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各個擊破(각개격파)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은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저 흉측한 붉은 옷의 사내가 나타날 것 같았다. 잡히면 그대로 끝이었다. 실컷 괴롭히다가 얼굴 가죽을 뜯어내겠다던 봉천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헉!”
그때, 목덜미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더니 일시에 몸이 마비되었다. 비명이라도 질러보려고 했으나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혈도를 제압당한 것이었다.
‘아, 들켰구나.’
극도의 두려움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치환되었다. 얼굴을 망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 때마침 나뭇잎에 고여 있던 빗방울이 정수리 위로 톡 떨어졌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니, 마치 눈물방울 같았다.
“행여 소리를 낼까 봐 아문혈을 짚은 것이다. 너를 해하려는 게 아니니 안심해라.”
‘어? 이 목소리는.’
거칠지만 묵직하고 다정한 목소리. 근래에 들어본 듯 익숙하고 편안했다. 가은은 눈동자만 도로록 굴려 사내의 낯을 확인해 보았다.
‘마진건? 어째서 당신이?’
진건은 두 손으로 가은을 버쩍 안아 들었다. 일단 딸아이가 무사하여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위험했다. 이러쿵저러쿵 수다 떨 시간에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급선무였다.
“안전해지면 혈도를 풀어주마. 당장은 답답하더라도 참으렴.”
가은은 대답 대신 눈을 깜빡거렸다. 느닷없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댔으니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진건의 품에 안기자 긴장이 풀어졌다.
‘아니다. 흔들리면 안 돼. 악랄한 놈들이니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녹아내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뚝뚝한 음성이 세상 다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차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연향을 벗어나면 몸을 숨기기 쉬울 테지. 천서국이 아무리 개입하려 해도 경국의 땅까지는 쫓아 오지 못할 것이다.”
중한 임무를 맡았기에 언제까지고 가은을 지켜줄 수 없었다. 최대한 경국의 영토 안에서 보호를 받도록 연향을 벗어나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운평까지만 쉬지 않고 걸어라. 추격자들은 내가 어떻게든 막아보마.”
“감사합니다.”
객잔에서 수십 리를 멀어지고 난 뒤에야 진건은 등에 업은 가은을 내려주었다. 아직 연향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지척에 운평이 있었다. 아무리 무공 실력이 형편없는 가은이더라도 거기까지는 혼자서도 갈 수 있으리라.
“저, 사백님.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막상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열쇠를 찾지 못한 데다가 은률의 생사도 모르니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러나 진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떠나라. 네가 있으면 방해가 된다.”
“네.”
매몰차게 돌아서는 그를 더는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돌아서서 사문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자괴감이 온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일단 기다리자.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운선은 여러 선배를 향해 정중하게 읍을 올렸다. 이 중에 그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세상 여유로운 태도와 표정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네. 미약에 당했으나 다행히 독은 아닌 듯합니다.”
찬영은 어깨에 둘러멘 서용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운선이 왔으니 더는 두렵지 않았다. 여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던 그였는데 이번만큼은 마음이 든든하였다.
“제가 물건의 주인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시지요? 허면, 교도들을 데리고 떠나도록 하지요.”
후배들의 상태를 확인한 운선은 몸을 돌려 곡해고를 바라보았다. 처음 마주한 사이였건만, 어쩐지 만나본 적이 있는 듯도 싶었다.
“흐으음.”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한 곡해고와 달리 장은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대로 강운선을, 열쇠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곡어르신의 뜻일 뿐, 저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강대협, 물건을 숨긴 이는 선운검파의 장문 소소정입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찾지도 못했을 것이 아닙니까? 정 우기시려거든 물건은 놓고 가시지요.”
“흥, 아주 꼴값들이구나. 누가 누굴 보내주겠다는 게냐? 내 객잔에 발을 들인 이상 그 누구도 함부로 나갈 수 없다.”
곡해고의 말을 신호로 아란이 편초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상대는 장은과 찬영이었다. 혹여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사숙들이 돌아올 때까지만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사부님 쪽은 아예 걱정도 하지 않았다. 고작 려국인들이 뭐 그리 대단하랴 싶었다.
“어린 낭자가 건방지구나.”
곡해고의 살기 어린 눈을 본 무영은 더는 싸움을 피하기 어렵겠다는 결론이 섰다. 혼자서 셋을 상대하기는 버거웠지만, 운선이 함께 있으니 자신이 생겼다.
“월영(月影)”
검을 뽑은 줄도 몰랐다. 은빛 검광이 곡해고의 안면을 향해 뻗어 나왔다. 무영은 어떻게든 빨리 제압하여 위기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곡해고만으로도 버거운데 그의 사형제 셋이 합류한다면 승산이 없었다.
“서풍(西風)”
무영의 의도를 눈치챈 장은 역시 검을 꺼내 들었다. 황석파의 내전 검법인 월산검이었다.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싸움에서는 권풍보다 검법이 훨씬 유리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운선도 마찬가지였다.
“월영(月影)”
같은 초식이었으나 무영과는 완전히 다른 무공 같았다. 속도는 느린 대신에 위력은 곱절이었다.
“건방진!”
좌우로 찔러 들어오는 검날을 피하려고 곡해고는 뒤로 크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예순을 넘은 나이건만, 웬만한 청년만큼이나 동작이 날랬다.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바빴을 텐데 곧바로 암기를 날렸다.
챙
챙
챙
챙
순식간에 날아온 네 개의 암기는 별 모양의 표창이었다. 비파의 줄을 튕겨 날리는 그의 대표적인 무기였다.
“전혀 녹슬지 않았군.”
마지막 철편을 가까스로 피한 무영이 혀를 끌끌 찼다.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반대편에 선 운선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살아야, 려국이 산다.’
수십 년 전의 죄업이 떠올랐다. 고작 사랑 때문에 나라를 버렸던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의 상황이 온다면 운선을 구해야 했다. 설령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운선아, 스물네 번째 초식이다.”
“네, 사숙.”
스물네 번째 초식 월유잔영(月流殘影)은 주운과 함께 수백 번 합을 맞춰본 초식이었다. 엄격한 무영의 지도 덕분에 눈을 감고도 휘두를 정도였다.
“아주 귀엽구나.”
흩어졌다 모였다 보법이 얽히는 와중에도 대열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무영의 하얀 옷자락이 운선의 인영 주변을 한 바퀴 돌아드니 거대한 달무리가 되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동작에, 구경하던 찬영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뱉어냈다.
‘부드러운 검선의 검무와 절도 있는 강숙부의 움직임이 어우러지니 약점이 아예 없구나.’
안 그래도 가느다란 곡해고의 눈매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비파 줄을 튕겨 뻗쳐오는 검기를 툭툭 쳐냈으나 조금씩 한계를 느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검진이 그를 향해 좁혀 들어왔다.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검기를 막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흥, 잔재주일 뿐!”
좌라랑!
곡해고는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네 개의 손가락으로 한꺼번에 줄을 튕겼다. 금슬에 단단히 묶여 있던 네 개의 줄이 단번에 투두둑 끊어지더니 곧바로 무영을 향해 날아갔다.
챙
챙
챙
“억!”
마지막 줄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왼쪽 어깨를 내어주고 말았다. 가느다란 줄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어깨의 살점 일부분을 베어냈다.
“사숙님!”
무영의 하얀 옷자락이 어깨부터 붉게 물들었다. 재빨리 혈도를 눌러 지혈하였으나 이미 상처에서 검은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독이구나.’
비틀거리는 무영의 모습과 상처의 색을 살펴본 운선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달았다. 원래도 악랄한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직접 당하고 보니 훨씬 더 소인배였다.
“사백님, 물러서십시오.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굳이 나서려는 무영의 앞을 막아선 운선은 검을 오른손으로 바꿔 잡았다. 눈을 감고 구결을 읊조리니 끓어오르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단전을 짓누르던 기운이 완전히 스러졌을 때, 그의 왼손 주변으로 후텁지근한 공기가 모여들었다. 휘돌아 감아 드는 무형의 표풍(飄風)은 운선이 주먹을 내지르는 동시에 곡해고를 향해 돌진했다.
퍽!
한편 다른 쪽의 싸움도 만만치 않았다. 수십 합을 겨루는 동안 장은의 자신감은 점점 바닥을 찍었다. 어린 여인이라 만만히 보았건만, 직접 대결해 보니 완전히 오산이었다.
“풍림이 당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와 견주어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당황했을 뿐, 곧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채하(彩霞)”
장은이 머리 위로 둥글게 반원을 그리자, 여태 푸른빛에 가까웠던 검광이 붉은빛으로 변했다. 초식에 이름처럼 붉은 노을이 주변에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밀린다.’
아란은 오른손에 든 편초의 손잡이를 왼손으로 바꿔는 즉시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휘두르는 높낮이가 바뀌자 채찍의 원심력이 크게 늘면서 세찬 바람 소리를 냈다. 만약 저 가운데에 사람이 들어간다면 그대로 몸이 두 동강이 날 만큼의 위력이었다.
“아직 서툴구나.”
그러나 장은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미 편초의 초식이 단조롭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공격의 반경에서 몸을 빼낸 뒤였다. 길이가 길어 근력이 약한 여인에게는 최적의 무기였으나 근접전에는 유독 쓸모없는 무공이었다. 또한, 동작이 크다 보니 편초를 거두어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당연하게도 초식과 초식 사이에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우리는 여기까지! 곡우(穀雨)”
오른손에 든 검으로 편초의 끝을 내리치고, 왼손으로는 권풍을 날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아란은 그 무시무시하다는 영명권을 얼굴로 받게 생긴 것이었다. 아무리 겁이 없고 대범한 그녀였지만 안면으로 몰아쳐 오는 권풍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였다.
챙!
“윽.”
장은은 엄청난 힘에 부딪혀 한 장 이상을 튕겨 날아갔다. 다행히 굵은 소나무 둥치에 닿아 큰 부상은 막을 수 있었다.
“감히 대 천서국의 황녀를 노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사람 머리통 두 개 만한 철퇴를 든 사내가 장은을 향해 일갈했다. 그는 바로 사왕천의 증장천왕(增長天王) 금형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