고르는지 아시엘은 눈을 느릿느릿 깜빡였다.

"동정이려나..."

"동정?"

제 귀를 의심하며 카이스가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더 이야기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상의를 훌렁 벗어 던진 뒤 한 쪽에 잘 개켜진 제복 셔츠를 집어 들었다.

"기다리고 계신다며. 얼른 가야지."

"응."

또다시 드러난 하얗고 얇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붕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카이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은 아시엘은 잔뜩 구겨진 그의 미간에 손가락을 짚었다.

"인상 펴라. 주름 진다고."

"... 주름이 뭐 어쨌다고. 흉터 남는 것보다가 훨씬 낫지."

카이스가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말에 아시엘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미소의 한 구석은 어쩐지 조금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슌의 배신 때문인가, 카이스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스스로 부정했다.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배신감과 원망에 상처 받은 모습이라기보다 그건 차라리 안타까워하는 것과 비슷했다.

원망보다 동정, 이라는 그의 말이 새삼 떠오르며 카이스는 더욱 아리송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옷을 다 입고 어깨를 툭 치는 아시엘의 손길에 그는 생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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