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86화 (28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9. 매와 사자와 사냥개 (2)

카이스가 슌의 침대에서 잠이 드는 것을 본 뒤 아시엘 역시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을 청했지만 그 날 밤의 끝은 역시 악몽이었다.

제법 익숙하지만 절대 적응되지 않는, 마치 바닥이 꺼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막 시계가 기상 시간의 5분 전을 가리키는 참이었다.

식은땀으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 낼 엄두도 차마 내지 못하고 아시엘은 숨을 몰아쉬며 눈가를 짚었다.

슬쩍 옆의 침대로 곁눈질을 하자 여전히 푹 잠들어 있는 카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안 깼구나. 그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만큼은 친구의 잠귀가 어두운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

꿈 속의 풍경은 과거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조각조각 널린 시체 조각들. 바닥에는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웅덩이를 이룬다. 하지만 그때와 조금 다른 점.

타오르는 목조 건물의 매캐한 연기로 물들지 않일 대신 검은 밤하늘에는 총총 시린 별이 박혀 있었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은 저주스러운 붉은 빛을 내며 야트막한 동산을 비췄다. 그리고 묘하게 뜨거운 액체가 손 안에 고여 있는 것을 깨달으면 언제나 함께 하는 금빛 레이피어의 도신이 피에 번들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참상을 만들어 낸 것은 자신이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건 예전의 환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기분을 그에게 선사했다. 피에 젖은 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고 몸에 힘이 풀리려 할 때 그가 나타났다.

레이. 눈을 짚은 아시엘의 손이 다시 파르르 떨렸다. 싫다고, 차라리 내가 저 녀석에게 죽겠다고 그렇게 외쳐도 소용 없었다. 무언가에 홀리듯 검은 올라가고 레이는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히죽 웃는다.

친구의 목을 베어내는 감각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시엘은 온몸에 오싹 소름이 끼쳐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으스스 오한이 들어 그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려다 이내 고개를 세게 털어냈다.

"미치겠네."

어째 이 악몽은 지난번보다 더욱 떨쳐내기 힘들 것 같은 예감에 아시엘은 실실 헛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내려가자, 한심한 꼴로 뒹구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나을 터였다.

"야,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어디 아파?"

"네?"

오스카의 목소리에 아시엘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얼빠진 얼굴에 어깨를 으쓱한 오스카는 눈짓으로 아시엘이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아시엘은 의아하게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고 이내 자신이 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 그러니까... 새로운 취미에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아시엘은 머쓱하게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오스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왠 헛소리야. 괜찮은거 맞아?"

"완전 엄청엄청 멀쩡해요. 우와 기분 너무 좋다."

"영혼이 없잖아, 영혼이."

오스카가 어이없이 대꾸했지만 그는 못 들은척 했다.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루이카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네들 뭐 하는 거야. 아시엘은 정신 좀 챙겨. 심심하냐? 카이스는 일 나갔으니까 한가할 황자님이라도 잡아다 줘?"

"정신 사나워지니까 사양할게요. 별로 한가한 사람도 아닐 테고."

"호위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심정 이해는 간다만."

자신의 검을 닦는데 열중하던 아델레트가 끼어들었다. 제르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쨌든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꿈 때문에 머리 한쪽이 꾸욱 눌린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느긋한 분위기 덕분에 기분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얼씨구. 이젠 졸고 있냐?"

-게다가 긴장이 풀어지니 슬슬 졸음도 몰려오고 있었고. 케빈이 헛웃음을 터뜨리자 아시엘은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부릅떴다. 뱀의 목을 살살 긁어 주며 케빈이 말했다.

"피곤해 죽겠으면 그냥 들어가서 자던가."

"안 졸려요."

"웃기시네. 거울이나 보고 말해. 햇볕에 내 놓은 고양이마냥 꾸벅거리고 있었으면서. 어어, 또 존다."

케빈이 킥킥 웃었지만 아시엘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당하기가 어려운듯 했다. 의지와 상관 없이 눈이 감기고 다시 몸이 기우뚱하려는 찰나 갑자기 그가 눈을 반짝 떴다.

"엥?"

케빈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 역시 의아한 소리를 냈다. 다시 눈이 말똥해진 아시엘은 상체를 세우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얼떨떨해하면서도 오스카가 달려가 문을 열어 주자, 그곳에는 한 번 본 적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라. 그러니까-"

"헤일론 자작입니다. 아침부터 실례지만 아시엘 아르셰인 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가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하자 남자는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쪼르르 달려나간 아시엘이 오스카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자작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회의때 경의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서 말입니다. 잠깐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져서요.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지."

그의 미소가 드리워진 얼굴이 묘하게 기분이 나빠 오스카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케빈 역시 인상을 구기고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엉? 할 얘기라면 여기서 하십-"

"그럼 잠깐 같이 나갈까요? 자작님."

하지만 그런 으름장도 무색하게 아시엘이 그를 옆으로 밀어내며 생긋 웃었다. 헤일론 자작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나다. 그럼 경들께는 죄송하지만 잠시 아시엘 경을 빌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뭐?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불평을 터뜨리려는 오스카의 입을 막아 버린 아시엘은 곧장 자작을 따라 생활관을 나가버렸다. 쿵. 문이 육중하게 닫혀버리고 현관에 덩그러니 남겨진 케빈과 오스카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해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저 녀석 뭐야? 아침부터 영문을 모르겠네."

"그 녀석이란 사람이 아시엘이라면 동감이다."

"자작이란 놈이라도 동감."

케빈의 말에 오스카와 제르닌이 맞장구쳤다. 루이카엔이 닫힌 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것 치곤 별거 없어 보이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닌데. 헤일론 자작."

"아마 그 감이 맞을 거예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루이카엔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우와악! 깜짝이야! 불쑥불쑥 나타나지 말란 말이야, 당신!"

"감이 좋네요, 루이카엔 씨는. 뭐, 당신 정도쯤 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레키아는 신경쓰지 않고 유유자적 말을 이었다. 진정하지 못하는 루이카엔 대신 제르닌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에요. 여러분이 감이 좋다는. 더 이상은 비밀."

레키아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의 오렌지색 눈동자에 떠오른 장난기는 기사들을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더 캐물어도 그에게서 얻어낼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결국 그들은 언제나처럼 답답한 한숨을 내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있다고 이야기한것 치곤 헤일론 자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아시엘 역시 입을 다문 채 그의 뒤를 졸졸 따르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다다랐을 때쯤 아시엘이 먼저 운을 뗐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니요? 어제도 저와 이야기 나누셨지 않습니까."

자작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만들어낸 듯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시엘은 픽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제는 인사할 겨를이 못 됐으니까. 아니면 설마 내가 눈치 못 챘을거라고 생각했어요?"

"흐음-"

우뚝, 헤일론 자작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시엘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잠깐 고민하는 눈치이던 자작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제법 눈치가 빨라졌네. 파티장에서는 기척만 간신히 잡아냈던 주제에."

"누구 덕분이겠어요."

"미리 말해두자면 그 습격 사건은 내 짓 아니다?"

갈색의 짧은 머리에 물들듯 검은색이 번지더니 이내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라났다. 단정하던 정복은 간편한 셔츠와 조끼 차림으로 변했다. 흐트러진 긴 흑발을 쓸어 올린 남자는 힐끗 아시엘 쪽으로 고개를 비틀고 웃었다. 더 이상 헤일론 자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운 얼굴은 아시엘도 익히 아는 자의 것이었다.

남자, 아울은 몸을 빙글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개구쟁이 소년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녕, 소년. 네 말마따나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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