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9. 소환 명령 (3)
"무슨 생각이 있는 건가요?"
잠자코 뒤를 따르던 레키아가 느긋하게 물었다. 아시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아직 몰라요. 남은 건 폐하가 결정하실 일이에요."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의 손에는 절대로 넘기지 않는 사람 아니었던가요, 아시엘은."
후후 하는 웃음소리가 뒤이어졌지만 아시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게 불만스러웠던 건지-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건지- 레키아가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너무 대우가 달라진 것 아니에요? 제가 렌이었을 때와."
"뭘 기대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과한 걸 바라지 말아요. 미안하지만 그럴 정도로 여유는 없어요."
"나중에 후회하게 될 텐데도?"
우뚝. 그제야 아시엘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읽어내기 힘든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레키아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같은 힘을 가진 자들의 미래는 제대로 볼 수 없다면서요."
방금 전까지 가벼운 걸음을 옮기던 소년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 의중을 읽어낸 레키아는 흐음,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은 어떨까."
"됐어요."
아시엘은 다시 홱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레키아는 쿡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재미도 있고. 1분 뒤에 어떤 손님이 올지, 내일은 아침 식사로 뭐가 나올지 알고 있는 하루하루는 조금 지루했거든요."
"......"
"아시엘은 알아야 해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때 아시엘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반짝이는지. 마족인 저에게도 그러니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겐 마치 어둠 속의 화톳불처럼 보였겠죠."
마치 노래하듯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아시엘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을 응시하며 레키아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휘었다.
"인간은 재미있어요. 우리보다 훨씬 짧은 세월을 살면서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게 우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아시엘도 마찬가지에요. 아둥바둥 세상을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일 뿐이에요."
"...누가 모른대요."
잠깐의 침묵 후, 이내 아시엘이 불퉁하게 툭 내뱉었다. 레키아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네, 네. 그렇겠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슌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불도 밝혀지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덩그러니 놓인 침대에 걸터 앉아 그는 멍하게 허공만을 응시했다.
실패할 줄 알았어, 슈나리엔.
돌아온 그를 맞이한 아울이 히죽 웃으며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그의 어깨에 살포시 앉아 눈을 번들거리는 검은 까마귀, 셰이드를 본 순간 슌은 자신이 상황을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병사들의 손에 질질 끌리듯 이 방에 갇히게 되었다. 조금만 힘을 쓰면 그런 일반병들 정도야 쉽게 뿌리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인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슌은 픽 웃고 말았다. 아니면 아직은 사용 가치가 있는 걸까. 자신에게 붙어 있던 셰이드가 아울에게 돌아간 이상 어차피 생활관 내부의 상황은 그들에게 전달되었을 터였다.
끼릭, 문고리가 건조하게 돌아가며 문이 살짝 열렸다. 갑작스레 쏟아져 드는 불빛에 슌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겐 돌아오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하필 이런 시기에 저질러야 했던 이유는 뭘까?"
귓가에 웃음기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슌은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어디에서?"
"너 역시 그러길 원했던 거 아니었던가."
그녀, 에쉬리아는 미끄러지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또각, 또각. 혼을 빼놓을 것 같은 구둣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슌은 살짝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들에 대해 그쪽의 단장님에게 모두 털어놓고 영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에쉬리아가 후후, 입술을 부드럽게 휘었다.
"지금의 내쳐진 강아지 같은 표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사냥에 실패한 사냥개의 얼굴인가?"
"그런 너도 돌아왔을 때 가벼운 소동을 일으킨 걸로 아는데. 덕분에 네 위치가 그 녀석들에게 드러나 버렸어."
"황궁의 법도엔 익숙하지 못해서 라고 해 두지, 일단은."
그 모호한 대답에 슌은 살짝 눈썹을 구겼다가 폈다.
"넌 그 애가 뭔지 알고 있었지?"
"아마도. 아울 님이 살짝 귀띔해주신 것도 있었고 아주 미미하지만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졌으니까."
그녀는 순순히 시인했다. 그래, 그랬구나. 영혼 없이 대꾸하며 슌은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것으로 둘 사이의 대화는 끊어져 진득한 침묵이 어두운 방 안에 가라앉았다. 에쉬리아는 거추장스럽게 흘러 내리는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벽에 등을 기댔다.
"너랑 내 공통점이 뭔지 알아?"
그 때 슌이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에쉬리아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녀석을 만나 버렸다는 거야. 두 번 다시 볼 일 없다고 하더라도 절대 잊어버리지 못하겠지."
"흐음."
에쉬리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후회해? 확실히 좋은 기사단이었어. 구닥다리 같은 표현이지만 서로 아끼는 게 눈에 보였어. 우리와는 정 반대의 분위기던데."
"글쎄."
아까의 대답을 반복하며 슌은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그의 눈동자가 힐끗 에쉬리아를 의미 있게 곁눈질했다.
"너라고 해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무슨 꿍꿍이야?"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처음으로 살짝 찌푸려졌다.
"별로 그렇게 말 할 것도 없어... 어차피 난 셀레니스 기사단의 배신자일 뿐이고. 그래도 조금 억울하긴 하네. 어른이나 되어서 이도 저도 아닌 꼴로 휩쓸려 다니는 건."
그러니 톱니바퀴는 되지 못하더라도 하다 못해 그 사이에 던져진 조그만 자갈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슌은 뒷말을 웃음과 함께 속으로 조용히 삼켰다. 도 아니면 모의 일이었지만- 그는 '전' 동료들이 배신자의 허점을 분명히 포착해 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본성으로 다다를수록 아시엘은 레키아에게 모이는 시선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레키아 역시 그것을 자각한 듯 흥미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이따금 눈이 마주치는 하녀들에게 눈웃음을 보내기도 했다. 아시엘은 그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쪽팔리니까 얌전히 있어요. 그렇게 안 봤더니 바람둥이 기질이 있나 보네."
"왜, 질투라도 나?"
"본인이 잘생긴 얼굴이란 자각이 있으면 좀 가리던가. 그리고 말을 놓던지 말던지 둘 중 하나만 해요. 기분 나쁘니까."
"거울이나 보고 얘기하지. 지금 저 사람들이 전부 다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내버려 둬요, 말버릇이니."
투닥투닥 다퉈 대는 두 사람은 확실히 궁에서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낯선 얼굴의 훤칠한 미남자- 신원조차 불명이지만 정말 말도 안 되게 잘생긴- 그리고 그와 함께 걷고 있는 이는 마찬가지로 한 눈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의 미소년, 아시엘 아르셰인이니.
레키아가 은근히 살기를 흘리는 덕분에 차마 접근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하녀들 뿐만이 아니라 현재 정세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귀족들 역시 힐끔힐끔 그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아시엘 역시 곧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무시해 버렸다.
"그보다 이제 슬슬 말 해주지 않을래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딱히 생각이랄 것도 없어요."
레키아의 물음에 아시엘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려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걸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라이펜의 집무실 앞에 다다라 있었다.
"정말 모 아니면 도인 일이었지만... 요즘 셀레니스 기사단과 폐하는 내부의 첩자가 누구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죠. 그 존재 때문에 행동 역시 조심스러웠고."
"그런데요?"
"그런 타이밍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첩자가 절 죽이는 데 실패하고 도망쳤어요. 그건 곧 우리가 경계해야 했던 보이지 않는 돌부리가 제 발로 나타난 것과 같아요."
아시엘의 얼굴을 본 집무실 앞의 경비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은연중 황자 습격 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고 있는 그가 너무나도 당당하게 황제를 찾아온 게 곤혹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길을 비켜 주었다. 문이 열리고 짧은 복도가 드러났다. 아시엘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더 잘 알 수 있도록 얘기해 볼까요? 만약 슌 선배가 단도로 내 심장을 찔렀다면 루이카엔 씨나 다른 사람들은 아침 쯤에 내 시체를 발견했겠죠. 전 저항도 못 하고 죽었을 테고요."
"하지만 그 남자는 진심이었는걸. 정말로 아시엘을 죽이려 했어."
"맞아요. 제가 만약 운 좋게 꽃병을 쓰러트리지 못했어도 전 죽었을 거예요... 그게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인간들의 모순이란 녀석이에요."
"어렵네요."
레키아는 진심으로 모호한 얼굴을 했다.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하고 두 번째 문 앞에 섰다. 아쉽게도 그의 뒤에 선 덕분에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레키아는 지금 아시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첩자가 누구였는지 드러났고 그리고 마침 날아온 소환장.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죠."
불굴의 의지라는 말이 우스워질 정도로 당당하고 자신 만만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레키아는 그제야 생활관에서 나오기 직전 보았던 기사들의 어이 없다는 눈빛을 제대로 이해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들의 꼴만 민망해질 뿐이었다. 배에 난 구멍, 목의 시퍼런 멍 자국 정도로는 결코 그를 주눅들게 만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