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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마-348화 (348/391)

348화

이튿날 아침.

천하상단의 휘하 객잔에 들러 하룻밤을 지낸 천휘는 먼저 마차에 타려는 용주개를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어제 하루면 됐지. 오늘마저 동행할 이유는 없잖아?’

어제 창문을 열었음에도 코끝을 찔러 오던 악취를 떠올린 천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마차를 향해 움직였다.

“응?”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것일까, 용주개가 홱 천휘를 돌아봤다.

“어디 가려는 거냐?”

“다른 마차 타려고 하는데요.”

“뭐? 다른 마차?”

용주개가 미간을 좁혔다.

“왜 같이 안 타고?”

“꼭 같이 탈 이유가 있나요? 어차피 할 이야기도 어제 다 끝났는데.”

“그래도 어제 같이 타지 않았느냐.”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

천휘가 단호하게 말했다.

용주개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가 뭐냐?”

“몰라서 물어요?”

물음에 천휘는 뭔 당연한 것을 묻냐는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당연히 냄새 때문이죠, 뭐겠어요.”

“뭐? 냄새?”

용주개는 어이없다는 듯 되묻더니 팔을 들어 올려서 냄새를 맡았다.

“킁킁, 겨우 이 정도로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냐. 고작 해 봐야 십 년 정도 안 씻었을 뿐인데.”

“십 년이요?”

천휘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못 들을 것을 들은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같이 타지 말죠.”

단호하게 말한 천휘가 코를 막으며 질색이라는 듯 말하던 그때였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타겠느냐?”

인자한 목소리가 뒤에서 불쑥 끼어들어 왔다.

용주개가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무림맹의 삼대 봉공, 천무공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일세, 개방주.”

“좋은 아침이오. 천무공.”

용주개가 평소와 달리 살짝 조심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가 아무리 개방의 방주라지만 천무공은 현 무림맹에서 상당한 인망과 직위를 지닌 자였기 때문이다.

“……이놈과 같이 탈 생각이오?”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구려.”

천무공이 고개를 주억였다.

“홀홀, 이 늙은이가 현 강호에서 그리 명성을 떨치는 신성과 언제 독대하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처음 보는 사이인데, 장기간 함께 이동하려면 꽤 불편하지 않겠소?”

“어디 처음 만난 날부터 편한 자들이 있겠소이까. 대화하고 인사를 나누며 친분을 쌓는 것이지.”

“크흠.”

용주개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정론이었다.

천무공은 그런 용주개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나직한 말을 흘렸다.

“그리고 이 늙은이가 생각하기에, 단발성 임무라고는 하나 호위를 할 사람들끼리 거리를 두기보다는 친분을 다져야 한다 생각하네만, 안 그렇소?”

“…….”

용주개가 간을 찡그렸다.

계속된 정론에 반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입맛만 다실 뿐, 딱히 대꾸가 없는 용주개를 보던 천무공이 천휘를 향해 입을 달싹였다.

“소협은 어떻게 생각하나?”

천휘가 천무공과 시선을 맞췄다.

‘안 그래도 대화하고 싶었는데.’

떠나기 전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서 던졌던 시선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맞는 말이네요.”

천무공이 다시 용주개를 봤다.

“소협도 동의하는군.”

용주개는 둘을 번갈아 보며 입을 우물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알겠소.”

그 말과 함께 용주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토라진 얼굴로 천휘를 보더니 바로 입을 달싹거렸다.

『그렇게 같이 가기 싫은 거냐?』

천휘는 투덜거림이 가득한 용주개의 전음에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네.』

『이놈이…….』

돌아온 전음에 손을 부들부들 떨던 용주개가 한숨을 푹 내쉴 무렵.

“타거라.”

이미 마차에 올라탄 천무공이 천휘를 향해서 손짓하며 말했다.

천휘가 바로 마차에 올라타자.

“그럼 가겠습니다.”

셋의 대화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지켜보기만 하던 마부가 서둘렀다.

다른 마차들은 진즉에 길을 떠나 저 멀리 멀어졌기 때문이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찰싹!

말들이 울며, 마차가 출발했다.

약하게 덜컹거리며 흔들리던 마차는 잠시 후, 관도에 도달하며 안정을 찾았다. 크지 않았던 소음마저 잦아들자, 천무공이 천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 소문은 익히 들었단다.”

그녀의 주름진 눈썹 밑 흑백이 선명한 눈동자가 천휘를 담았다.

불현듯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어린아이를 향해 말하듯 따스한 목소리를 흘린 천무공의 눈이 묘한 기파를 흘려 냈다.

불투명한 기파의 향연.

그것은 전에 느꼈던 매서운 안광과 달리 포근하게 감싸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현기(玄機)가 깃든 듯했다.

“처음에는 그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거늘, 모두 진실이었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초월적인 내공 화후 결과였다.

늙수그레한 모습 속에 숨겨져 있던 진정한 그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순간 노파의 주름이 펴졌다.

주름만이 아니었다.

세월을 되감기라도 한 듯 그녀의 기나긴 흰 머리카락이 먹과 같은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 가고 굽은 허리마저도 꼿꼿이 펴져 갔다.

자비롭던 노파는 어느새 고고한 중년 여인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어서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 늙은이의 기나긴 일생에 이토록 뛰어난 자질을 보인 건 자네가 처음일세. 후기지수일 때부터 천하 강호를 뒤흔들던 팔무신도 자네 나이 때에 그만한 경지를 이룩하지는 못했었지.”

그녀의 눈이 영롱하게 빛났다.

마치 하늘과도 같이 새파란 기운을 담은 눈동자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천통안(天通眼).

기나긴 세월 동안 갈고 닦은 지고의 안법이 그녀의 눈에 나타났다.

“체질은 이미 완성되었고, 지닌 공력은 순수한 자연지기를 추구하니, 신선이 재림한 것 같군.”

영성이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탄이 드문드문 묻어났다.

날카롭게 천휘를 노려보던 천통안이 더욱 깊은 곳을 파고들려 할 때.

“거기까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잠하고, 조용한.

하지만 묘하게 가슴을 크게 울렁거리게 만드는 초월적인 음성이었다.

놀란 그녀가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던가.’

그때의 눈빛이 있었다.

새까만 두 눈동자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광망이 자신을 담고 있었다.

“놀라운 안법이도다.”

천무공은 감탄을 터트리자.

“흥미로운 안법과 심법이었어요.”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나직한 음성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무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도 더욱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 눈은 설마?’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천무공이 두 눈을 부릅뜨며, 바라볼 때.

“보아하니 원래라면 익힌 무공들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을 테지만, 전신의 혈도 및 미세혈맥 그리고 근육을 지닌 내공으로 자극해서, 신체의 한계를 극복했나 보네요. 하지만 그로 인해서 이제 천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최대 십 년인가.”

천휘가 그녀를 꿰뚫어 보며 중얼거렸다.

순간 천무공의 의식이 끊어졌다.

천휘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 순간, 마치 날카로운 화살이 자신의 머리를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싶더니, 의식이 날아간 탓이었다.

잠시 후였다.

“좋은 걸 얻었네요.”

작게 말한 천휘가 눈을 감았다 떴다.

천무공이 의식을 되찾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어느새 그의 눈에 가득했던 영성은 사라지고, 평소의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는 것만으로 얻었느냐?”

“그렇죠.”

“허어.”

천무공이 입을 떡 벌렸다.

믿을 수 없는 탓이었다.

하나 곧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목도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사실임을.

“…….”

천무공이 내공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그녀의 검게 변한 머리카락이 점점 희게 변해 갔고, 꼿꼿하게 펴졌던 허리도 다시 굽어졌다.

이내 본래의 노파의 모습으로 돌아온 천무공이 천휘를 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느 경지에 올랐는가?”

“그 눈으로 맞춰 보시죠?”

천휘가 입매를 비틀며, 되묻자.

“홀홀, 그건 힘들겠군.”

그녀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그러곤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댔다.

“이 강호에 늙은이가 설 곳은 더 이상 없겠군.”

작게 속닥이는 천무공의 입가에 주름진 미소가 떠올랐다.

기뻐 마지않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기나긴 세월이었다.

가히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강호에 몸을 담아 온 그녀였다.

그 나날들을 떠올리던 그녀가 눈을 살며시 뜨며, 입을 열었다.

“이제 떠날 때가 왔구나.”

* * *

해와 달이 열 번 뜨고, 졌다.

무림맹주와 군사, 그들을 위한 호위를 태운 마차는 쉴 틈도 없이 남하하는 데 몰두했다.

그 덕분에 일행은 인상곡이 있는 마을에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해서 쉬고 있었다.

천하상단이 준비한 별채여서일까.

거대한 전각에는 충분히 많은 방이 있어서 각자가 따로 지낼 만큼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의 방.

이른 새벽에 깨어난 천휘는 가부좌를 튼 채 깊은 심상에 잠겨 있었다.

‘천무공과 용천객이라……’

천휘는 이 여정으로 오는 동안 중간에 만났던 두 사람을 회상했다.

천무공의 무공은 기기묘묘했다.

내공의 화후로 신체를 활발히 움직여 신체를 전성기 때로 되돌린 것이니.

혈도와 근육을 자극해서였다.

‘반로환동의 열화판이라 할 수 있으려나.’

천휘가 그때 본 무공을 헤집었다.

내공의 움직임, 흐름 등.

그 모든 것을 파헤치고, 해부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머리에 차곡차곡 쌓은 천휘가 이번엔 용천객을 떠올렸으나.

‘쩝, 얻을 게 없어.’

그는 이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용천객은 조용한 인물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 마차를 탔지만, 그는 말을 걸지도 받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천휘는 생각을 끝마치자마자, 가부좌를 풀며 뒤로 그대로 누웠다.

이어 하품을 내뱉었다.

“하암, 언제 협정 맺으려나?”

무료한 표정으로 침상에 드러누운 천휘가 중얼거렸다.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엿새가 흘렀다.

이제는 지겹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천휘의 중얼거림에 답하기라도 하듯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오거라.”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용주개의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사흑련이 왔다.”

이어지는 용주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사흑련주와 사흑련의 고수들을 직접 만나는 날이.

“웃차.”

천휘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와 곧바로 한쪽에 걸어 두었던 흰색의 장포를 걸치고, 검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의 마검, 고동색의 화월.

상반된 기운을 품은 두 자루의 검이 천휘의 허리춤에 걸려 작게 흔들렸다.

천휘는 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평소보다 굳은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용주개를 본 천휘는 도리어 더욱 짙은 미소를 떠올렸다.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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