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56화 (356/391)

356화

막 해가 뜨려는 이른 새벽이었다.

싱그러운 풀 내음과 함께 송골송골 맺힌 자그마한 이슬이 슬며시 얼굴을 드러낸 신명을 반사할 무렵.

덜컹―

간판도 달리지 않은 이름 없는 객잔에 넉 대의 마차가 일렬로 섰다.

‘천하상단’이라고 적힌 깃발이 눈을 사로잡는 마차들이었다.

저벅, 저벅.

새하얀 백색의 장포를 대충 어깨에 걸친 천휘가 전각에서 나왔다.

조금 피로한지, 나른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마차 앞에 선 천휘는.

“하암.”

하품을 내뱉으며, 기지개를 켰다.

‘조금 피곤하네.’

천휘가 작게 혀를 차며 목을 좌우로 까딱였다.

조금이지만 피로가 축적된 상태였다.

어젯밤 이령산맥의 인상곡까지 재빨리 갔다 오기 위해 극성의 비천행보를 펼친 데다, 시간이 부족해 밤을 꼬박 새워야 했기 때문이다.

‘마차에 타면 운기조식이라도 해야겠어.’

천휘가 피로를 몰아내기 위해 운기조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품 때문에 눈가에 자그맣게 맺힌 눈물을 쓱 닦던 그 순간이었다.

‘음?’

마침 객잔을 빠져나오던 무림맹주와 눈이 마주쳤다.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와 같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를 보던 천휘가 턱을 매만졌다.

‘사흑련주와 내가 만나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지?’

어젯밤 사흑련주가 한 말을 떠올리며, 무림맹주를 가만히 주시할 무렵.

씨익―

불현듯 무림맹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더니 천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피곤한가 보군.”

“잠을 좀 설쳤거든요.”

천휘는 무덤덤하게 말하면서 무림맹주의 표정을 탐색했다.

사흑련주가 했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무림맹주가 여태 보인 행동이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사흑련주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는 거니’

천휘는 둘 다 의심하는 중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무림맹주나 사흑련주나 신뢰할 인물들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무림맹주의 소매가 흔들렸다.

툭.

이어 무림맹주가 천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마치 공감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마음 이해하지.”

말하던 무림맹주가 싱긋 웃었다.

“나도 격렬했던 사흑련과의 전쟁이 이렇게 끝나니 오히려 허한 마음이 들더란 말일세.”

천휘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사흑련주와 만난 것에 대해 언급하나 했으나, 전혀 다른 말을 한 것이다.

“잘못 짚었네요.”

“허허, 그런가?”

퉁명스러운 천휘의 태도에 무림맹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기를 잠시.

“아! 그럼 이거였나 보구먼.”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 돌연 무림맹주가 뚝 웃음을 그쳤다.

천휘가 그 변화에 눈을 빛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길 잠시, 무림맹주가 가까이 붙어서 진중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흘렸다.

“이번 협정에 대해 무림맹에 알리는 것이 우선이니, 무림맹에 도착한 그 날 자시에 보는 것이 어떤가?”

“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천휘가 공기 빠진 목소리를 입 밖으로 뱉자, 무림맹주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전번에 나와 한 약속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약속……?”

천휘는 약속이라는 말에 무림맹주와의 일들을 되새겨 보다가, 잠시 잊고 있었던 거래 하나를 떠올렸다.

‘아! 비무!’

천휘의 눈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사흑련주가 했었던 말은 단숨에 저 멀리 쫓겨나듯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대신 ‘무림맹주와의 비무’에 관한 기대감이 머릿속을 빼곡하게 차지했다.

“그것도 아니었나 보군.”

무림맹주가 허허롭게 웃을 때.

“아뇨, 그 약속이 맞아요.”

천휘는 곧바로 대답했다.

무림맹주가 먼저 말을 꺼낸 김에 얼른 약속을 확정하려는 목적이었다.

“자시라고 했죠?”

무림맹주는 살짝 올라간 천휘의 목소리에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좋네요. 그때 보죠.”

“허허, 알겠다.”

조금 빨라진 천휘의 목소리에 무림맹주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발을 돌려서 제갈공 쪽으로 움직였다.

“흐음, 어떤 무공을 선보이려나. 별호가 심의검협이니 검을 쓰는 것이야, 당연할 테고…….”

천휘가 무림맹주의 무공을 상상하며 마차에 오르려 할 때.

저벅, 저벅.

제갈공 쪽으로 걸어가는 무림맹주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이 순간 분위기를 바꾸더니, 이윽고 서늘함을 띠었다.

* * *

“곧 도착이로구나.”

창밖을 보며 나직이 중얼댄 종남검성의 말에 천휘의 시선이 옮겨졌다.

광활하게 펼쳐진 관중평야의 끝에서 거대한 성벽이 그들을 반겨 주고 있었다.

무림맹이었다.

“많이도 모여 있네요.”

천휘가 성문 쪽을 보며 말했다.

본래라면 굳건히 닫혀 있을 무림맹의 성문은 지금 활짝 개방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무인들이 그 앞에 나와 양쪽으로 도열해 길을 만들고 있었다.

무림맹의 무인들 모두 다 나온 것처럼 그 수가 수백을 헤아렸다.

“다들 협정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않겠느냐.”

종남검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이령산맥을 포위하던 무인들은 협정이 끝나자마자 신법까지 펼치며 무림맹에 복귀했지만, 아직 결과는 그 누구도 모르는 상태였다.

천하상단의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기밀 유지에 신경 쓴 만큼, 협정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충 예상은 할 텐데.”

천휘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자신들이 무사히 귀환한 이상, 그 결과는 정해진 것과 같았다.

천휘가 무심히 바라보기를 잠시 인파에서 시선을 떼며 등을 기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무림맹주와 일행을 태운 마차들이 무림맹의 성문에 도달했다.

바로 그 순간.

“맹주님께서 복귀하셨다!”

누군가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성문에 있었던 무인이 포권을 취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마차가 성문에 다가설수록 양쪽에 도열한 무인들이 그 속도에 맞춰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포권을 취했다.

마치 파도와 같은 포권의 물결.

넉 대의 마차가 그 사이로 지나갔다.

고요함 속에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 그리고 포권을 취하면서 흘리는 소매 스치는 소리만 울렸다.

문을 지나 성안에 들어선 이후로도 같은 광경이 이어졌다.

놀라운 장관이었다.

성내 거리를 나아가던 마차가 이윽고 멈췄다.

맹주전의 앞이었다.

“도……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장관에 긴장한 마부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도착을 알린 그때.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리고 무림맹주가 그 안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

깊은 정적이 흘렀다.

마차에서 내린 무림맹주가 주변에 도열한 무인들을 살펴보기를 잠시.

저벅.

그는 이내 발을 옮겨, 맹주전으로 움직였다.

곧바로 제갈공이 그를 따라갔고, 뒤에 있던 마차에 탄 천무공과 천룡객 그리고 용주개는 내리자마자 가만히 서서 위를 바라봤다.

“우리도 내리자꾸나.”

종남검성이 말과 함께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천휘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맹주전의 꼭대기.

어느새 사방이 뚫린 꼭대기 층에 올라간 무림맹주는 그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서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천휘의 눈이 그를 담았다.

뒷짐을 진 무림맹주가 무림맹 전체를 훑어보듯이 바라봤다.

직후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사흑련과의 협정 내용을 발표하겠소.”

무림맹주의 나직한 음성이 맹 곳곳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며, 올려다보고 있는 무인들의 귓전을 때렸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든 시선이 쏠리자.

마침내 잠시 닫혀 있던 무림맹주의 입이 열리며, 모두에게 소식을 알렸다.

“오늘부로 전쟁은 끝났소.”

사흑련주와 마무리한 협정의 결과.

무림맹주가 종전을 선언하자, 일순간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커지고.

“와아아!”

“끝이다!”

환호성이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터져 나온 환호는 삽시간에 무림맹을 채우며, 빠르게 성 밖으로 퍼져 나갔다.

몇몇은 전쟁이 끝났음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으며, 몇몇은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물론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종전이라니……!”

“사형들 볼 낯이 없다.”

사흑련에게 동료를 잃었던 무인들은 종전이란 말에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삭이거나,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들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계속해 상처를 주는 전쟁이 드디어 끝났음을 기뻐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끝이구나.”

종남검성 또한 종전이 기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생이 많았…….”

이어 시선을 돌리던 종남검성은 천휘에게 말하려다, 이내 고갤 저었다.

천휘는 이미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 * *

“대주님! 오셨습니까!”

“고생했어, 사제!”

“사숙님! 고생하셨습니다!”

멸절대의 전각으로 돌아온 천휘가 짐을 풀고 있으니 뒤늦게 돌아온 멸절대원들과 화산파의 제자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를 반겼다.

특히 화산파의 제자들은 천휘의 무사 복귀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협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하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질 일이었다.

다름 아닌 구주삼패세 중 두 곳 사이에 있었던 전쟁의 종전을 결정한 협정이지 않은가.

그 때문에 이번 협정에 호위로 뽑힌 이들 역시 널리 알려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각 세력에서 겨우 다섯 명의 호위만 대동했으니, 이에 뽑힌 이들은 무림맹과 사흑련을 대표하는 무인이란 말과 일맥상통했다.

거기에다가 그 중 천휘는 모인 이들 중에서 가장 어린 무인이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상당했다.

‘사제 덕분에 이제 아무도 본 파를 무시하지 못하겠어.’

‘하하! 본 파가 더욱 비상하겠구나!’

‘역시 사숙님이야!’

천휘는 싱글벙글 웃는 이들을 보더니, 돌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대주님께서도 이번 종전이 기쁘신가 봅니다.”

“하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햇살과도 같은 밝은 미소를 바라본 멸절대원들은 그 역시 이번 종전을 기뻐한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다.

“…….”

하지만 천휘를 제외한 화산파의 제자들은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이마에서 삐질 땀이 흘렀다.

오래전부터 천휘를 봐 왔던 그들은 그 미소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이다.

“마침 잘됐네요.”

천휘가 더욱 환히 웃으며 말했다.

바로 이어서 기뻐하며 웃는 무홍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착 올렸다.

나직한 목소리를 흘리면서였다.

“다 연무장으로 나와요.”

“연무장?”

“전번에 말했잖아요.”

천휘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입술을 삐뚤게 올렸다.

“돌아오자마자 훈련 빼먹지 않았는지 확인한다고.”

그 말에 그제야 멸절대원들도 화산파의 제자들처럼 아연실색해질 때.

“설마 훈련 안 한 건 아니죠?”

천휘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멸절대원들이 크게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천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럼 따라와요. 확인하게.”

말과 함께 천휘가 빙긋 웃었다.

아까와 같이 햇살처럼 밝은 미소였지만, 멸절대원들 눈에는 그 미소가 마치 저승차사의 것처럼 보였다.

네시진 뒤.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개구리처럼 드러누운 채 기절한 멸절대원들을 보던 천휘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래도 훈련을 하긴 했네.”

기절해서 아무도 듣지 못했을 말을 중얼거리던 천휘는 불현듯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중천에는 해 대신에 달이 떠올라서 푸른 달빛을 사방에 비추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됐네.”

천휘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잠깐 몸도 풀었고, 이제 가 볼까.”

순간 천휘의 신형이 사라졌다.

모두가 잠에 들 시각.

평소였다면 고요할 시각이었지만, 오늘 종전 소식이 알려져서일까.

무림맹 내부에 있는 객잔들은 사방에 켜져 있는 등롱으로 인해 낮처럼 밝았고, 내부에서는 연신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모두 마시자고!”

천휘는 취객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지붕을 밟아 빠른 속도로 맹 내를 질주해 갔다.

맹의 내곽과 점점 더 멀어지며 소란 역시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탁.

천휘가 멈춰 섰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하는…….

잔잔한 호수 가운데 노란빛의 등롱이 흔들거리는 누각의 앞이었다.

스윽―

천휘가 앞을 주시했다.

누각에는 익숙한 인영이 뒷짐을 진 채, 어느새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나직한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이어 그가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저벅.

흔들리는 등롱 불빛 아래 인영, 무림맹주의 얼굴이 완연히 드러났다.

그때와 같이 눈초리를 휜 채였다.

바짝 날이 선 곡도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그의 눈웃음을 본 천휘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시작하죠.”

말과 함께 천휘가 화월을 뽑았다.

내리쬐는 푸른 달빛을 반사하는 화월을 살짝 치켜든 천휘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무림맹주의 투명하고 고요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비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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