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1. 고양이의 꿍꿍이 (1)
독대가 끝난 몇 시간 후, 생활관에 라이펜으로부터의 전갈이 도착했다. 비상 시국에 따른 특별 인원 추가가 급하게 이루어졌으며 지원으로 온 이는 레키아 노스티어.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마땅한 신분 없이 지내다 어딘가의 백작님에게 발견된 뒤 여차저차해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황성으로 불려온 행운의 기사라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제국에서 그의 신분을 증명해 줄 증서까지 도착하자 레키아는 배를 잡고 깔깔대며 로비 바닥을 굴러다녀야 했다.
물론 기사들의 황당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황제를 만나러 나간다며 졸랑졸랑 나서서는 이런 결과를 가져온 아시엘을 모두가 어이없이 바라보았지만 그 장본인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 만족감이 가득한 얼굴로 낮잠을 청해 버려서 결국 그들은 따져 물을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용기를 낸 케빈이 레키아에게 어떻게 황제 폐하를 이렇게 단시간에 설득했냐, 라며 물었지만 레키아는 애매하게 미소 지으며 답을 회피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아시엘이 개시한 일은 황자궁에서 전에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유트리안에게 처들어 가는 것이었다.
"-너 나 놀리러 왔냐."
"아니, 그럴 리가."
그렇게 대답하는 것 치고 아시엘은 꽤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 꼴을 보자니 일에 치이는 유트리안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법도 했다. 아시엘은 한쪽에 마련된 일인용 소파에 -유트리안 전용으로 만들어진 최고급의- 거의 드러눕듯 기대 앉아 와삭와삭 시종들이 가져다 준 쿠키를 씹거나 좋아하는 차를 마음껏 음미했다. 그러다 가끔 새로운 서류가 들어오면 힐끔힐끔 옆 동네 불 구경이라도 하듯 유트리안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쏙 빼 대강 눈으로 훑어보다 이것저것 참견하기도 했다.
정말 할 일 없는 고양이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따금 그가 건네는 조언들이 상당히 도움이 되는 터라 그냥 내버려두고는 있었지만, 남의 서류를 통째로 빼돌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소파에 모로 누운 채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읽듯 정독하다 그대로 새근새근 곯아 떨어지는 그를 볼 때마다 유트리안은 복잡한 심경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주는 것 없이 얄미운 꼴이었다. 하지만 또 속에 능구렁이를 백 마리 정도는 키우는 주제에 잠든 얼굴은 순진하기 그지없어서 -진짜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가만히 거두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너 소환장 받았다면서. 그런데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되는 거냐? 너 루이스 경이 도와준다는 것도 거절했다면서."
"응-? 아아,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봤자 시끄러워질 뿐이니까. 그리고 놀고만 있는게 아니거든."
여전히 소파에 파묻혀 달달한 과자를 입에 넣으며 아시엘이 대꾸했다. 놀고 있는 거 맞잖아, 유트리안은 그렇게 쏘아 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 담았다.
"심심하면 너희 생활관으로나 가."
"놀고 있는 거 아니라니까."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아시엘이 빙글 누운 자세를 바꿨다. 분명히 1인용 소파인데 어떻게 저리 쏙 들어갈 수가 있는 건지 매번 볼 때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꼬리가 있으면 무료하게 설렁설렁 흔들어 댈 것만 같았다. 강아지 풀이라도 흔들어 줘야 하나, 유트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뭐 하고 있는데?"
"조사."
"너 여기에 들어오는 서류가 어떤 건지는 잘 알고 있지?"
"엉.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온갖 시답잖은 일이랑 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이잖아?"
"그럼 일개 기사인 네가 봐선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네."
"응."
-참 한결같이 뻔뻔한 태도였다. 슬슬 골이 지끈거려와 유트리안은 미간을 주물렀다. 아무래도 화제를 바꾸는게 나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셀레니스 기사단에 충원됐다는 거, 누구야? 아바마마가 네가 부탁한 일이니 너한테 물어보라고 하셨는데. "
"레키아 씨."
"그러니까 그 레키아 씨가 누군데."
"마족."
"쿠훌럭!"
방금 말은 취소. 사태가 더 심각해지고 말았다. 마른 사레가 들린 유트리안이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하자 아시엘은 킥킥 웃으며 턱을 괴고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지만, 어쨌든 우리 편이야.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급한 일부터 끝내고."
"아니... 하아. 말을 말자."
온갖 단어들이 목 끝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일단 유트리안은 눌러 담았다. 그가 이렇게 나온다면 정말로 내킬 때까지 가르쳐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은 이미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더더욱 관자놀이가 아파져 와 그는 다시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마족이... 아니다. 아냐. 됐어."
"일찌감치 포기하는 태도, 아주 좋아."
아시엘은 키들키들 웃으며 읽던 서류를 탁 소리 나도록 덮었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소파에 파묻힌 채로 문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손님이야."
"뭐?"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똑똑, 하는 노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밖에 세워 둔 경비병이 안으로 우렁차게 고했다.
"웨슬린 백작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아... 들어와."
이제 진짜 고양이 정도로 괜찮은 거 아니냐, 유트리안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미간을 짚었다. 찰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웨슬린 백작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유트리안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려던 그는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아시엘을 발견하고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아, 아시엘 경? 오, 오늘도 계신 겁니까."
"전 신경쓰지 마세요. 놀고 있을 뿐이니까."
"놀고 있는 거 아니라면서!"
아시엘이 히히 웃으며 하는 말에 유트리안은 결국 바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시엘은 몸을 일으켜 똑바로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마법 실력은 좀 느셨어요? 백작님."
"하, 하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경."
"멀쩡해요. 보시는 바와 같이. 전 신경쓰지 마시고 두 분 할 얘기 하세요. 여기에 얌전히 있을 테니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백작에게 그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어 주고 정말로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마냥 다시 서류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며칠째 이곳에 상주하는 아시엘 덕분에 찾아올 때마다 격한 반응을 보여주는 백작이 유트리안은 슬슬 안타까워졌다.
"저 자식이 얌전히 있겠다는 말은 믿을 만 한 게 못 되지만, 어쨌든 신경쓰지 말고 보고부터 부탁해요."
"아, 예..."
백작은 애써 아시엘에게서 눈을 떼려 애쓰며 자신이 가져온 보고서를 그에게 건넸다.
"이번에 전하의 휘하에 합류를 청한 이들의 명단입니다. 남작 이상의 귀족들로, 거의 지방에서 영지만을 보살피던 젊은 귀족들인 듯 합니다."
"좋아요. 당분간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저도 볼래요!"
어느새 다가온 아시엘이 유트리안의 책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내밀었다. 유트리안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으려 애썼다.
"얌전히 있는다면서."
"얌전히 있잖아, 지금도."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면서도 아시엘은 그의 손에 쥐어진 명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어붙은 웨슬린 백작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결국 눈치를 보던 백작이 힘겹게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아시엘 경. 일전 파티장에서의 결례는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일인데요, 뭐. 신경쓰지 마세요."
아시엘은 시원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아, 역시 파티장에서 여자로 착각해 집적댔던 일이 걸렸던 거구나. 유트리안은 묘하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면 그게 남자였던 걸로도 모자라서 루이스 아르셰인의 아들이었다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백작님이 제 편을 들어 주셨다면서요? 그런 상황에서 믿어 준 분께 화를 낼 만큼 야박하지는 않아요."
"아..."
웨슬린 백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저 여우, 유트리안이 작게 내뱉자 아시엘이 즉각 서류더미로 그의 머리를 내려치는 응징을 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백작은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해질녘이 되고, 백작도 돌아가고 유트리안이 황실 도서관으로 수업을 갈 시간이 되어서야 하루종일 소파에 찰싹 붙어 있던 아시엘도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나갈 채비를 하며 유트리안이 그를 곱지 못한 눈길로 곁눈질했다.
"왜, 도서관 따라가게?"
"이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졌잖아. 생활관에 돌아가려고."
"도대체 여기까진 뭐 하러 오는 거야?"
잔뜩 구겨진 제복 코트를 탁탁 털어낸 아시엘이 간단하게 답하자 그는 어이없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글쎄, 애매한 답을 내어 놓은 아시엘은 말을 고르듯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싱긋 웃었다.
"정찰이라고 해야 하나. 네 집무실에 오는 자료들이 생각보다 쏠쏠하거든."
"뭐?"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유트리안이 눈썹을 휘었지만 아시엘은 히힝,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답을 내주지 않았다.
"일은 차례차례 하는 게 중요하니까. 이건 그 1단계야."
"뭘 위한 건데?"
"이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한."
아시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슬쩍 입꼬리를 휘었다. 방금과는 조금 다른 웃음인 것을 유트리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너."
"여러모로 귀찮은 게 많아져서. 목표는 적들 뿐만이 아니지."
여전히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더 캐묻는게 두려워진 그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아시엘은 금세 표정을 바꾸고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쓰지 마. 별 일 없을 테니까."
"그 말이 제일 무섭다고."
진심이 듬뿍 담긴 유트리안의 한 마디를 뒤로 하고 아시엘은 집무실을 나섰다. 흥흥, 기분 좋게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아시엘의 뒤를 따랐다. 쿵, 매정하게 닫힌 문을 뚫어지게 잠시 바라보던 유트리안은 푹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네."
재미 뿐만으로 끝난다면 참 좋으련만. 그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소환일까지 앞으로 이틀이 남은 시점이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소장본 선주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가언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이 공지를 올리게 되어서 너무 영광이에요ㅠㅜㅜㅜ
여러분의 응원 덕분에 무사히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소장본 1권 주문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감지옥이 시작되어따)
자세한 것은 블로그를 확인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당6ㅇㅂㅇ9 헤헷
항상 부족한 글 아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고뭉치 주인공 예뻐해주셔서 너무나도 행복해요?
앞으로도 모자란 초보 작가 잘 부탁드립니다! 완결까지 쭈우욱!! 달려보겠습니다! 1권부터 완결까지 전부 소장본으로 나올 수 있도록 부디 예쁘게 봐주셔요(꾸벅)
가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