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70. 매와 사자와 사냥개 (3)
"그나저나 그다지 위화감은 없었을 텐데 잘도 눈치챘네. 재미없게. 설마 그 퇴물이 가르쳐줬나?"
아울은 긴 흑발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며 투덜거렸다. 퇴물- 아시엘은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리다 이내 조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그 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정돈 알 수 있어요. 아니지, 알 수 있게 됐다고 해야 하나. 이제 이상한 마력이 느껴진다 정도로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감지되는걸요. 마력을 억누르고 모습의 바꾼 당신한테서도."
"어이쿠. 태어난지 1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진보를 보이는군. 이거 기쁜 소식인데. 이걸로 마족에 한 발짝 가까워졌어."
"누구 덕분이겠어요."
진심으로 기쁘게 눈웃음을 짓는 아울에게 아시엘이 차갑게 대꾸했다. 아울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좀 더 기뻐해주면 덧나? 다들 일이 착착 진행되는데 나만 뭔가 시도하는 족족 실패하고 있다고. 누구 때문에."
"그거 잘됐네요."
"하여튼 귀염성 없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려 성큼, 아시엘에게 바짝 붙어 섰다. 아시엘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자 아울은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역시 소문대로 간이 큰 건가. 이대로 널 죽일 수도 있는데도 내가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냉큼 따라나선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 뜻이랄 게 있나요."
잠깐 뜸을 들이다 그렇게 대꾸하며, 아시엘은 발치를 힐끗 곁눈질했다. 나무 그림자로부터 뻗어 나온 검은 줄기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의 발목을 휘감아 오르고 있었다. 무심하게 그것을 응시하던 아시엘은 다시 시선을 올려 아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이 아시엘의 목을 감아 쥐고 있었다. 칠흑의 눈에 얼핏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직접 몸으로 겪었잖아. 바로 얼마 전 우리는 널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렇게 너만 불러낸 내가 아무도 모르게 널 죽여버리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쯤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만 죽이지 않을 거잖아요?"
아시엘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엥. 그 태평한 얼굴에 아울은 의아한 소리를 냈다. 아시엘은 뻔뻔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죽일 거라면 이런 식으로 끌고 나오지도 않았겠죠. 죽일 방법이야 얼마든지 많잖아요. 굳이 위장한 얼굴을 적에게 다 보여주는 손해되는 짓을 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굳이 직접 마중을 온 이유는 조금 궁금한데."
"재미 없는 꼬맹이."
아울은 투덜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아시엘의 다리를 슬슬 휘감고 있던 그림자도 어느새 사라졌다.
"네 말대로, 오늘 네게 볼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내가 굳이 찾아간 건 그 퇴물의 면상을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해두지."
"퇴물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젊은 얼굴인데요. 그나저나 동족이 적의 편에 붙었는데 생각보다 시시한 반응이네요. 퇴물 운운하는 걸 보니 원래 아는 사이 같던데."
"동족?"
그는 코웃음을 쳤다. 아아, 말실수였나. 아시엘은 애매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레키아 역시 이 땅에 있는 동족들에게 그리 호의를 보이지 않았으니. 호의는 커녕 그가 마족들에게 품고 있는 것은 차가운 조소에 가까웠다. 아울은 어깨를 으쓱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어쨌든 가자, 난 마중역일 뿐이고. 널 보고싶어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시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의 목적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 대공전. 이윽고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그 곳의 정문 앞에 시립한 한 남자가 아시엘의 시야에 들어왔다. 화려하지만 단정한 붉은 제복. 낯익은 실루엣.
어라.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발걸음은 착실하게 옮겨져서 이내 그는 루아 이클립스의 기사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이 히죽 웃으며 그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니스 군, 아시엘 군을 슈베이만에게 데려다 줘."
"... 네."
정중하게 답한 니스는 아시엘에게 고갯짓했다. 잠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아시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울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오늘 네게 볼일이 있는건 내가 아니라고 이미 말했을 텐데."
아울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아시엘이 잠시 망설이자 니스가 그를 재촉했다.
"뭐 해, 대공 전하가 기다리신다."
"아..."
그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니스를 따라 나섰다.두 사람이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아울은 이내 빙글 돌아서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그는 검은 연기만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스륵 사라져 버렸다.
니스와 아시엘은 본성보다 조금 규모가 작지만 비슷하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아시엘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싸움 할 기분이 아닌가 봐?"
"대공전하를 뵈러 가는 길이다. 네놈 때문에 소란을 피울 수는 없어."
"호오, 어른스러워졌네."
아시엘이 장난스럽게 감탄사를 터뜨리자 니스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뿐, 니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데만 집중했다. 아시엘 역시 굳이 더 말을 걸지 않고 주변 경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궁으로 발을 들이자 곧장 호사스러운 응접실과 복도가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본궁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에 아시엘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역시 형제라고 해야하나. 닮았어."
"그렇지. 두 분은."
의외로 담담한 답이 돌아오자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니스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보인 채 한없이 걷고만 있었다. 아시엘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렸지만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잠시 후 도착한 대공의 집무실은 거대한 오동나무 문으로 막혀 있었다. 화려한 사자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입구만은 본성 라이펜의 거처와 큰 차이를 보였다.
"들어가."
니스가 냉정하게 말하자 아시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