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8화 (8/209)

#8화. 奇緣(기연)

금당까지는 무려 나흘이 걸렸다. 그동안 운선은 세 번이나 발작하였으며 그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마을에서 구한 외상약과 주운이 가진 내상 약으로 어찌어찌 목숨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운, 이제 금당에 다 왔으니 더는 매달리지 않겠습니다.”

운선은 여전히 두렵고 불안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말투나 행동과 달리 주운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넘치게 감사한 마음이었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두타산까지 같이 가 줄게. 내가 이래 봬도 의리가 좀 있거든.”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상외의 대답에 운선은 깜짝 놀라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사형 외에는 또래를 만난 적이 없던 운선인지라 그녀와 함께 하는 여정이 꽤 즐겁기도 했다.

‘일단 경전의 행방을 확실히 해두어야 하고…….’

속으로 이런저런 변명을 찾고 있었지만 사실 주운의 결정은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낯빛이 상해가는 운선을 보는 일이 점점 더 괴로워졌다. 그가 자신과 헤어지고 죽기라도 한다면 그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 객잔에서 여독을 풀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자.”

운선이 아까부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니 또다시 발작이 찾아온 듯했다. 주운은 애써 고통을 참는 그가 안쓰러워 자신이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한낮부터 객잔으로 들어갔다. 운선은 주운의 배려를 눈치챘으나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불과 나흘 전에 가족을 잃었는데도 이렇게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주운의 친절 덕분이었다.

끼니때가 지나 한가할 참이라고 예상했는데 객잔 안은 온갖 방파에서 온 무림인들로 바글바글했다.

“무슨 날인가?”

“와.”

운선은 눈이 휘둥그레져 이쪽저쪽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는 길에 객잔에 종종 들렀으나 이렇게 크고 화려한 곳은 처음이었다.

“배가 고프니 이것저것 시키자.”

주운은 점소이를 불러 평소 먹는 양보다 음식을 잔뜩 시켰다.

‘잘 먹고 보내야 한이라도 없지.’

주운은 자신도 모르게 안쓰러운 표정으로 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각박한 팔자가 아닐 수 없었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왜 검의 이름이 ‘수월’과 ‘월심’입니까?”

음식들을 입에 잔뜩 넣고 씹으며 운선이 물었다. 처음 주운을 만났을 때 그녀가 검선의 제자라는 말을 단번에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검 ‘월심’ 때문이었다. 두 개의 검은 율천과 무영의 사부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모양도 재질도 완전히 똑같았으나 오직 검에 쓰인 이름의 서체만 달랐다.

“두 검의 글자를 합치면 뭐지?”

“수월, 월심……수월심(水月心)?”

주운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마음, 그게 수월심의 의미야.”

“네?”

검의 내력에 대해 처음 듣는 운선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물에 달이 비치려면 그 물은 아주 고요하고 잔잔해야 해. 그 물처럼 언제나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뜻이지.”

“참 좋은 의미네요.”

운선은 검에 담긴 뜻이 마음에 들어 계속 ‘수월심, 수월심’ 하고 되뇌어 보았다. 문득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분노도 원망도 담지 않았던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스승님, 저는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그것만이 지금 운선의 삶을 지탱하는 목표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오른손 주먹을 꽉 쥐어 보았다. 젓가락을 들 수조차 없을 만큼 망가진 오른팔이었으나 언젠가는 꼭 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운선을 바라보는 주운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운이 좋아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저 팔은 잘라야 할 텐데……’

그러나 헤어질 때까지 그 말은 차마 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갑자기 객잔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경악하는 신음과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운선은 그들의 시선이 쏠리는 쪽으로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좋은 술 한 동이만 가져오시게.”

우렁차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건장한 어깨의 사내가 객잔의 2층 계단 머리 쪽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한 계단씩 밟을 때마다 나무가 곧 부서질 것처럼 거친 소리를 내는 것이 여간 시끄럽지 않았다. 그는 큰 도(刀)를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그의 등짝을 전부 차지하고도 자루가 머리 위로 삐쩍 올라와 있었다.

“간덩이가 부었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주운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운선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주운의 대답을 재촉했다. 주운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모른 척하면 또 운선이 귀찮게 할까 봐 망설여졌다.

“그러니까……”

주운이 막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아, 이게 누구신가?”

객잔 안을 둘러보던 사내는 주운의 얼굴을 발견하더니 반가운 낯빛이 되었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운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오직 주운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주 낭자 오랜만이네. 검선(劍仙)은 여전하신가?”

운선은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은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그에 비해 코와 입은 꽤 작은 편이었는데 늘 웃고 있어서인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은데요?”

주운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등지고 돌아앉았다. 머쓱해진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제야 운선을 발견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이고, 동행이 있었구먼. 자네는 누구신가?”

운선이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자, 주운이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게 도리 아닌가요?”

“아차차.”

사내는 큰 실수를 했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운선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나는 쾌도난적(快刀亂賊) 적우(赤雨)라고 하네. 얼추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게.”

“저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이라 이름을 알리기도 부끄럽습니다. 강운선이라고 합니다.”

적우는 예쁘장하게 생긴 것에 비해 낯빛이 어두운 운선을 보니 필시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는 워낙에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가리지 않는지라 그저 새로운 친구를 만난 것이 반갑기만 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합석하여 근황이나 전하세.”

적우는 두 사람의 허락도 없이 냅다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운선아, 하등 친해져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다.”

주운은 그가 몸 아래 있던 의자를 왼발로 차내며 운선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운의 돌발 행동에도 적우는 껄껄 웃으며 조금의 불쾌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운선에게 말을 붙였다.

“괜찮으십니까?”

“뭘?”

운선은 적우의 엉덩이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주운이 의자를 차버리는 바람에 적우는 허공에 엉덩이를 띄우고 앉아 있었다. 두 다리로만 버티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불편함이 없다는 듯 태연했다.

“원래 주 낭자가 고약하기로는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단다.”

주운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으나 적우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에 대한 험담을 계속했다. 참다못한 주운이 퉁명스럽게 이죽거렸다.

“이름도 고약하지. 때마침 내리는 비, 적우(適雨)가 아니라 쓸데없이 많은 비, 적우(積雨) 아닙니까?”

“주 낭자가 구름(雲)이니 비(雨)가 된 도리로서 내가 따라다닐 수밖에.”

적우가 능글능글하게 받아치자 주운은 약이 올라 얼굴이 벌게졌다. 운선은 혹여 그녀가 마음이 상할까 염려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적우의 유쾌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부터 슬슬 느껴지던 경련도 그와 함께 있으니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두타공파(頭陀空派)다.”

“두타공파의 제자들이다!”

세 사람이 식사를 마칠 때쯤,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하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소년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적우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차마 나서지 못하고 이쪽을 계속 흘끔거리던 무림인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덧붙였다.

“이제 좀 술맛 나겠구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교 놈이 드나들어? 드나들길.”

“저놈이 쫓겨날 걸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하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소리에 운선은 어쩔 줄 몰랐다. 분명 시비가 붙을 것 같은데 주운과 적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게 독설만 날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선의 염려대로 두타공파의 제자들은 그들의 탁자로 다가왔다.

“세 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리 중에 유독 얼굴이 하얗고 이목구비가 단정한 이가 나서 가볍게 묵례를 했다.

“아이고, 또 마중을 다 나오셨네.”

적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으며 두타공파의 제자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무리 중에 혈기가 넘치는 몇은 적우의 무례함에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러나 앞에 나선 소년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저는 두타공파의 5대 제자, 백형진이라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세 분의 존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운선은 순간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되는지 고민했다. 그때 탁자 아래에서 주운의 발이 그의 발을 툭 하고 쳤다. 운선은 그 뜻을 알아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태을신교(太乙神敎) 제자, 적우요. 설마 모르고 물어본 건 아닐 테고.”

적우는 뭐가 재밌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형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보름 뒤 오대산검이 주최하는 무림대회가 열립니다. 아쉽지만 초대받지 못한 문파의 제자는 참여할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정중한 말투였으나 그 행간에는 상대를 한참 깔보는 뜻이 숨어 있었다. 갓 스물이 넘은 젊은 나이였으나 강호 경험이 많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적우가 그 정도의 행간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형진을 처음 보았음에도 마음이 껄끄러운 것이 영 마땅치가 않았다. 차라리 그 뒤편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들이 더 인간적이었다.

“싫다면?”

주운은 적우의 대답에 피식 웃었다. 자신도 두타공파 제자들의 거만함이 꽤 불쾌하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적우를 도와줄 마음은 없었으나 통쾌하게 두들겨 패줬으면 좋겠다는 약간의 바람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럼 저희도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요.”

형진은 오른손을 들어 뒤에 선 사제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일곱의 소년들이 저마다의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너희 같은 꼬맹이들에게 우리 귀염둥이를 보여 줄 필요는 없겠지.”

적우는 어깨에 메고 있던 도를 풀어 운선에게 건넸다.

“아우님, 내가 저놈들을 한 수 가르치고 올 테니, 우리 귀염둥이 좀 잘 봐주시게.”

얼떨결에 운선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적우는 예의 얼굴 가득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귀찮으니 한꺼번에 덤벼라.”

적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곱 개의 검이 기교 없이 일자로 쭉 뻗어 들어왔다.

“활인(活人)검”

주운은 감탄하는 눈빛으로 일곱 제자의 절도 있는 검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쾌검에 적합한 ‘수월심’은 가볍고 잘 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때문에 베는 상처보다 찌르는 상처를 내기 쉽고 내공을 흘려보내는 데 적합했다. 반면 활인 검법은 묵직하고 초식의 변화가 없으므로 굵고 무거운 검을 써야만 했다. 일곱 제자가 쓰는 검 전부가 검법에 맞게 제작되었다. 내공이 강한 이가 사용한다면 그 어떤 무기보다 막강할 것이었다.

“참으로 정직한 검법이구나. 하지만 주인이 영 시원찮으니 내 옷깃도 스치지 못하겠다.”

적우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몸짓으로 일곱 소년의 가운데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일곱 개의 칼이 자꾸 적우의 손안에 잡혔다 빠져나갔다.

“젓가락!”

운선은 그제야 적우가 칼 대신 젓가락을 들고 나간 것을 알았다.

“허세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주운은 흐뭇한 얼굴로 적우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역시 태을신교의 무공은 신기하고 놀라웠다.

“활인검 5 초식”

형진의 외침과 동시에 일곱 제자의 보법이 단번에 바뀌었다.

“운지행?”

일류 고수들도 연마하기 힘들다는 최고의 경공을 어찌 스물도 안 된 햇병아리 제자들이 쓴단 말인가? 실제로 보법만 바뀌었을 뿐 그들의 초식은 단순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위화감에 상대는 당황하여 틈을 보이게 되는 것이었다. 적우 역시 같은 이유로 보법이 흐트러졌다. 형진은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위험해요!”

적우의 등 뒤로 형진의 칼날이 날아왔다. 명문정파의 무공이라기에는 다소 졸렬한 초식이었으나 어찌 됐든 등에 꽂힌다면 명백히 중상을 입힐 일격이었다. 운선은 종연이 칼을 맞던 그 장면이 생각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힘껏 소리쳤지만 이미 칼끝이 적우의 신주혈에 거의 다 닿았다.

캉!

묵직한 탁음을 내며 활인검을 쳐낸 것은 주운의 검, ‘월심’이었다.

*** 기연(奇緣): 기이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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