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46화 (146/209)

146화. 雲蒸礎潤(운증초윤)

당나루는 나루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낡아빠진 나룻배로는 이 길고 검은 강을 건널 도리가 없었다. 하여, 초옥의 상태는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곳에 정말 있을까?”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망설이는 서용과 달리 찬영은 거침이 없었다.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 같았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문소리에 서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겁이 많은 그였건만 초옥의 내부는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층고가 높으나 계단은 없었고 정 중앙에 두 그루의 거대한 노송(老松)이 지붕까지 뻗쳐 있었다.

“우와!”

신묘한 나무의 자태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줄기가 얽힌 모습은 영락없는 연리지이나, 서로를 감싸 안았다기보다는 싸우는 모양새였다. 누구 하나가 죽으면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기어코 상대를 해치려는 꼴이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나무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보자.”

쓸데없이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두 사람은 신중하게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나루가 목적지인 이유는 뻔했다. 그리고 열쇠를 숨겼다면 나무만큼 훌륭한 은신처는 없었다. 이왕이면 그들이 오기 전에 열쇠를 찾아 사라지는 게 최선이었다.

“잠깐!”

“왜?”

한참을 뒤지던 중이었다. 찬영의 예민한 귀가 움찔거렸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발소리가 나더니만 곧 두런두런 대화가 들려왔다. 다른 침입자였다.

“위로!”

두 사람은 재빨리 나무 끝까지 올라갔다. 다행히 지붕 쪽에는 한여름 햇살을 가득 받아 짙푸른 나뭇잎이 풍성했다. 기어이 고개를 뻗쳐 쑤시지 않는다면 눈에 띄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의 당사자 둘이 초옥 안으로 들어섰다.

“아란아, 굳이 귀한 네가 수고할 필요가 있겠니? 차라리 내가 있는 게 낫겠다.”

“봉언니야말로 굳이 오실 이유가 없어요.”

두 사람 모두 옷차림이 자못 화려했다. 그러나 언니라 불린 쪽은 호칭과 달리 건장한 사내의 골격이었다. 간드러진 몸짓과 말투였지만 찬영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설마 경국 황실에서 우리를 엿 먹이진 않았겠지?”

“그럴 리 없어요. 이석은 지금 몸이 달았거든요. 이러다가는 이금에게 황좌를 뺏길 테니 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긴, 강호 문파들마저도 금황자 편을 든다지 아마?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 천서국을 끌어들이다니, 멍청이가 아니고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석은 황좌에 오를 자질이 없어.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고 하는 짓일까?”

“그럴 리가요. 이석이 우리에게 지름길을 내어줬으니 감사할밖에요.”

아란이라 불린 여인은 화려한 복색만큼이나 용모가 아름다웠다. 태도 역시 점잖고 예의가 바른 것으로 보아 제법 고귀한 신분인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사내와는 사형제쯤 되는지 굉장히 친밀해 보이면서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였다.

“정말 혼자 있어도 되겠니?”

“그럼요, 봉언니. 뭘 그리 걱정하세요?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봉씨 사내는 잠시 망설이더니 아란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한 번 더 주의를 시킬 요량이었다.

“얘야, 황실의 전갈에는 선운검파의 제자들이 온다고 하였으나, 만약을 대비해야 한단다. 황석파의 장문주는 아주 간교한 인물이라 하더라. 꽤 실력 있는 고수를 붙였을지도 모르지. 또한, 신교 놈들도 조심해야 한다. 혹 위험하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물러서야 한다.”

“장문주가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황석파 정도는 거뜬하지요. 헌데, 신교는 잘 모르겠어요. 소문의 그 강운선이라는 자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흠, 강뭐시기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단다. 다만 칠원성군이라면 일전에 운평에서 겨룬 적이 있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녹록지 않은 자들이더구나. 칠원성군은 그렇다 치고 검귀 성곤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지. 하마터면 팔 한쪽을 잃을 뻔하였다.”

봉씨 사내는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성곤이 그들을 죽일 마음이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다시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검귀는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칠원성군 중에도 둘만 남았다 들었는데 겁낼 게 뭐가 있습니까?”

아란은 까르르 웃으며 사형의 걱정을 일축했다. 평소 자만심이 가득한 그가 이리 걱정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였다.

“아니다. 그 음흉한 검귀 성곤이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나타날지 몰라.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곡사형밖에 없단다. 하여, 부디 신중해야 한다.”

“네, 네.”

대충 듣고 흘려버리는 상대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평소에도 아란은 믿음직하였다. 사실 걱정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자홍 오라버니에게나 가보세요. 아무리 목사숙이 함께라고 해도, 봉언니까지 오면 든든하지 않겠어요?”

“그럴까?”

안 그래도 마음이 쓰이던 차에 먼저 말을 꺼내니 퍽 반가웠다. 하긴, 고작 선자 셋을 감당하지 못할 아란이 아니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때 자신이 도우러 와도 늦지 않았다. 덩치만 크고 나이만 먹었지 자홍이야말로 여전히 해맑은 소년 같기만 했다.

“그럼 내 금방 갔다 올 테니 위험한 일이 있거들랑, 신호를 보내렴.”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그들이 가져가려는 물건을 뺏으면 되는 거지요? 그 이후에 죽이든 살리든 제가 알아서 합니다?”

“뭐, 그건 네 마음이지.”

간드러지게 웃으며 봉씨 사내는 곧 초옥을 벗어났다. 막상 발길을 돌리니 다른 쪽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커졌다. 어차피 이 모든 수고는 그의 황위를 위한 일이었다. 아란에게는 미안하지만 자홍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큰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흐음, 여기서 뭘 찾으려는 걸까?”

혼자 남은 아란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탓에 아슬아슬하게 나무 위에 앉은 서용은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일부러 아문혈을 눌러 신음은 참고 있었으나 다리도 저리고 손가락에 힘도 없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어?’

그때, 줄기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딱 사람 눈알만 한 크기였는데 급한 대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면 얼마간은 더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으차!’

다행히 팔을 한 번 뻗자마자 구멍에 손이 닿았다. 손가락을 꿈틀꿈틀 움직여 자세를 잡으니 아까보다 훨씬 편해졌다. 이제 살겠다 싶어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어? 이게 뭐지?’

한편, 아란은 위에 누가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경국에서 서신이 온 것은 달포 전, 당나루에서 물건을 찾아주면 연향에 배치한 병력을 빼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병력을 물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여태 물고 늘어지던 신화정을 거저 주겠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천서국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체 그게 뭐길래, 신화정을 포기하느냔 말이야.’

경국의 황위 다툼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석과 이금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금이야말로 경국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의 오라버니이자 황제의 유일한 후계자인 자홍은 꽤 오랫동안 경국을 잡아먹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백여 년간 우호적인 관계를 지켜왔던 두 나라였지만 균열이 생긴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 시작은 아마도, 려국의 멸망부터였을 것이다.

‘사부님의 우려처럼, 이 일에 신교가 개입한다면 분명 려국과 관련된 일이다. 그저 물건을 뺏을 일이 아니라,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또한, 경국 황제의 환심을 사 이금을 경계하는 것 또한 우리의 할 일.’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누구보다 잘 아는 아란이었다. 하여 봉천을 배제해야만 했다. 무공 실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최고이지만 경솔하고 충동적이라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검귀 성곤이 살아있다면 모를까, 감히 나를 이길 자는 없을 터.’

그녀 또한 봉천만큼이나 자신감이 넘쳤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드디어 초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용, 아까부터 왜 나무를 더듬고 있어? 많이 외로웠나 봐?”

긴장감이 풀린 탓에 찬영이 평소보다 더 촐싹거리며 물었다. 거의 반 시진을 꼼짝하지도 않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게 말이야. 찾은 거 같아.”

“뭘?”

서용의 손에서 빛나는 작은 구슬에는 선명하게 '霧(무)' 자가 보였다. 그토록 찾던 마지막 열쇠가 틀림없었다.

“어째서 저 높은 줄기 속에 있었을까?”

“그게 지금 중요하냐? 예상이 맞는다면 저들의 정체는 천서국의 자객일 거다. 우선 너희 고모에게 서신을 보내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해라. 우리만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역부족이야. 특히 저 봉뭐시기라는 이는 풍림보다도 한 수 위인 듯싶다.”

“흐음. 그럼 일단 가지고 도망칠까?”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서용의 말에 찬영도 허투루 생각할 수 없었다. 견문이 짧은 그가 보아도 두 사람의 기운이 무시무시했다. 여자 쪽이야 어찌어찌 막아보겠지만 봉씨 사내 쪽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허나 두 사람이나 나타났다는 건, 그 이상의 인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섣불리 빠져나가다가 천서국의 무리에게 들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음, 차라리 이렇게 하자.”

서용은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꽤 변수가 많은 작전이었지만 그래도 무작정 도망치는 것보다 몇 배는 나았다.

“좋아, 그리해보자.”

***

나룻배에 옮겨 탄 후에도 두 사람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직 저 멀리 붉은 옷과 하얀 옷이 어우러지고 뒤엉키고 있으니, 계획이 잘 진행 중인 듯싶었다.

“어휴, 맹꽁이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저 여자랑 맞붙어 싸우다간 온몸에 피멍이 들겠구나.”

“야! 돌제비(다람쥐)! 허튼소리 그만하고 열심히 저어라.”

서용이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대충 수리한 나룻배였으나 노를 젓는 힘만큼 쭉쭉 밀려 나갔다.

끼이익, 쩍.

끼이익, 쩍.

고요한 새벽에 노 젓는 소리는 처녀 귀신의 흐느낌 같았다. 한층 검게 보이는 물은 끈적끈적하여 빠지면 대책이 없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서 내리니 망정이지 이 넓은 강을 건넜더라면 양팔을 내어줘야 할 정도였다.

“열쇠를 빼앗겼으니 애가 타겠지. 반대로 천서국은 이쪽에서 숨겼다고 생각할 테고. 저들이 싸우는 동안 시간을 벌 테니 어부지리(漁父之利)가 따로 없구나.”

“안심하기는 이르다. 아란이라는 여인이 그리 아둔해 보이지는 않았거든.”

“뭐, 그 전에 우리가 빠져나가면 그뿐.”

일단 나루터를 벗어나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천서국 쪽에서 가은 일행을 추궁하는 동안 산등성이를 넘으면 바로 연향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외길이 아니므로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연향까지만, 제발.”

헤죽거리는 찬영의 뒤에서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는 서용이었다.

*** 운증초윤(雲蒸礎潤):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려고 할 때는 집의 주추가 먼저 눅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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