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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마-329화 (329/391)

329화

‘깜빡했네.’

천휘가 눈을 흘기며, 호광개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사내를 봤다.

불혹을 넘겼을까.

검은 털과 희끄무레한 털이 중간중간 섞인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인은 고강하고 삼엄한 공력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풍리와 비견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늦었군.”

풍리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새 여유를 되찾은 모양새였다.

하나 그런 와중에도 천휘를 쏘아보는 차디찬 눈빛은 무척이나 매서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호광개의 목덜미를 움켜쥔 남자, 흑괴단주 강악(强惡)이 입을 달싹였다. 그 역시 시선은 천휘를 응시한 채였다.

“상대가 워낙 강해서 빈틈을 찾는 것이 힘들어서 말이오.”

“……그것도 맞는 말이군.”

풍리가 동조하는 그때.

저벅.

흑괴단주 강악이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그의 신형이 갑자기 커지더니 단숨에 자리를 옮겨 풍리의 옆에 나란히 섰다.

찰나였다.

놀라운 보신경을 선보인 강악은 호광개를 풍리에게 휙 하고 내던졌다.

거의 물건 취급이었다.

“여기 있소.”

“좋군.”

강악에게서 호광개를 받아 든 풍리의 눈매가 크게 휘어지더니, 눈가에 자그마한 주름을 만들어 냈다.

곧 그가 호광개의 머리채를 움켜쥐더니, 번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거래하지 않겠나?”

“뭐? 거래?”

천휘가 뭔 소리냐는 듯 바라봤다.

하나 풍리는 그러한 천휘의 표정과 어투에도 무심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놈을 네게 넘겨주마.”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목적이 있나 본데?’

고이 넘겨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풍리는 천휘를 똑바로 노려보며, 곧장 원하는 바를 밝혔다.

“대신 우리가 무혈을 빠져나갈 동안 뒤를 쫓지 말아라.”

풍리가 분노를 삼키며, 말했다.

사실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낸 저놈의 낯짝을 엉망으로 짓밟고 싶었다.

하나 그는 냉정해져야만 했다.

‘이놈을 인질 삼는다고, 저놈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몇 번의 경합으로 그는 눈앞의 상대가 지닌 무위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보다 윗줄의 고수.

흑괴단주가 있고, 흑괴단이 포위하고 있다지만 이 정체불명의 놈을 죽이려면 희생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아직 제대로 임무도 수행하지 못했건만, 이대로 전력을 잃는 것은 최악이었다.

‘그러니 일단 물러나야 한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짧다 했다.

손가락 셋에 대한 혈채는 추후 어떻게든 받아 내고야 말리라.

“어떤가?”

풍리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속으로는 대답을 예측하면서였다.

‘거절할 수 없겠지.’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앞의 놈은 수하가 엉망진창이 된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분노하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거짓으로 약조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일단 이놈에게 독을 먹인 뒤 도망치면, 쫓아오지 못할 터. 흥정만 완료하면 돼.’

그렇게 거래가 성사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주로를 생각할 때.

“싫은데.”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절 의사에 풍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놈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냐?”

“어, 마음대로 해.”

울컥한 풍리의 반응에도 천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즉답을 내놓았다.

“죽이려면 죽이든가 알아서 해.”

천휘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한파와도 같이 싸늘한 음성이었다.

“이미 네놈에게 잡혔을 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뭐. 그때 죽나, 이제 죽나 다를 게 있어?”

풍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지금 수하의 목숨보다 우리를 죽이는 것이 더 중요하단 말이냐?”

“맞아.”

“고작 그것 때문에 수하를…….”

“거참, 웃기는 소리 하네. 너도 수하가 죽는 것에 눈 깜빡도 안 해 놓곤.”

“…….”

풍리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하나 곧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허장성세가 심하군.”

말과 함께 그는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놓았고, 그에 호광개는 형편없이 쓰러졌다.

“이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비웃음이 섞인 말을 뱉은 그는 이어서 쓰러진 호광개를 향해 발을 들더니, 그대로 그의 오른 팔뚝을 짓밟았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읍!”

격통이 몰려왔는지 호광개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침을 질질 흘렸다.

일부러 도발적인 행동을 한 풍리가 천휘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지만.

“뭐해? 죽인다면서? 왜 뜸 들여?”

돌아온 것은 담담한 말이었다.

“할 거면 얼른 해.”

감정을 배제한 듯 서늘한 눈빛이 밤하늘보다 더욱 새까맣게 빛났다.

이어서 힘겹게 눈을 뜨는 호광개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입을 달싹였다.

“대신 그에 대한 후폭풍은 알아서 감당해야 할 테니 준비해 두고.”

아예 더 대화를 나눌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풍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래가 허무하게 깨어진 것이다.

『이제 어쩔 것이오?』

그때, 전음이 그의 귀를 두드렸다.

둘의 대화를 듣던 흑괴단주였다.

『……방법이 딱히 있겠는가.』

풍리가 뾰족하게 전음을 흘렸다.

거래가 틀어졌으니,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흑괴단주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쐐애애액!

천휘를 향해 사방에서 창과 칼이 짓쳐 들었다.

숨죽인 채 습격을 준비하던 흑괴단원들이 매서운 살기를 띠며, 합공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천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새까만 무저갱과 같이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살기가 떠오르는 순간.

스윽―

적빛의 궤적이 그들을 꿰뚫었다.

은은한 기파를 발한 화월이 검로를 그리며, 그들을 갈라 버린 것이다.

촤아아악!

핏물이 사방에 흩뿌려지며 달려들던 흑괴단원들이 그대로 무너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럴까.

비명조차 없었다.

부서진 병기들이 나뒹구는 소리와 죽은 그들이 고꾸라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합격진을 펼쳐라!”

흑괴단주가 크게 소리쳤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그 순간 수십 명의 흑괴단원들이 나타나 천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과 뒤, 좌와 우, 상과 하.

그들은 천휘를 노릴 수 있는 모든 곳을 점한 채로 기회를 엿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득한 경지의 고수였다.

촤아아악!

사방에 피가 흩뿌려졌다.

적빛의 궤적이 허공에 그려질 때마다 달려들던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흑괴단원들은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조금씩 천휘를 포위해 갔다.

날카로운 창과 칼이 계속해서 휘둘러지고, 적빛의 궤적 역시 쉼 없이 그려졌다.

부서져 가는 병장기들. 압도적인 기운을 발하는 검풍. 사방에 튀어 대는 혈흔.

순식간에 화천루는 아비규환이 되며, 지옥을 방불케 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체 누구인 거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풍리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한없이 정순한 공력과 흩뿌려지는 적빛의 검로, 그리고 구천압뢰.

거기에 오만한 성격.

하나 같이 눈에 띄는 특징적인 것들이었건만 아무리 누군지 파악하려 해 봐도 도저히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참 학살을 벌이는 천휘를 바라보던 풍리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이놈은 이제 쓸모가 없…….’

차가운 눈빛을 띤 그가 그대로 호광개의 목숨을 끊으려던 찰나.

‘아니. 쓸모가 있겠어.’

무언가를 떠올린 풍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흑괴단주를 바라봤다.

“합공을 해야 할 것 같군.”

“알고 있소.”

둘이 마주 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둘 만한 고수가 합공을 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만큼 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상대는 그들의 계산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으니.

풍리가 위를 보며, 말했다.

“내놓아라.”

그 말이 끝난 순간.

휘이이익―

위에서 하나의 창이 떨어졌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의 오른손에 잡혀 들었다.

신병이기, 사일창(射日槍)이었다.

새파란 창대로 이루어진 사일창을 쥔 그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휘이이―

그의 전신을 감싼 순백의 갑주, 영사심결의 호신강기가 일렁거리며 주체할 수 없는 살기를 흩뿌려 갔다.

“먼저 이목을 끌어줄 수 있나?”

“……이유가 있소?”

“저 괴물 같은 놈의 허점을 만들 방법이 떠올랐네.”

말과 함께 그가 고개를 내렸다.

그 눈짓을 따라서 시선을 내려 밑에 있는 호광개를 본 흑괴단주가 눈을 빛냈다.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곧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풍리와 마찬가지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 순간.

검은 기파가 그의 발밑에서 흐르며 균열이 가 있는 바닥을 산산이 부숴 갔다.

이어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후우우웅!

뒤늦게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가 익힌 보신경, 이영보(異影步)가 극성으로 펼쳐지면서 일어난 역풍이 반원의 돌풍을 일으켰다.

단숨에 공간을 격한 흑괴단주는 검격을 흩뿌리는 천휘를 향해서 날카로운 수도를 벼락과도 같이 찔렀다.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공기를 가르며 나아간 흑괴단주는 꼿꼿이 세운 수도(手刀)를 찍어 내렸다.

천휘의 정수리를 향해서였다.

손날에 맺힌 검은 공력이 일렁거리면서, 날카로운 칼날의 모습으로 화했다.

그의 성명절기, 흑살수(黑殺手)가 펼쳐진 것이다.

쐐애애액!

그가 익힌 독문심법, 흑사심공(黑砂心功)의 기운은 서슬 퍼렇게 예기를 띄우면서 공기를 빠르게 갈랐다.

이윽고 그의 수도가 천휘의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콰아앙!

흑색의 경파가 사방으로 뻗쳤다.

어느새 들어 올려진 천휘의 검, 화월이 흑살수를 올려 쳐 낸 것이다.

“……!”

흑괴단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보기만 했을 때도 그 수위가 고강함을 느낄 수 있는 그의 무공이었다. 한데 직접 부딪쳐 보니 보기만 할 때와 그 격이 아예 달랐다.

부딪친 손날이 떨려 왔다.

‘이럴 수가!’

목 끝까지 당혹감이 차올랐다.

흑사심공의 공력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수강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황한 그가 발을 뒤로 뺐다.

경력을 화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얼른!’

손이 잘려 나가는 환상을 엿본 그가 이영보를 펼치려던 찰나.

우두둑!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신이 공력을 둘둘 감싸고 있는 손날을 억지로 밀어붙이며, 그 힘에 뼈가 박살이 나는 게 느껴졌다.

“큭!”

신음을 흘린 그가 눈을 찌푸릴 때.

후욱!

돌연 시뻘건 무언가가 둘 사이에 난입했다.

그에 천휘는 좌수를 펼쳐 난입한 무언가를 쳐 내려다가, 미간을 좁혔다.

‘호광개?’

피로 물든 호광개가 던져진 것을 확인한 천휘가 살짝 멈칫한 사이.

콰직!

호광개의 어깻죽지를 뚫고 날카로운 창이 핏물을 흩날리며, 짓쳐들어왔다.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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