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83화 (28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6. 소환 재판 (3)

같은 말을 해도 저렇게 얄밉게 쏘아 대는 것은 거의 재능에 가까웠다. 거기에다 저렇게 반박할 수도 없도록 아픈 곳만 콕콕 찔러대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하는 사람은 환장할 노릇이지만 솔직히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시엘은 바들바들 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콘로드 자작을 보며 히힝, 천진하게 웃었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밉살스러운 미소는 없을 거라 생각하며 유트리안은 예쁜 얼굴을 그런 데다 쓰지 말라고 외치고 싶어진 것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내 콘로드 자작이 창백해진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나를 능멸하는 것이오! 언동을 자제해 주시오!"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바로 얼마 전, 그러니까 황자 전하가 정계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덮어놓고 무시하던 이들은 어디의 누구셨지요?"

흠, 어흠. 곳곳에서 헛기침이 터져나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유트리안 역시 미간을 구겼다.

"분명히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을 터입니다. 구한 것은 저고, 습격한 쪽이 레이 베르튼 경이라고. 하지만 황자님의 증언을 무시하고 이런 자리까지 만드신 여러분의 뜻은 그리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아요."

"언동을 삼가하라 했지 않소!"

자작이 다시 호통을 치자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마저도 굴복하거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네가 시끄러우니 내가 다물어 줄게, 라고 하는 것 같아 자작은 속이 뒤집어질수밖에 없었다. 그 때 잠자코 있던 파슬렌 공작이 나섰다.

"자작, 진정하시게. 자네야말로 이런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고 있지 않은가. 아시엘 군, 경도 조금은 자제해 주고."

"송구합니다."

아시엘은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공작의 말에 더 이상 화를 내지도 못하게 된 자작은 시뻘개진 얼굴로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 때 다른 이가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아시엘 아르셰인 경. 지금 경의 언동은 이 자리의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 그리고 황자 전하께서 모두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여 주게. 경솔한 행동으로 경을 칠 수도 있네만. 루이스 경과 유트리안 황자 전하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이 자리엔 다른 귀족들이 있다는 걸 명심하게. 자네는 일개 기사일 뿐이니."

"- 분명 아리스토 남작님이셨던가요. 분명 사업을 크게 일으켜서 성공시키셨다던."

잠깐 기억을 더듬던 아시엘이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리스토 남작가, 대공에게 자금을 대 주고 있는 상인 출신의 귀족으로 그는 이그니스 교단과 마약을 거래한 내역이 있었다. 남작은 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장자의 말은 듣는 것이 좋지. 아직 어린 터라 쉽게 기고만장해질수도 있지만 이 곳은 황궁이네. 철없는 짓은 삼가게. 냉혹한 현실이지만 자네는 귀족도 아니지 않는가."

"예, 말씀 감사합니다. 아리스토 남작께서는 5년 전에 크게 벌어들인 돈으로 작위를 '얻었다고' 하셨지요?"

다시금 넓은 홀이 싸늘해졌다. 아리스토 남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보시오, 경!"

"아. 혹시 제가 또 말실수를 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연장자이신 '귀족' 아리스토 남작님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실거라 믿습니다."

"뒷배를 믿고 이리 경거망동 하는 거라면 언젠가 크게 후회하게 될 거다!"

이제 존칭마저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남작이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시엘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뒷배라고 하실 것까지야 있습니까.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걸요."

절묘하게 꼰 말이었지만 직역해보자면  결국 "그래서 어쩌라고."였다. 내 양아버지가 루이스 아르셰인이고 황자랑 친구 먹은 사이인데 뭐 꼽냐, 그의 붉은 눈동자는 웃음기와 함께 그런 말을 선명하게 담고 있었다. 그리고 젊다고 해도 아리스토 남작 역시 정치판에서 몇 년이나 굴러먹은 몸이니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분노를 삭히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듣다 못한 다른 이가 나섰다.

"황자 전하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네만. 처음부터 전하의 배경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혐의는 충분하지. 그런 주제에 황자님과의 친분을 이용하려 들다니 불경하군. 게다가 전하께도 매번 무례를 저지르고 있지 않는가!"

"그리 달가운 사이는 아니라 부정은 못하겠네요. 그래도 전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하게 굴지, 여러분처럼 상황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진 않아요. 불경으로 말하자면 전 이곳에서는 고개를 들지도 못할 수준이죠."

가공할 만 한 뻔뻔함에 그 남자와 아리스토 남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차마 제지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귀족들이 아연해져 있는 그때 잠자코 있던 유트리안이 툭 뱉었다.

"하긴. 365일 짜증나는 저 녀석 쪽이 훨씬 나을지도. 속이 뒤집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못 먹을거 삼킨 것처럼 느글거리진 않으니까."

"전하!"

"애초에 저 녀석을 불러다 이 자리에 세워 둔 것도 내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저 녀석을 어떻게든 이용해보고 싶은 거잖아?"

아리스토 남작이 기겁해 외쳤지만 유트리안은 무시하고 줄줄 말을 이어갔다. 사람 만든 보람이 있다니까? 아시엘이 뿌듯한 시선을 보내자 유트리안은 켁, 하고 눈을 피해버렸다. 이제 루이카엔과 루이스는 반 포기한 심정이 되어 구경꾼이라도 된 양 상황이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특히 루이스는 아시엘이 대놓고 우리 아저씨가 루이스 아르셰인인데 뭐 어쩔테냐, 란 기세로 마구 몰아치고 있으니 입을 벙긋할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어떻게 귀족들을 꿰고 있는 거야?"

"설마..."

아델레트가 어이없이 속삭이자 루이카엔은 한 가지 짚이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요 며칠동안 계속 황자궁을 드나들더니 방에서 룰루랄라 신나서 뭔가를 열심히 정리하던 그것. 그는 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석할 만한 귀족들의 약점을 파악해 둔건가..."

소환장이 도착했던 날 묘하게 신이 나서 바로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간다며 나갔던 순간부터 아시엘은 깽판을 놓으려 잔뜩 벼르고 있던 것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듯 기사단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남작은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다른 귀족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 있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끙 소리를 냈다. 아시엘이 한 말에 거짓은 없었고 확실히 그에게 말려들어 추태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렇게 남작마저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버리자 슈베이만이 흥미롭게 웃으며 턱을 쓸었다.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의 시선은 줄곧 아시엘에게만 꽂혀 있었다. 다시금 회장이 고요해지자 이내 하노빌 백작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뭔가."

"더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저는 황자님을 모시고 황성 밖으로 나갔고 습격을 받았습니다. 암살자들에게 쫒겨간 곳에 있었던 것은 레이 베르튼 경이고."

"그럼 범인은 자네 손에 죽은 베르튼 경이라고 주장하는 셈인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 둘은 꽤 각별한 사이였다고 들었는데."

백작은 느긋하게 자신의 손등을 쓸며 넌지시 말했다. 무심하게 그를 응시하던 아시엘이 툭 내뱉었다.

"그거랑 지금 상황은 그다지 관계 없죠."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칭찬은 감사드립니다."

아시엘은 고개만 까닥했다. 삐딱한 어조였지만 백작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듯 했다.

"아시엘 경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경 역시 그 자리의 암살자 모두를 처치할 만 한 능력은 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신은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는데 그걸 모두 자신의 손으로 했다 말할 겁니까. 레이 베르튼 경을 포함하여 필요 이상의 잔인한 손속이었다는 점은 경 역시 잘 알고 계실 테지요."

"물론 혼자였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마침 때맞춰 원군이 와 주었습니다."

드디어 대본대로 흐름이 이어지기 시작하자 루이스와 기사들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더 이상 저 입이 무시무시한 말들을 쏟아낼 기회는 없을 테니. 다른 한 귀족이 의아하게 물었다.

"원군이요? 하지만 그 때 셀레니스 기사단은 생활관에 갑작스레 습격한 몬스터들로 움직일 수 없었다 들었습니다. 그 역시 암살자의 소행이었을테죠."

"네. 하지만 여러분들도 들으셨을 거예요. 얼마 전 지방에서 셀레니스 기사단에 충원 인원으로 들어온 레키아 노스티어 경에 대해서. 그가 생활관에 도착한 것은 두 달전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경황이 없어 이제야 정식으로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됐지만요. 레키아 경이 도우러 오지 않았다면 저와 전하는 꼼짝없이 목숨을 잃었을 테죠."

느닷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순간 회의장이 크게 술렁였다. 상황을 지켜만 보던 슈베이만이 쿡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이런 때라지만 너무 무리수를 던지는 게 아닌가, 경."

"글쎄요. 애초에 저를 범인으로 지목하신 것부터가 무리수가 아니었던가요."

언젠가 대전회의때와 다르지 않게, 아시엘은 붉은 눈을 반짝이며 대공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슈베이만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작이 느긋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걸 증명할 수 있겠나? 당시 레키아 노스티어란 사람이 경을 도우러 갔다는 사실을."

"네. 물론이죠. 사실 저도 누명을 벗기 위해 여러모로 조사를 해 본 참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 우연히 레키아 경이 급하게 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봤다던 경비병을 찾을 수 있었어요. 혹시 이 곳으로 청해도 되겠습니까, 폐하?"

자신에게 날아든 화살에 라이펜은 웃음을 삼켰다. 거짓말인 걸 뻔히 알고 있을 자신에게 저런 말을 던진다는 것은 입 다물고 편이나 들라는 것과 같았다. 매번 생각하지만 웃기기만 했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뻔뻔함과 박력이 나오는 건지.

"허락한다."

이 정도면 맛보기지. 몸 풀기로 두 귀족의 복장을 마음껏 뒤집은 뒤에 드디어 제 2차전 돌입이었다.

/소장본 주문이 마감되었습니다! 추가 주문은 9일까지에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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