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3.고양이의 꿍꿍이 (3)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의 생활관은 대공의 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셀레니스의 생활관과 일견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이 드나드는 그곳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채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검문 없이 대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대공 슈베이만과 그 측근들, 그리고 루아 이클립스의 기사들 뿐. 그리고 생활관 내로 들어서면 정원 대신 수련을 위한 드넓은 야외 연무장이 펼쳐졌다. 이른 오전부터 개인 수련에 임하던 니스 루 하노빌은 검을 내팽개치고 연무장 귀퉁이의 나무 그늘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꽤 공기가 싸늘했지만 그의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것이 오로지 훈련 때문이라고만은 그 역시 단언할 수 없었다.
'-레이.'
멍하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수건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어느 날부터 슈베이만과의 접점이 늘어나나 싶더니 갑자기 레이는 성격이 변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평민의 자식이라며 늘 그를 무시하던 니스였지만 그 때의 레이를 마주할 때는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안녀엉, 니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레이가 헤벌쭉 웃는 모습은 꼭 마약에 취한 사람 같았다. 아카데미 때에도 그리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기사단에 입단하고 나서부터도 레이와 니스는 사사건건 티격태격 다투곤 했다. 레이는 늘 니스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졌고 니스는 평민 출신이면서 자신에게 그런 건방진 모습을 보이는 레이에게 늘 시비를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이는 정상이었다. 그의 수수한 외모에 담겼던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함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누군가와 똑 닮아 있었기에-아마 그 누군가에게서 본받은 것일 터였다- 니스는 더더욱 레이를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같이 아카데미를 졸업해 함께 입단한 탓에 방도 같이 사용했고 초기에는 행동을 같이 해야 할 때가 잦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레이가 하노빌 백작과 대공의 명으로 따로 오가는 일이 잦아지고 꽤 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변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소년을 그렇게 만든 건지. 특별 임무를 받았다며 제복을 차려입고 홀로 생활관을 나서는 뒷모습에서 니스는 강렬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뜨고 전해진 소식은 황자의 피습 사건이었다. 루아 이클립스의 신참 단원 레이 베르튼은 목이 날아간 채 발견되었고 황자와 함께 외출했던 아시엘 아르셰인은 빈사의 상태로 황자에게 안겨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니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니스는 아버지를 붙잡고 캐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하노빌 백작은 은근한 웃음만 흘릴 뿐 아들에게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태도에서 니스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대공 슈베이만과 자신의 아버지 하노빌 백작, 그리고 단장인 에피로스 드 헤이타를 둘러싸고 분명히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희미하게 들려온 것이 대공이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였다.
"... 아시엘."
니스는 무심결에 너무나도 싫어하는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한 달 반이 넘도록 사경을 헤매던 그가 다시 눈을 떴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소동을 몰고 다니는 사람 답게, 입단한 직후부터 알게 모르게 아시엘의 이름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이번 일 역시 그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니스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소환 재판은 바로 내일. 루아 이클립스는 대공 슈베이만의 호위 역으로 참석하게 될 터였다. 몇 달 만에 마주할 그 놈의 면상은 어떨지. 골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니스는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어딜 가려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던 아시엘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편한 옷차림으로 까칠발을 들어 조심스럽게 연무장에 들어가려던 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온 건지, 아델레트가 팔짱을 낀 채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아... 헤헤.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치료사 영감님이 그토록 잔소리를 퍼부어대도 정신 차리기는 아직 멀었나봐?"
어떻게든 카이스를 떼어 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델레트의 감시망은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그에게 다가선 아델레트가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자 아시엘이 헤헤,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다운 얼굴에 마음이 약해진 아델레트는 픽 입꼬리를 올리며 말랑한 뺨을 놓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은 잘 잤고?"
"네. 선배는 잘 주무셨어요?"
"그래. 너 적어도 다음주까진 연무장 출입 금지라고 했지? 머리 좋은 네가 그걸 벌써 잊어버렸을 리는 없을 테고 말이야."
그 말에 아시엘은 이히히, 하고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널 누가 말리겠냐. 아델레트는 체념의 한숨을 푹 쉬며 아시엘의 이마를 톡 쳤다.
"절대로 무리하지 마.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니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24시간 붙어서 감시할테니까 말이야."
"네..."
아시엘은 시무룩하게 대답하기가 무섭게 2층에서 아까 간신히 따돌렸던 카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물게도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 아시엘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주춤 뒷걸음질쳤다. 아니나다를까, 카이스가 와락 인상을 구기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시엘, 너! 잠깐 책 좀 가지고 온다고 했잖아."
"헤헤... 그래도 좀 쑤셔서 미치겠는데 어떻게 해."
아시엘이 뾰루퉁하게 대꾸하며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로비의 소파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던 루이카엔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시끄러워서 좋네."
"그건 그래."
맞은편의 케빈이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다. 곁에서 검을 닦던 제르닌 역시 동의했다. 아시엘이 눈을 뜨기 전 무덤처럼 조용하던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 때, 생활관 문을 누군가가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 때를 놓칠세라 화난 카이스와 대치하던 아시엘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다! 카이, 미안!"
그는 뭐라 더 말하려던 카이스를 밀어내고 쪼르르 문가로 달려갔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루이스가 들어오자, 그는 곧장 아버지를 와락 껴안았다.
"아저씨!"
"어이쿠.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운이 넘쳐?"
"한참 혼나는 중이었거든요."
언제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루이스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몸서리치는 루이카엔 대신 아델레트가 대신 답했다. 루이스는 킥킥 웃으면서 아시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래서, 이 사고뭉치 아들아. 내일은 어쩔 생각이야? 살짝 알아보고 왔는데 아무래도 판이 커진 것 같다."
"그래요?"
아시엘이 눈을 반짝이자 그는 쯧 혀를 차고 대충 코트를 벗어 걸친 뒤 소파에 주저 앉았다. 로비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의아하게 그에게 모여들고 루이카엔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판이 커졌다니요."
"그 소환장을 보내자며 주도한 놈들을 좀 찾아 봤거든. 아무래도 슈베이만이 직접 움직인 것 같더군."
"대공 전하... 말씀이십니까?"
루이스의 말에 제르닌이 눈썹을 꿈틀했다. 루이스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놓고 한 일은 아니지만. 중립 귀족 녀석들을 이용한 모양이야."
"며칠동안 생활관에도 안 들리고 뭐 하고 계시나 싶었더니 그거 조사하고 계셨어요?"
"얌마,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다고. 어쨌든 귓구멍 파고 잘 들어라."
아델레트가 픽 웃자 루이스는 짜증스럽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시엘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중간 과정은 대충 생략. 이래저래 찾아오는 귀족들을 만나면서 조금 들쑤셔봤더니 어느 머저리 남작이 미끼를 덥석 물어 주더군. 이번 아시엘이 소환된 회의를 주도한 건 중립파라고 해. 말이 회의지, 거의 소환 재판이지만. 지금 중립 귀족들도 여러가지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니까..."
특히 그 논란의 가운데는 최근 대공이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스캔들보다 아시엘의 혐의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어린 기사가 정말로 황자를 해하려 했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제 목숨을 바쳐 숭고한 희생을 치렀던 건지. 하지만 루이스는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소환 재판을 제안한 건 중립파의 한 귀족이래. 대충 조사해 본 바로는 헤일론 자작이라고 하던데 그 녀석에 대해 잘 아는 자는 찾지 못했어. 어쨌든 결국 중립 귀족들의 수장인 파르베안 후작이 그것을 수용했고 라이펜 쪽과 대공 측의 다른 귀족들에게도 연통을 돌려 동의를 받아냈대. 그래서 라이펜에게 탄원서를 보냈다더군. 소환 재판을 열어 달라고. 그 개자식은 선뜻 응해버렸고."
"그런데 그거랑 대공 전하는 무슨 관계가 있어요?"
"못 들었어? 헤일론 자작이라는 사람이 처음 재판을 제안했다니까."
케빈이 묻는 말에 그가 짜증스레 답했다.
"근데 그 자작이란 놈, 중립 귀족 연합에 이름만 올라가 있지 그다지 정치적으로 활동은 하지 않았어. 그때 소환 재판 건에 대한 회의 이후로도 자취를 감췄어."
"아마 파르베인 후작... 이란 사람이 그 사람의 말에 쉽게 동의한 것도 대공 전하 측이 개입해서 그런 걸 거예요. 마족의 최면술로 의식을 희리게 만들 수 있으니까."
묵묵히 듣기만 하던 아시엘이 끼어들었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어쨌든 그렇게 결정된 뒤로 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비밀로 부쳤다나. 내가 파토낼 게 뻔하니까. 하여튼 기분 나쁜 족속이야... 어쨌든 아시엘."
"네?"
갑자기 그가 자신을 부르자 아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소년의 붉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이 이상 두각을 나타냈다간 더 위험해져."
"네, 조심할게요. 그래도 누명은 벗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볍게 답하며 아시엘이 싱긋 웃었다. 루이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내가-"
"감사하지만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대충 생각해 둔 것도 있고."
아시엘이 그의 말을 막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스륵, 검은 연기가 피어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친 얼굴의 레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시엘의 고운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자, 그럼. 표면상 제일 한가해서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그의 은근한 눈빛이 기사들을 쭉 훑었다.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던 그들은 이내 한 가지를 깨닫고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았다.
"..나?"
케빈은 얼떨떨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물론 겉으로는 근신 중이라 대외 활동량이 적은 것은 그였지만 어째 드는 것은 불길한 예감 뿐. 그 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진듯 아시엘이 쾌활하게 말했다.
"정답!"
//
잠깐 공지가 있겠습니다!!
1월달부터 드디어!! 성년이 되는 기념으로(?) 네이버 미리보기 서비스를 이용해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비축분 쌓기를 위해 12월부터 연재 패턴이 이전처럼 돌아갈 예정입니다!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면 업데이트는 월, 목 오전 8시반에 이뤄집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블로그에서 소장본 주문 중입니다/ㅂ\♡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