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79화 (27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 262. 고양이의 꿍꿍이 (2)

"아, 아시엘?"

루이카엔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년은 어디서 가져온 건지도 모를 종이더미에 코를 박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며칠 째인지. 룰루랄라 유트리안에게 간다며 아침 일찍 생활관을 나선 그는 항상 돌아오자마자 제 방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열심히 종이에 옮겨 적어 댔다.

처음에 뭐 하냐며 루이카엔이 어깨너머로 종이를 곁눈질하자 그는 히죽 웃으며 열심히 사각사각 쓰던 것들을 교묘하게 가려 버렸다. 몇 번 더 눈치를 보며 확인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단장은 번번이 아시엘의 철저한 수비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하아..."

결국 오늘도 포기하고 루이카엔은 이마를 짚었다. 아시엘이 기운을 차린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꼴이 그는 영 불안했다.

"아프면 말해.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걱정 마세요."

"걱정 안 하게 생겼어? 저번에 그렇게-"

무뚝뚝한 답이 돌아오자 저도 모르게 울컥 화를 내려던 루이카엔은 말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아시엘의 말간 눈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 아냐. 됐어. 어쨌든 조심해. 전부 걱정하고 있으니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냐."

루이카엔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시엘의 머리를 헝클었다. 꽤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인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석하던 머리칼이 예전의 감촉을 되찾고 있었다. 아시엘은 불만스럽게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전에 없이 냉정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 루이카엔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

"하지 마세요."

"어? 어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는 의아해졌다. 원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것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어째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뭘까, 잠깐 고민하던 루이카엔은 이내 한 가지 짚이는 점을 찾아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뭐 화난 거라도 있어?"

"네."

뜻밖에 간단히 대답이 돌아오자 루이카엔은 정말 의아해지고 말았다.

"누구한테? 나한테?"

"전부 다요."

영문을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도 말라는 듯 아시엘은 다시 사각사각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 작은 뒷모습이 나가라고 조용히 종용하는 것 같아, 결국 루이카엔은 눈치를 살피다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쿵. 신경 써서 조심스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아시엘은 살포시 인상을 썼다.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는 말은 아무도 들을 이 없었다.

의문점만 가득 품은 채 아시엘의 방을 나선 루이카엔이 가장 처음으로 만난 원군은 카이스였다. 막 로비에서 올라오는 카이스를 발견한 루이카엔은 그를 불러 세웠다.

"카이스."

"아, 단장님."

카이스는 까닥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다운 무뚝뚝한 얼굴에 픽 웃음을 터뜨린 루이카엔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요즘 아시엘 심기가 불편한 것 같던데. 뭐 아는 거 있어?"

"아뇨. 저도 잘."

카이스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자 루이카엔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그 녀석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카이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 할까 말까, 망설이며 눈동자를 데굴 굴린 그는 이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제가 보기엔 선배님들도 예민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뭐? 그거야 당연하잖아."

루이카엔이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생활관 분위기는 상당히 뒤숭숭했다. 여러 가지 사건이 겹쳐 일어난 데다 얼마 전에는 믿었던 슌이 배신하고 달아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련의 궂은일들을 정면으로 당한 아시엘에게 신경이 더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이스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루이카엔이 눈썹을 휘었다.

"왜 그래?"

"뭔가 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카이스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애매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답지 않다는 거."

"무슨 말이야? 물론 분위기가 조금 경직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

"물론 그렇지만... 그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 때 그 녀석, 이 될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루이카엔은 의아하게 눈을 꿈뻑였다.

"무슨 뜻이야?"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지도 모르죠. 그 녀석은 이기적이니까 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별일이네..."

"하지만 사실인걸요."

루이카엔이 고개를 갸웃하자 카이스는 간단히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상황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이 그 녀석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요."

"그래서 화가 났다고?"

"그렇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채로 있을 녀석이 아니잖습니까. 레키아 씨도 생활관에 억지로 밀어 넣어 버렸으니."

조용한 지금이 어쩌면 제일 무서운 걸지도. 그렇게 작게 카이스가 덧붙이는 말이 너무나도 불길하게 들려왔다. 루이카엔은 꺼림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사과해야 하나."

내가 뭘 잘못했더라- 그는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시간을 되짚어 봤지만 역시 짐작 가는 바는 없었다. 최근에 달라진 거라고 해봤자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것 뿐이었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 그렇겠지."

루이카엔이 애써 웃으며 대꾸했다. 뎅- 뎅- 가운데에 걸린 괘종시계가 밤 11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울렸다.

"끄응."

아시엘은 자꾸만 침침해져 오는 눈을 비볐다. 확실히 체력이 떨어진 모양인지 예전에는 공부하면서도 거뜬히 아침까지 버텼지만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 낮에 유트리안의 집무실에서 뒹굴거리며 낮잠도 잤지만 이 부실한 몸뚱이는 아무래도 좀 더 휴식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훌륭한가."

아시엘은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을 내려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 특유의 간결한 글씨체가 빽빽이 새겨진 종이뭉치는 가죽끈으로 깔끔하게 묶여 정리되어 있었다.

"그럼 다음은."

황제 폐하가 받아주겠다 결심했으니 그에 걸맞게 움직여야지. 흠흠, 목을 가다듬은 아시엘은 허공에 대고 목소리를 냈다.

"레키아 씨."

"네- 저 여기에 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대 쪽에서 검은 연기가 스륵, 일어나며 레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시엘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레키아 씨, 변장 잘 하죠?"

"네?"

갑작스러운 말에 레키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시엘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

"그 왜, 렌 씨로 오랫동안 사셨잖아요. 본인 얼굴도 아니었으면서."

"그렇긴 하지만, 그건 변장이 아니라 흉내를 냈던 것 뿐 이었는데요?"

"어쨌든 그 얼굴 바꾸는 거, 다른 사람으로도 할 수 있는 거죠?"

아시엘이 집요하게 물어 오자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특기는 예지이지만 그건 인간들의 환각 마법과도 비슷한 거니까. 전문 분야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해요."

"잘 됐네요. 그럼 도둑질은 잘 해요?"

"네?"

이번에야말로 레키아는 정말 어이없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검은 연기의 잔재를 가리켰다.

"왜, 방금도 허공에서 슥 나타났잖아요. 그걸로 들키지 않고 침입할 수만 있다면 간단할 것 같은데요?"

"그... 렇긴 하겠네요. 그런데 왜-"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실래요?"

레키아의 말을 뚝 자르며 아시엘이 발랄하게 말했다. 얼핏 들으면 지나가던 꼬마가 사탕 하나만 주세요, 라고 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하지만 레키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부탁이요?"

"네. '무려' 마족이잖아요, 당신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 기한은 내일 아침까지."

묘한 곳에 악센트가 들어가 있는 말에 레키아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반짝반짝 빛을 내는 아시엘의 커다란 눈을 거역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레키아의 아름다운 얼굴에 난색이 스쳐 지나자 아시엘은 쐐기를 박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해준다면서요?"

"하아... 알았어요. 그나저나 아시엘은 절 완전히 신뢰하는 거예요? 믿어 준다니 기쁘지만 난 당신이 적대하고 있는 마족인데. 심지어 아시엘은 고작 며칠 전에 믿었던 선배에게 공격당했잖아요."

레키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시엘의 가느다란 목에 남은 상흔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잠깐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고르던 아시엘은 이내 시원스레 웃었다.

"뭐 어때요. 제가 상대하는 건 마족이 아니라 대공 전하인걸요. 물론 마족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걸로 당신처럼 유용한 자원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자원... 인가요."

레키아는 그의 말을 입 속에서 재차 굴리다 이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변덕쟁이 고양이도 아니고. 그래서 도대체 뭘 시키려는 건가요? 정말로 도둑질?"

"뭐라고 하건 상관없으니까 이리로 와 봐요.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줄 테니까."

"독자적으로 하는 거죠? 선배들에게 알리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말할 거예요. 내일,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아시엘은 히죽 개구쟁이 같은 특유의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이때까지의 경험상, 저 예쁜 얼굴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 기분에 레키아는 푹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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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 외전. 소장본 한정 외전 샘플

일상이란 건 생각보다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운 법이었다. 늘 반복되는 하루하루라도 언제나 다른 일은 생겼다. 점심 메뉴가 평소와 달랐다거나, 강의에 들어온 교수님의 패션이 독특했다거나. 조금 조금씩의 변화가 모여 하나의 전환점에 다다르게 된다. 나름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던 소년이 간신히 '일상'이라는 것에 정착하게 되며 알게 된 하나의 공식이었다.

"이것도 변화의 시초라는 건가."

아니, 애초에 변화라고 할 게 있던가. 아시엘은 마치 남의 일을 보듯 무심히 자신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저주와 험담이 가득한 낙서와 쓰레기로 그가 마법 강의를 들으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말끔하던 책상은 아주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흠.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턱을 쓸었다.

"귀찮게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이것도 일상의 귀퉁이인가? 늘 함께 다니는 카이스나 레이가 들었다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릴 만 한 엉뚱한 생각을 이어 가며 아시엘은 쓰레기를 우르르 옆의 바닥에 쓸어버렸다. 범인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터였다.

"아-시엘!"

그 때 바로 곁에서 익숙한 소년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갈 만 한 발소리 역시 함께였다. 아시엘은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레이, 카이. 왔어?"

"기다렸지? 점심 먹으러 가자. 다른 녀석들은 먼저 가 있겠다고 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뒤늦게 레이가 그의 책상을 발견하고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카이스 역시 그 말에 까치발을 들고 엉망이 된 책상을 자세히 살피려 했지만 아시엘이 웃으며 그런 두 친구의 앞을 막았다.

"괜찮아, 이깟 거 새삼.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하지만..."

"그냥 가자니까."

불만을 토로하려는 카이스의 등을 그가 다시 떠밀었다. 결국 두 사람은 찜찜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면서도 아시엘의 성화에 함께 교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하는지 구경이나 해 보자고."

물론 두 소년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루카인 기사 양성 아카데미. 세튼 제국의 수도, 헤크란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륙 최대의 인재양성소. 저마다 다른 이유와 사정을 품에 안고 입학한 어린 학생들은 이곳에서 착실히 성장해 나갔다. 여러 가지를 배우고 훌륭한 학우들과 함께 지내며, 성적만 된다면(그리고 엄청난 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다면) 평민의 자식들도 입학해 기사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키워 나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아카데미였다.

가문을 위해, 평민인 집안의 격을 높이기 위해, 멋진 기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등등. 학생들이 가진 희망들은 다 달랐지만 소년 소녀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가장 이유가 모호한 한 소년.

"뭐야? 또 그것밖에 안 먹어?"

"이따가 사탕 먹을 거니까 괜찮아."

레이의 핀잔에 아시엘이 오물오물 고기를 씹으며 대꾸했다. 그의 식판에 놓인 식사의 양은 다른 이들의 3분의 2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남겨둔 채 그는 이미 포크를 내리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소년이 끼어들어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키가 안 크는 거야, 우리 학년 남자 중에서 제일 작은 주제에."

"죽는다, 베리스온."

표정조차 변하지 않고 아시엘이 간단하게 대꾸하자 베리스온이라 불린 소년은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소년, 데이안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성질 더러운 건 알아 줘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아시엘, 머리 너무 길지 않아? 불편할 것 같은데."

"그런가?"

아시엘은 자신의 결 좋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입학할 때쯤에는 어깨까지 내려오던 금발은 이제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데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너 매일 여자애로 착각 당하는 거 싫다면서. 머리 자르면 조금 나을지도 모르는데."

"야, 야. 아서라. 저 예쁜 머리를 왜 잘라! 그랬다간 온 아카데미에 난리가 날 걸. 불똥은 고스란히 우리한테 튈 테고."

"맞아. 그러니까 머리는 절대 자르지 마! 자를 거면 우리한테 허락 받으라고!"

레이가 기겁하며 두 손을 내젓자 베리스온이 가세해 못을 박았다. 아시엘은 미간은 살짝 찌푸렸다.

"당분간은 자를 생각 없긴 한데, 내가 왜 너희 허락을 받아야 되냐?"

"네가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싹둑 잘라서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 숱한 분노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게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해?"

소탈한 성격이야 어떻건 그의 화려한 외모는 아카데미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긴 금발과 독특한 붉은색 눈동자는 아시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도대체 누가 화를 낸다는 거야?"

"됐다, 됐어. 너랑 무슨 말을 해."

아시엘이 의아하게 되묻는 말에 베리스온이 이마를 짚었다. 수업 시간이나 전투 센스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예리한 그가 둔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때 묵묵히 있던 카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아시엘. 아까 그 책상.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응? 아, 별거 아냐. 또 장난질일 뿐이겠지."

아시엘은 주스를 홀짝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드르륵,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버렸다.

"늦겠다, 다 먹었으면 이제 가자고."

"어? 어어..."

그의 서두르는 모습에 다른 이들 역시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빈 그릇을 챙겨 들었다. 뒤에서 카이스가 따가운 눈총을 쏘는 것은, 아시엘은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멀뚱멀뚱. 아시엘은 자신의 사물함을 바라보았다. 점심 식사 후 마법 수업이 있어 그는 다른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책을 가지러 온 참이었다. 이건 좀 짜증나는데. 사물함의 문에 덕지덕지 발린 것은 음식물 쓰레기였다. 손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안을 확인하니 열쇠로 잠가 두지 않았던 게 화근인 듯,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흠."

최근 좀 잠잠하나 싶더니. 아시엘은 무덤덤하게 턱을 쓸며 다행히 그나마 멀쩡한 마법서를 집어 들었다.

"새삼스럽게 왜 또 이 난리래."

단지 치우기가 조금 귀찮을 뿐이지만. 곁에 있던 학생들이 괴롭힘의 흔적이 역력한 사물함을 보며 웅성거리는 것이 지나치게 밝은 귀에 생생히 들려왔다.

아시엘은 살풋 눈을 감고 그 목소리들에 집중했다. 누가 그랬는지 봤어? 몰라, 아까 니스 루 하노빌네 패거리 중 하나가 어슬렁거리던데. 괜히 끼어들면 골치만 아프지.

"아하."

눈을 다시 뜬 그는 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남의 사물함이 이 꼴이 될 동안 얌전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거구나.

"첫 번째가 책상, 두 번째가 사물함이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아시엘이 작게 수식을 읊기 시작하자 그의 손 위에 작은 빛의 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르네 레 테이란 로서. 클린."

화악- 마력이 빠져나가는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과 함께 구체는 마법진으로 변해 마법을 발현시켰다. 순식간에 깨끗해진 사물함을 보며 아시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그 애송이들이 도대체 무슨 볼일일까."

뭐, 답답해지면 알아서 나오겠지. 그는 쾅, 소리 나도록 문을 닫고 미련 없이 돌아서 버렸다.

* * *

뒷부분은 소장본에서 확인해 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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