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275화 (275/391)

275화

천휘와 소광패가 대치한 혈우검가의 장원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

격전으로 인해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차오른 장원과 달리 눈이 덮인 언덕에는 차가운 적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고요함 속 기척들이 나타났다.

총 네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온 세상을 점령한 새하얀 눈과 대비되는 새까만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놀라운 기세로다.”

일행 중 가장 왼편에 있던 노파가 한 걸음 내디디고는 혈우검가를 내려다보며, 속닥였다.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이곳과 혈우검가와의 거리는 약 백 여장.

여간해선 기세를 느끼기 힘든 거리였기 때문이다.

“흑과 적이 어우러진 도복…….”

쩍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아해가 매화신협인가.”

금빛의 화려한 용이 수놓아진 옷을 걸친 중년인의 눈이 광망을 토했다.

그는 장원의 중앙.

그곳에 있는 천휘를 두 눈에 담기 바빴다.

그때였다.

“두 분께서는 저 매화신협을 어떻게 보십니까?”

소름 끼치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듣는 순간, 오한이 올라오는 듯했다.

노파와 중년인이 뒤를 돌아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색으로 무장한 이를 향해서였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인물의 모습은 참으로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푹 눌러쓴 피풍의에, 두꺼운 검정의 무복은 길이가 상당해서, 그자의 몸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일부라도 드러내기 싫어한다는 게 확 느껴질 정도였다.

“필사(必死)!”

중년인이 힘을 주며, 답했다.

이 거리를 격하며 느껴진 존재감.

그것은 저 어린 나이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치고는 지나치게 높았다.

“훗날 본 련에겐 위험한 적이 될 것이오. 아니, 지금도……!”

그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의념이 절로 일어난 것이었다.

섬뜩한 살기에 산세가 떨었다.

하나 그 주변에 서 있는 셋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여 호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루한 노파의 의견을 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소주(少主)가 의견을 내 주면, 따를 뿐이라네.”

노파가 겸양하며 말했다.

만약 노파의 정체를 아는 이들이 봤다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봤을 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성휘나찰사(星輝羅刹斯) 여운약(麗芸葯).

사흑련의 호법으로 과거 운남을 피바다로 만든 노괴였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여운약의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돌려, 계속 옆에서 자신을 보좌해 온 여인에게도 물어봤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전의 두 사람을 대할 때와 다르게 편한 어투.

여인은 그러한 물음에 봄날의 꽃처럼 산뜻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저 또한 소주의 의견을 따를 생각입니다.”

“아니, 네 의견을 듣고 싶어.”

이어지는 추궁에 여인은 웃음을 싹 지우며, 싸늘한 표정을 내비쳤다.

“죽여야 합니다. 저자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훗날 소주의 앞길을 방해할 겁니다.”

“앞길을 방해한다라…….”

여인의 대답에 그는 고갤 돌렸다.

그리고 발을 내디뎠다.

사박.

그의 검은 가죽신이 새하얀 눈발을 밟는 순간, 주변의 눈이 녹아 갔다.

이어서 걸어가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서 반경 삼 장에 있던 눈이 녹으며 황폐한 황토색의 땅이 드러났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조화였다.

내공을 끌어올린 것도, 기세를 퍼트린 것도 아닌 단순한 걸음.

하지만 그것으로 땅은 변해 갔다.

마치 죽어 가는 것처럼.

이내 그가 언덕의 끝에 섰다.

동시에 하단전 깊숙이 잠들어 있던 내공을 자극해서, 일깨웠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오감(五感).

새하얀 언덕 밑 혈우검가에서 새어 나오는 장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짙은 혈향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였다.

비릿하고, 시끄러웠다.

하나 묘하게 심신이 안정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혈우검가를 지그시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매화신협.”

그가 눈에 담긴 자의 별호를 읊었다.

소름 끼치는 그 음성은 마치 먼지가 낀 것처럼 흐릿했고, 단숨에 사라져 갔다.

동시에 그의 긴 의복 밑단이 흔들렸다.

절로 발현된 공력의 파동에 발밑에서부터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가까이 가서 봐야겠어.”

불현듯 피풍의 속 가려져 있던 그의 눈에서 시퍼런 광망이 토해졌다.

* * *

천휘는 소광패를 훑어봤다.

새하얀 백발과 백미를 지닌 것치고 그것을 제외한 소광패의 외모는 상당히 젊었다.

많이 쳐줘 봐야, 겨우 삼십 중반?

하나 그것은 겉모습뿐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그의 나이는 환갑.

지고한 공력으로 육체의 나이를 늦추는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소광패의 높은 경지를 증명하듯 그를 중심으로 퍼지는 기파에 공간이 군데군데 일그러져, 그 형체를 잃고 있었다.

거기에 근육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언제든 출수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자세.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광패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천휘와 간격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암만 기다려도 먼저 올 것 같지는 않고, 결국 내가 가야겠네.”

천휘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가죽신 끝부분이 쌓인 눈을 살포시 짓누른다 싶은 순간.

쐐액!

천휘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강렬한 바람이 뒤늦게 몰아쳤다.

삽시간에 소광패의 지척까지 도달한 천휘가 공중에서 화월을 뽑았다.

스륵―

보기 좋은 붉은 광채가 반짝이는 화월의 검신이 세상에 드러났다.

동시에 무채색의 기운이 실타래처럼 흘러나와 화월을 감쌌다.

화아악!

천휘는 그대로 전방을 향해서 화월을 휘둘렀고, 허리춤까지 들렸던 화월이 속도에 박차를 가하며 단숨에 그어졌다.

체공 상태에 휘둘러진 일검.

찰나에 날아든 쾌검은 대기를 일그러트리며, 공간을 사선으로 갈랐다.

가히 섬전이라 칭할 수 있었다.

눈 깜빡할 시간도 두지 않고 다가온 쾌검에 소광패는 눈을 부릅떴다.

압도적인 속도와 강렬한 기세.

항거불능(抗拒不能)의 검이었다.

도저히 맞설 요량이 없었다.

‘피해야 한다!’

소광패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렀다.

그리고 그 순간.

스걱!

그의 머리카락을 자른 검파가 장원의 뒤편에 있는 담벼락에 부딪혔다.

콰아아앙!

지축이 크게 흔들렸다.

포탄에 맞은 듯 강렬한 여파였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

숨 막히는 정적이 장원을 덮쳤다.

장원 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전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모두가 넋을 놓고, 담벼락을 봤다.

무너진 담벼락에서는 뿌연 먼지와 함께 작은 돌멩이들이 휘몰아쳤다.

“……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사람이 저런 짓을 벌인다고?”

“저런 무위였다니……!”

그들의 눈에서 충격이 묻어 나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로 경악스러운 일검의 결과인 것이다.

한편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천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의외인 걸?”

그저 의복에 흙을 묻힌 소광패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려타곤을 펼칠 줄이야.”

천휘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보통 일가의 가주라고 하면 체면을 중시하기 마련이었다.

한데 사파이기 때문일까.

그는 무인들이라면 목숨을 바친 것보다 펼치기 싫어하는 나려타곤을 펼쳤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는 살았다.

“……이, 이럴 수가.”

소광패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충격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 차리지?”

어느새 다가온 천휘가 그의 앞에서 능글맞은 웃음을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소광패는 어느새 면전에 다가온 검신에 화들짝 놀라며, 마주 검을 들었다.

쩌어엉!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둘이 부딪치며 발생한 경파에 공기가 일그러지고, 그 사이로 불꽃이 튀길 잠시.

촤아악!

충격에 소광패의 몸이 밀려났다.

한 치가량이 박힌 그의 발바닥이 밀리며, 지나간 바닥에 긴 흔적을 남겼다.

검에 담긴 발경의 후폭풍이었다.

“큭!”

강렬한 충격에 이를 꽉 문 소광패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일순간 속이 울렁거리고, 비릿한 피 내음이 입안을 감돌기 시작했다.

아마 내상을 당한 듯했다.

소광패가 검파를 꽉 쥐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검파에서 전해진 열기가 그의 정신을 달구었다.

이내 그가 내공을 끌어 올렸다.

혈검결의 공력이 단숨에 그의 몸을 이끌었고, 그의 전신을 회전해 갔다.

찰나의 간극에 벌어진 대주천.

피가 들끓으며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암향표를 펼치며 다시 검을 휘두르려던 천휘는 갑자기 아른거리며 나타난 연기에 안광을 빛냈다.

‘일합의 승부를 노리려고?’

소광패의 의중을 파악한 천휘는 내디딘 발에 더욱 힘을 실어 도약했다.

피하면 허무하게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천휘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재미있는 일을 왜 피하는가.

‘어디 한 번 제대로 펼쳐 봐.’

매화신공의 내력이 크게 들썩였다.

온 전신의 혈도를 지배하던 내력이 중단전을 넘어, 상단전에 도달했다.

백회혈이 열리고,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 덕분에 정지한 것처럼 느려진 의식의 시간 속에서, 내력이 눈동자를 빠르게 감쌌다.

온 세상이 손에 잡히듯 선명히 보였다.

기세, 흐름, 대기의 떨림까지.

그리고 눈앞에서 출수를 준비하는 소광패의 움직임도.

팟!

때마침 소광패가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길게 늘어났다.

마치 노을빛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그의 몸이 길게 이어지며, 재빠르게 오여 장의 거리를 좁혀 왔다.

혈검결의 비전 보법.

영영보(影影步)였다.

발을 내디딘 소광패가 손에 쥔 혈우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혼신의 일격이었다.

무극지경의 고수가 펼치는 절체절명의 출수에 대기가 울고, 찢어졌다.

동시에 검이 분분히 나뉘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은 넷이 되었으며, 넷은 여덟이 되며, 계속 늘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끝에 다다라서는 수십의 검영이 허공을 뒤엎으며, 비처럼 쏟아졌다.

혈검결의 절초.

혈천검우(血天劍雨)의 발현이었다.

‘환검을 실은 변초인가?’

천휘는 혈천검우를 지그시 보며 속으로 감상을 내뱉었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다가온 검영들이 지척까지 도달했음에도, 천휘의 표정엔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소광패가 두 눈을 번뜩였다.

혈천검우를 상대로 아무런 방비조차 없는 천휘에 희망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천휘가 화월을 움직였다.

그 순간.

화아아―

매화향이 사방에 퍼졌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짙은 향이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이 붉어졌다.

아직 해가 질 때도 아니건만 붉어진 하늘 사이로, 매화가 피어났다.

고혹적이며, 아름다웠다.

쏟아지는 검우를 뒤덮을 정도였다.

그때.

스걱―

한 줄기 검흔이 벼락처럼 하늘 위에서 아래로 ‘뚝’하고, 떨어졌다.

세상을 반으로 가르듯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검흔은 붉은 하늘도, 매화도, 검우도 모두 잘라 냈다.

화려함 속에 매서움을 담은 검법.

낙영검법(落英劍法)이었다.

촤아악!

혈천검우를 펼치던 소광패의 전신에 기나긴 혈흔이 그어졌다.

“이럴…….”

소광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넋을 놓은, 허망한 시선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생기를 잃어 가더니, 이내 앞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혈우검가의 가주로 서림에 군림하던 인물치고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

소광패의 죽음이 장원 전체에 침묵을 불렀다.

특히 천휘가 펼쳐 낸 아름답지만 섬뜩한 검예(劍詣)에 적·아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속에서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뭐 해요?”

좀 전 지고의 경지에 다다른 검식을 펼친 자치고는 가벼운 어투였다.

“이제 다른 놈들 정리…… 응?”

멸절대에게 임무를 마치라는 식으로 말하려던 천휘가 고갤 들었다.

사이한 기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윽고 온통 새까만 의복을 걸친 네 명이 담장을 뛰어넘어 왔다.

“……!”

“무슨?!”

갑작스러운 넷의 등장에 멸절대는 물론이고, 혈우검가의 무인들도 식겁할 무렵.

스윽.

일행 중 온통 새까만 피풍의로 얼굴조차 가린 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까지 가리고 있던 긴 소매가 내려가며, 새까만 손이 드러났다.

정확히는 새까만 삭(索)으로 이루어진 천이 감싼 손이었다.

손을 든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피풍의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러자 마치 타 버린 장작처럼 잿빛의 빛바랜 머리카락이 아래로 뚝 떨어졌고.

“헙!”

“저, 저것은……!”

드러난 모습을 본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피풍의 아래에 존재하는 것은 얼굴이 아닌 하나의 가면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가면이 아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눈썹과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린…….

귀왕(鬼王), 야차(夜叉)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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