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1편
(프롤로그)
얼마 전 까지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을 벌이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평온한 2022년 11월 말. 내가 다니는 인국대학교도 대면 강의에 돌입하였다.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그동안 원격 강의로 인하여 부족해진 여러분의 상황을 고려하여 강의 진도를 조금 늦추었지만 이제 다들 적응할 때가 되었지 않습니까?”
강의가 끝나기 5분 전부터 문 밖에 대기해 있다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뒷정리를 하였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표정을 살펴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 나가며 말하였다.
“이번 쪽지시험은 지금까지 강의를 잘 따라왔다면 쉬운 시험이었습니다. 점수가 육십 점 아래인 학생들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 추가 보고서를 제출해주세요.”
내가 검수할 보고서이지만 불만이 생기지는 않았다. 지도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유학 준비는커녕 석사 졸업 논문이나 제출하고 사회로 방출되는 신세가 되었으리라.
연구실로 돌아가 산더미처럼 쌓인 참고자료를 확인하며 석사 연구 논문에 박차를 가했다. 뻣뻣해진 목을 주무르니 벌써 저녁이 다 되었다.
“어학 실력은 부족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시험을 미리 통과해 놓으니 참 편해.”
DALF, 프랑스어 공인인증 시험의 C1등급 합격증이 보이니 마음이 풀렸다. 이 정도 실력이면 유학 과정에서 언어를 또 배울 필요는 없을 수준이다. 옆에 있던 연구생이 볼멘소리를 했다.
“현상이 형은 뭔 재주가 그렇게 좋아요? 나는 영어 따라가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프랑스어를 뭐 그리 잘 배우지? 그 시험 대충 토익 만점 수준 아니에요?”
“토익 만점이랑 비교하는 시험은 등급이 낮은 B2고 그 이상은 비교 대상이 없지.”
“우와 재능충 ······.”
이런 말을 하는 녀석도 재능이 있었다. 나처럼 유학이 아닌 처음부터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지도교수님이 전격적으로 키우는 인재였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쌀톡이 도착했다.
[오빠! 혹시 제 졸업논문 초안 확인해 보셨어요?]
[확인해 봤어. 조선 말기의 경제구조와 수출구조에 관한 논문이었지?]
[자료를 많이 찾아봤는데 도서관에서 논문 복사하는 것도 잘 모르겠어요. 통합 사이트에서도 검색하기 힘든데 오빠가 몇 개만 집어주시면 안 돼요?]
학부생 중 나에게 달라붙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이래저래 도움을 주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어장관리 같지만 내 입장에서는 손바닥 위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모든 자료는 직접 읽어보고 터득해야 알 수 있으니 20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전산실 프린터로 보내 인쇄해 버렸다. 다른 연구생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말했다.
“자료를 왜 인쇄하세요? 그냥 PDF로 주는 게 돈도 안 들고 편하지 않아요?”
“그럼 버릇 나빠져, 대학생이라면 책을 읽어서 자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는데 들어가 봐야겠다. 호진이 형은 안 들어가세요?”
“내가 들어갈 깜냥이 되냐. 다들 먼저 들어가.”
박사 과정 6년차인 장호진은 눈에 핏대를 세우며 나를 노려보았다. 지도교수의 관심이 나에게 쏠려있으니 자신이 찬밥신세가 되었다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보았자 자기 잘못이다.
프린트는 찾았는데 주말에 만나서 줄 수 없었다. 막내 동생이 수시에 합격해 이번 주말에 집안 어른들이 모조리 양평에 있는 본가로 모일 예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양평으로 내려가기 위해 차에 쌓인 먼지를 털고 있었다. 약속한 대로 거대한 덩치의 내 외종사촌 조일준이 거대한 가방을 맨 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뭔 가방이 그렇게 크냐? 혹시나 컴퓨터라도 분해해서 가져왔어?
“건축과 입학하는 사촌동생이 있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전공서적을 주더라. 무게만 한 15kg 되겠는데 인천에서 이거 가지고 오느라 고생을 했어.”
외종사촌인 조일준은 187cm에 달하는 큰 신장에 동아리 시절부터 권투를 해서 아마추어 대회에 나간 적도 있는 녀석이었다. 차에 옮기려고 가방을 들자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쓸데없는 책이 좀 많을 거야. 어제 밤늦게 책을 받아서 확인 안 하고 가져왔거든.”
“공업수학이랑 미적분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이 책은 또 뭔데? 전자기학 개론? 현준이 건축공학과야. 전자기학 안 배우는 게 확실한데 이게 왜 들어있지?”
“이놈의 인간들이 아무렇게나 필수과목 서적을 쑤셔 넣었네.”
책의 목록은 미분적분학 세 종류, 확률과 통계 두 종류, 공업수학, 일반화학 그리고 전자기학 개론이었다. 화공과 대학원을 다니는 녀석은 책을 훑어보며 말했다.
“일반화학은 교양필수로 배우는 경우도 있으니 넣어두자고. 중복되는 책은 네가 따로 보관하면 괜찮을 것 같아.”
“그러자고. 지금 양평으로 출발해도 되겠냐?”
“물론. 시골 공기라도 마시면서 조금이라도 건강해지자고.
차에 시동이 걸리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녀석은 담배를 피우려다 껌을 찾으려고 글러브 박스를 열었고 아직 안 뜯은 마스크를 꺼내면서 말했다.
“코로나가 돌아다닐 때는 좀 덜했는데 코로나가 끝나니 더 지옥이 되었네.”
“너네 지도교수는 아직도 난리치고 있냐?”
“파벌싸움에서 밀려나 찬밥신세가 되었는데 어련하겠어? 어제는 아예 발광하면서 우리를 굴리는 이유가 기계보다 가격이 싸서 굴리는 것이라고 욕을 하더라니까.”
내 외종사촌 조일준은 한때 잘 나가던 녀석이었다. 인천 과학기술원에 당당히 합격하여 유학파 교수의 눈에 들어 석박사 통합과정을 이수하며 연구원으로 군 생활까지 했다.
나도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기 전 까지는 열등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런 녀석이 지도교수가 권력에서 밀려난 이후 이토록 엉망이 될 줄은 몰랐다. 녀석은 껌을 질겅거리며 말했다.
“연구실 상황 생각하니 담배 마렵네. 어? 쌀톡 왔네? 현준이 좀 늦는다는데?”
“좀 늦어? 점심 때 도착한대?”
“아냐, 할아버지를 먼저 만나서 점심 먹고 도착한대. 먼저 가서 기다려야 하나?”
“여기가 팔당IC 근처니까 남양주에서 빠져나가서 조금 시간 때우다 점심 먹고 들어가자. 좋은 식당을 알고 있어.”
사학과 학부생 시절 답사를 두 번 참여했었다. 처음에는 서울 경기 일대의 각종 사적지를 답사하고 그 다음 답사에서는 경상도 일대의 사적지를 답사했었지.
당시 정약용의 생가 근처에 있는 박물관에 방문한 뒤 한식집에서 점심을 해결한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을 떠올려 국도로 빠져나가니 일준이가 주변 경치를 보며 말했다.
“여기 경치도 좋고 공기도 맑네. 잠깐 들러서 등산이나 할래?”
“아마 야트막한 동산에 트래킹 코스가 있을 거야. 그 사이에 담배 피우려고 그래?”
“정말로 운동 좀 하려고. 이러다가 살이 더 찌면 운동도 못 하잖아.”
마침 다산길이라는 트래킹 코스 입구에 주차장이 있었다. 일준이는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다 다시 차로 돌아가 가방을 두 개 모두 꺼내오고 말했다.
“운동 효과가 있으려면 등짐을 짊어져야지. 너도 짊어져라.”
“전공서적을 넣고 가자니 너무 무거운데. 너처럼 덩치가 큰 줄 아냐?”
조금 전 까지 담배를 피우던 녀석이 심호흡을 하면서 건강을 챙기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분의 책을 트렁크에 넣고 빈 가방인 채로 돌아와 한 소리를 했다.
“이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면 말짱 도루묵 아닐까. 담배 끊는 거 어때?”
“어차피 서쪽에서 날아온 미세먼지를 사이좋게 마시고 있잖아. 담배 정도야 별 거 아니야.”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니 녀석도 내 걸음을 따라왔고 이내 땀이 올라왔다.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바라보니 코스에서 벗어난 샛길이 보였다. 오색 천을 본 일준이는 궁금한 듯이 물어보았다.
“저거 뭐냐? 무당집에 달려 있는 끈 같은데. 가 볼까?”
샛길을 따라 올라가니 가끔 무당들이 치성을 올리는지 큰 나무에 오색 천과 밧줄이 묶여 있었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다 돌탑을 무너트려서 인사를 하고 돌탑을 다시 쌓으며 말했다.
“제 능력을 모조리 발휘할 수 있는 곳에 보내주십시오.”
천주교 신자인 일준이는 성호를 긋고 기도를 했는데 ‘학과장이 되어 지도교수를 족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돌탑을 쌓으며 따지고 들었다.
“남을 족치고 싶다는 기도를 해도 되냐? 그나저나 제법 오래 된 서낭나무네.”
“지도교수가 하는 짓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도 돼. 그럼 조선시대에 만들어 진 것 같아?”
“아마도? 주춧돌은 당집의 흔적인 것 같고 신으로 섬기는 바위는······. 호랑이 형상 같네. 이런 사적은 지원금도 별로 못 받아서 복원하기 힘든 형편이지.”
갑자기 음산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니 일준이는 아무 생각도 없이 서낭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트래킹 코스로 돌아가는데 길이 제법 넓어졌다.
“왜 길이 넓어졌지? 우리가 방향을 잘못 잡았나?”
“그럴지도 몰라. 그래봤자 방향만 알면 나갈 수 있는데 지도는 왜 먹통이지? 권외라고?”
내 스마트폰도 꺼내보니 권외라 되어있고 GPS신호도 받을 수 없었다. 주변에는 팔당호가 있으니 계속 나가면 트래킹 코스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저녁놀이 보였다.
“지금 시간이 오전 10시 맞지? 근데 왜 해가 서쪽에 있지?”
“시간이 문제가 아니야. 숲 자체가 변했어! 낙엽이 없고 파릇파릇한 잎이 남아있잖아.”
일준이의 말을 듣고 바닥을 보고 숲을 살펴보았는데 12월이 다 되어 낙엽이 모두 떨어진 숲이 아니었다. 너무나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는데 일준이가 내 배낭을 잡아채며 말했다.
“진정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가 우리가 있던 장소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주변 산의 형태를 봐봐.”
산을 자세히 보니 형태는 일치했지만 상세한 모습이 달랐다. 수림의 형태도 산림의 질도 모두 형편없이 부족하였다. 이걸 보니 떠오르는 사진이 있었다.
“이건 조림 사업 이전 산림과 흡사하잖아! 이렇게 훼손된 산림은 80년대 이후에 사라졌다고!”
“소리쳤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길을 따라서 내려가 사람을 찾아보자.”
방향을 잡기 위해 해가 지는 서쪽으로 계속 걸어가니 사람 두 명이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이 있었다. 희미한 빛에 의지해 오솔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걷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일준이도 느낌이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해가 지기 시작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숲을 살피던 녀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호랑이냐?”
숲 속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다섯 쌍의 눈동자. 맹수 특유의 안광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저런 크기라면 들개조차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르렁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우리는 산길을 박차고 뛰어갔다.
“튀어!”
“사람 살려! 누가 좀 살려주세요!”
뒤에 쳐져있던 일준이가 배낭을 벗어던지고 앞으로 치고나왔다. 맹수에게 도망치는 방법 따위는 배운 적도 없으니 일준이가 뛰어가는 방향을 따라 수풀을 헤치고 뛰쳐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파왔지만 멈추면 갈기갈기 찢겨 죽으리라. 앞서나가던 일준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뭔데! 아아아악!”
산세가 갑자기 변해 얕은 오르막길에서 급한 경사가 되었다. 일준이는 균형을 잡지 못 하고 허우적거렸고 나 또한 경사를 만나 몸을 허우적거리며 뛰어가다 결국 넘어져 버렸다.
다리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지기 무섭게 몸이 기울고 뭔가 충격이 느껴지며 왼팔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그 다음은 수풀과 나뭇가지를 뭉개며 구르다 시피 경사를 내려갔다.
진흙이 질퍽거리는 실개천으로 굴러 떨어지니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와 진흙탕을 기어 다니며 허우적거리자 늑대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준이는 이미 정신을 잃은 것 같고 나도 발을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데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승냥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한다! 어서 내쫓아라!”
불빛이 어른거리며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늑대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위기를 벗어나자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끔찍한 통증이 밀려오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정신을 차리니 퀴퀴한 냄새와 웬 메주 냄새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이 기억나며 눈을 뜨려 하였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억지로 기운을 차리려 하지 말게. 자네가 산길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네. 다행이도 크게 상하지 않았으니 당분간 시침(施鍼)과 탕약으로 치료할 것이네.”
침은 몇 번 맞아본 적이 있지만 보통 통증이 아니었다. 마치 작은 못을 박은 것 같은 욱신거림이 몸에서 느껴졌고 시큼하고 텁텁한 맛의 약을 조금씩 마시다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인 것 같았고 어두침침한 방 안을 살피니 있을 수 없는 물건들이 즐비하였다.
한지를 덧대 바른 창호, 얼룩이 남은 누비이불, 불이 꺼진 채 촛대 위에 있는 자그마한 등잔불, 그리고 손으로 더듬어 확인한 내 몸에 입혀진 한복까지.
내가 서양학을 전공했지만 한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충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중 한 시대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가 조선에 떨어졌다······. 이게 말이나 되나?”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일준이를 살펴보니 녀석은 정강이에 부목을 대고 손과 머리에 무언가를 싸매고 있었다. 집주인은 내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밖에서 헛기침을 하고 물어보았다.
“사흘 내내 잠을 자다 기력을 찾았으니 다행이로군. 들어가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몸이 멀쩡하였다면 제가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조선시대가 확실하기에 나름 사극의 말투를 따라해 답했지만 내 말과 집주인의 말에는 차이가 있었다. 당장 억양부터 다르고 발음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기력이 쇠한 목소리라 상대도 넘어갔지 멀쩡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면 이상하게 생각했으리라. 등잔 불빛으로 보니 집주인은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어르신께서 저희를 구명해주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되었으니 어서 기력을 찾도록 하게. 가만 생각하여 보니 궁금한 것이 있으니 양주목의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무슨 일로 왔는가?”
내 추측대로 조선시대에 온 것이 확실했다. 양주목의 마재라 하였는데 부목군현 제도는 1896년에 폐지되었으니 더 의심할 필요도 없다.
상대가 잠시 침묵해서 그 사이에 얼굴을 살펴봤다. 오른 눈썹에 흉터가 생겨 세 갈래로 나누어진 흔적과 안경을 쓰고 있는 외모를 종합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