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4. 소환 재판 (1)
"뭐,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지레 겁을 먹은 케빈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아시엘의 흉흉한 기세에(사실은 방긋 웃고 있을 뿐이지만) 레키아의 갑작스러운 등장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째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레키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어디선가 가져온 양피지를 아시엘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부탁했던 것."
"고마워요. 앞으로도 종종 부탁할게요."
"아니, 되도록이면 이런 건 안 시켰으면 좋겠는데요."
"그리고 확실히 얼굴도 보고 왔죠?"
"네, 네."
둘 사이에 이어지는 일련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기사들은 눈만 꿈뻑였다. 뒤늦게 그 시선들을 눈치챈 건지 아시엘이 다시 선배들을 마주보았다.
"그냥... 별 거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날조에는 날조로 맞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루이카엔이 미심쩍게 물었다. 솔직히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아시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터라,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그 때 습격받은 날 그 곳에 있던 암살자 전원을 제가 죽였다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조력자가 있었다고 거짓말을 할 거예요."
"조력자?"
잠깐 뜸을 들이던 아시엘이 한 말에 제르닌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시엘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때 선배들은 전부 생활관에 계셨을 테니까 조력자는 될 수 없죠. 아저씨는 너무 눈에 띄고. 그래서 선택한 게 레키아 씨에요."
"뭐?"
일순 모두의 시선에 레키아에게로 쏠렸다. 마찬가지로 전혀 전해 들은 바가 없던 레키아마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네, 당신요. 마침 셀레니스 기사단에 합류하려 생활관에 왔던 레키아 노스티어는 몬스터들과 싸우던 선배들 대신 우연히 황자 전하가 보낸 구조 요청을 듣고 저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는 뻔한 스토리죠."
"잠깐, 잠깐만 아시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델레트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넌 저 남자를 신뢰할 수 있어? 그리고 신뢰한다고 해도 황성 입구는 언제나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저렇게 눈에 띄는 녀석을 아무도 못 봤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그래서 케빈 선배가 필요한 거예요."
아시엘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케빈이 움찔했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레키아 씨에게 밤에 황성 경비대에 침입해서 그 날 그 시간에 보초를 서던 경비대원 한 명의 얼굴을 보고 오라고 시켰어요. 기왕이면 선배랑 비슷한 체격의 사람으로."
"... 얼굴을 봐서 어쩔 건데?"
"내 마법으로 선배의 얼굴을 바꿀 거야."
카이스가 묻는말에 아시엘이 간단히 답했다. 아. 모두의 입에서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뭔가가 튀어 나왔다. 확실히 무리수가 있지만 이 방법이 제일 확실한 것은 사실이었다. 케빈을 대역으로 세워 증언을 하게 만든다니. 하지만 루이카엔이 마뜩찮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진 않은데. 무엇보다 그 경비대원은 어쩌려고?"
"유트, 그러니까 황자님한테 부탁해서 오늘부로 수도 외곽 경비대 쪽에 파견을 보냈어요.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물론 그쪽의 경비대장으로 있는 누구누구에게도 따로 언질을 넣을 참이었다. 인맥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거지, 암.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이 예정된 사람들 중에 저보다 서클이 높은 마법사도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마법이 들킬 일은 없어요."
"... 이... 징글맞게 꼼꼼한 녀석."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을 하던 루이카엔이 결국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속의 말을 툭 내뱉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매끄러운 계획 덕분에 트집잡을 곳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아. 루이스는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어. 아델레트의 말대로 우린 아직 저 남자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하지 못했어. 아시엘이 믿는다니 일단 납득하겠지만."
"흠. 확실히 그래요."
아시엘은 선뜻 대답하고는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레키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반쯤 포기하고 멍하니 하늘만 응시하던 마족이 움찔했다.
"왜, 왜요?"
"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배신 서사는 너무 재미 없죠. 백 년 넘게 살았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알 텐데."
금가루를 뿌린 것 같은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심각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어린애 같았다. 동그란 얼굴과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더욱 그랬다. 얼떨떨해진 레키아가 아무 답도 내놓지 못하고 멍청히 바라만 보자 이내 아시엘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뒤통수 칠 계획 있어요?"
"네?"
"그럼 미리미리 말해요. 슌 선배처럼 혼자서 낑낑대는 건 보기 싫으니까. 하지만 그 긴 세월동안 동족과 일말의 접촉 없이 살아온 당신이 지금 와서 새삼 동족애를 불태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어차피 유희거리 정도 아니에요?"
그제야 아시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레키아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의 입술이 슬쩍 곡선을 그렸다.
"... 걱정 말아요.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딱히 유희거리로 쯤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대요."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기사들을 쭉 둘러 보았다. 그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이 가진 기묘한 설득력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루이스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꾸르륵. 에니르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루이카엔의 손에 부리를 문질러 왔다. 루이카엔은 픽 웃으며 그의 턱을 간질간질 쓰다듬어 주었다.
"복잡한 표정이로군. 젊은 애가 벌써부터 죽상하는 거 아냐."
"남말하지 마세요. 저보다 경이 더 우울한 얼굴이십니다."
그가 불퉁하게 대꾸하자 루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굳이 부정하는 대신 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런게 이상한거지.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쪼그만 녀석이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요."
루이카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렇게 두면 안 되겠다고 깨달았을 뿐이지."
"글쎄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구구절절 다 옳은 소리만 하고 있는데 마음에 안들지, 역시. 젊었을 땐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탄식처럼 흘리며 루이스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몸을 푹 기댔다. 결국 자기 할 말만 다 해 버리고 반박조차 하지 못하도록,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어른들을 마음껏 주물러 버린 꼬맹이는 어이없을 정도로 당당한 태도로 유트리안에게 간다며 외출해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루이스는 팔로 눈을 가렸다.
"물어볼 게 많은데."
"그러게요."
루이카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레키아가 찾아왔을 때 아시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던 말들이 새삼 떠올랐다.
"... 어머니. 란 사람이 실험체였다고 했죠. 경은 알고 계셨습니까."
"그럴 리가. 난 그 녀석이 길거리에서 얼어 죽으려는걸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야."
뜸을 들이던 그가 간신히 이때까지 일부러 억눌러 오던 말을 꺼냈다. 루이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 안에는 온갖 감정들과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왜 그렇게 태연한 걸까.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을때도 모두 죽이지 않고 생포해 낸 아시엘이었다. 그때는 서툴다며 타박을 놓았지만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적이라도 처음으로 사람을 벤 감각은 오랫동안 잊기 힘든 것이었다.
"답답하군."
"이제부터라도 신경 쓰면 되는 겁니다. 위험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요. 어디의 누구에서 태어났건 아시엘은 아시엘이니까."
레이. 루이카엔의 말을 흘려 들으며 루이스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나오는 답은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막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시엘도. 느낀 게 있나 보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케빈이 조금 안됐긴 했지만... 아시엘이 완전히 앞에 나서지 않기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케빈 놈도 강심장이니 그 정도 일이야 별로 무리가 아니죠."
무슨 거창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루이카엔은 뒷말을 꿀꺽 삼키고 대신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그 녀석 판단력 하나는 정말 무시무시하니까. 일단은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착실하게 흘렀다. 잠들어 있던 시간이 일순간 정신을 차리고 후닥닥 달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또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고, 다음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