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3편
(1장 - 천기(天機) (2))
왕과 관련된 일이 새어나갈까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정약용은 당장이라도 한양으로 올라가려는 눈치였다. 둘을 설득하는 방법을 생각하다 내 스마트폰에 잠들어 있는 정보가 생각났다.
“제가 가지고 있던 물품 중에 손바닥 크기에 검은 빛이 돌며 얇고 딱딱한 물건이 있었을 겁니다. 그 물건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면 실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록을 엿볼 수 있다 하였는가? 그런 물건이 있던 것 같았는데.”
정약용은 벌떡 일어나 성큼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는데 제발 망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일준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서양사 전공이라며······.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이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다고?”
“학과장이 자기가 관여한 수정 판본의 다운로드 숫자를 늘려야 한다며 사학과 학생들에게 다운로드를 권유했거든.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런 때에는 도움이 되네.”
산길에서 굴러서 팔다리가 부러지고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거린 상황에서 스마트폰이 살아있을까 궁금했다. 잠시 뒤 정약용은 스마트폰을 둘 다 가져와 우리에게 건넸다.
“이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실록이 고스란히 안에 담겨있다는 말인가.”
“확인을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혹여나 이 기물을 물로 씻어내셨습니까?”
“진흙에 물들어 물로 한 차례 씻어냈다네. 혹여나 물로 씻으면 아니 되는가?”
당연히 안 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전자기기를 알 리가 없으니 정약용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일준이는 전원버튼을 몇 차례 누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내 건 망가졌어. 액정이 깨진 사이로 물이 들어갔는지 켜지지도 않네. 네 폰은?”
내가 조만간 바꾸려 마음먹었던 은하수 10의 전원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에 금이 가고 뒷면이 무너졌음에도 전원이 켜졌지만 예상대로 배터리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 기물은 잘 해야 삼십 분 정도를 쓸 수 있습니다. 어서 지필묵을 준비하시어 제가 보여주는 글을 받아 적어주시지요.”
꽤 오래 사용한 스마트폰이라 어플을 켜면 배터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지필묵이 준비되는 동안 E북 어플을 켜고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찾아나갔다.
“지금부터 이 기물에 글귀가 표시될 것입니다. 세자저하께서 훙서하신 때는 음력 5월 6일이니 한 달 이전부터의 기록을 계속 살펴갈 것입니다. 한문으로 된 것이 보시기 편하실 겁니다.”
정약용은 조선왕조실록을,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을 미래의 기록을 베끼기 시작하였다. 5월 21일의 기록을 끝으로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고갈되었고 정약용은 기록을 확인하고 한참을 노려본 다음 말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말 할 수 없이 황당무계한 일이로군.”
정약용은 적힌 한자 글귀를 추리더니 핵심적인 글을 남기고 내가 말릴 새도 없이 화로에 넣어 불태웠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였다.
“오진으로 인하여 위의 병을 폐의 병으로 보았지. 이를 위해 폐의 약을 처방하였고 이것이 위를 망친 것이 분명하다네. 증세가 악화된 이후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네.”
“약을 계속 잘못 올렸다니 말이나 됩니까? 암살이 더더욱 의심되지 않습니까?”
일준이의 말도 틀리지 않았지만 정약용은 종이에 적힌 기록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징후가 보이고 훙서(薨逝 - 높은 사람의 죽음)하실 때 까지 열나흘이나 소요되었네. 암살이라면 확실한 약을 써서 단번에 죽일 것이니 이는 오진으로 인한 병의 악화라네.”
생각해보면 정약용이 정조의 암살을 주장한 이유는 정조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암살이 아니고 병사(病死)가 확실하지만.
효명세자의 정조의 사례와 다르다. 약을 허둥지둥 사용해가며 갈피를 못 잡다가 천천히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간 격이다. 그래도 답이 나왔으니 혹시나 일준이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았다.
“네가 보기에는 무슨 병 같아? 제대로 증세가 나타나고 보름 정도 뒤에 심각해지는 위장병이라면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위염인가?”
“중증 위궤양이 악화되어 발생한 위 천공 같아.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교무주임으로 야근을 하시고 병원도 안 다니시다 위궤양을 키워서 결국 큰 수술을 받으셨어.”
“자네의 부친께서 흡사한 병에 걸리셨다고? 증세가 어떠한가?”
“식욕이 줄고 소화가 힘들어지며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기도 하며 식도가 아파와 물을 들이켜기도 합니다. 다만 이러한 증세가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적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약용은 어느 새 붓을 들고 이 말을 한의학적으로 해석하여 적어두었다. 그 사이에 나는 일준이를 보면서 약을 만들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위궤양이면 네가 약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현대에 쓰는 약은?”
“만들어줄 수 있는 약은 탄산칼슘과 알긴산을 비롯한 제산제(制酸劑)야. 위궤양의 원인균인 헬리코박터 항생제는 꿈도 못 꾸지. 하지만 걱정 마라! 우리에겐 다산 선생님이 계시잖아?”
“내 의술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게.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전부일세.”
“이미 증세를 알고 계시니 병을 치료하는 것이 훨씬 쉽지 않습니까.”
일준이의 말 대로 증세도 모르고 진료를 하는 의사와 증세를 알고 접근하는 의사는 천지차이다. 정약용은 잠시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벗 중에 추사(秋史 - 김정희)가 있다네. 지금 시강원(侍講院)에 있으니 세자저하와 가까운 사이지. 환후를 알아보게 당장 서신을 준비해야겠군. 이런 종이로는 격이 안 맞으니······.”
정약용은 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우리 둘은 너나할 것 없이 눈을 마주쳤다. 일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급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어? 위험을 피하게 효명세자의 죽음을 내버려두고 다음 왕을 구워삶아서 우리가 이득을 챙기는 방법이 쉽지 않아?”
“다음 왕인 헌종은 8세에 즉위해서 세도정치 세상이 되겠지. 철종은 말 할 필요도 없고. 그나마 머리가 좋고 왕권도 보장된 효명세자를 살게 해야 우리와 이 나라에 희망이 생겨.”
이득이 아니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생존을 위해 효명세자를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 정약용이 죽고 나면 우리가 왕이라는 뒷배도 없이 권력다툼에서 승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세도가를 제압해도 최소 10년은 투자해야 하리라. 이런 좋은 시기에 10년을 허비하느니 당장 움직여서 역사를 틀어버려야 한다. 일준이도 이 말을 이해했는지 동의했다.
“그러니 나름 쓸 만한 왕인 효명세자를 살려서 왕의 권위로 조선을 바꿔나가겠다는 말이군.”
“바꾸는 수준이 아니야. 이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산업혁명도 완수하고 근대화도 진행해야 한다. 팔뚝에 힘주지 마! 근육 크게 만드는 근대화(筋代化)가 아니거든!”
“너무 심각해 보여서. 먼 미래의 일은 정해만 두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고.”
일준이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효명세자부터 살려야 근대화든 산업혁명이던 진행할 수 있으니 차근차근 정약용의 아래에서 기반을 쌓아야지.
며칠 뒤, 정약용은 산에서 찾아온 우리의 소지품을 전해주었다. 이 물건 중 남길 것은 전공서적과 프린트가 전부였다.
“책은 너무 귀한 물건이니 따로 보관하자. 우리가 현대인이라는 증거를 남길 수 없으니 나머지는 태우고 필기구는 연필만 챙기자고. 결국 새 필기구 사용법을 익혀야겠지.”
결국 붓을 쓰는 법도 배워야 하고 만년필도 없는 시대이니 깃털펜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정약용은 물건을 모두 태운 뒤 책을 따로 챙겨 적당한 항아리에 넣고 말했다.
“서책이 제법 무겁지만 틈을 보아 인근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을 찾아 숨겨두도록 하겠네.”
장작을 쌓고 불을 붙이니 시커먼 연기가 올라왔다. 일준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녹아들어가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고 정약용은 합성섬유가 타는 연기를 보며 말하였다.
“이제 식사를 하여도 좋을 것 같으니 들도록 하세.”
정약용의 아내인 홍 씨 부인이 나에게 인사를 올렸는데 나도 일준이도 맞서서 인사를 하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였고 우리가 두 달 가까이 치료를 받아야 하니 정약용에게 모든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처음 뵙는 군요. 사랑(舍廊 - 남편의 높임말)께서 말씀하시길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라 하였는데 놀라서 먼저 인사를 하였습니다. 어찌 이리 기골이 장대하시고 젊은 분들이신지.”
조선 기준으로 나는 건장한 체격이고 일준이는 거구나 마찬가지니 저런 반응이 나오지. 웃고 있는 일준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우리가 식사를 할 소반 앞에 앉았다.
“들도록 하게. 자네들이 얼마 전 까지 죽만 먹던 사람이니 소박한 상을 차렸다네.”
소박하다 했지만 유배를 다녀와도 정약용은 양반 출신이고 집안에 여유가 없지는 않았다. 5첩 반상이 나왔는데 국과 찌개 그리고 젓갈에 부침과 나물 두 종류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럼 어디 먹······. 읍!”
“왜 밥상에서 그런······. 읍!”
일준이에게 뭐라 한 소리를 하려 했는데 나도 잘 익은 섞박지를 한 입 먹고 그 기묘한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대부분의 음식 냄새가 다르고 지나치게 짜서 먹기 힘들었다.
밥상에 있는 반찬을 하나하나 맛보며 억지로 밥을 먹어 뱃속으로 넘겼는데 먹지 말아야 할 녀석이 있었다.
“잠깐 일준아. 이 겉절이는 일단 먹지 말고 있다가 이야기하자.”
일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를 알아차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버드나무가지로 만든 칫솔에 소금을 묻혀 이를 닦고 나니 정약용이 먼저 물어보았다.
“식사에 익숙하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는데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더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알지 못 하고 있지만 삶지 않고 무친 생나물에는 기생충의 알이 묻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회(蛔)라 하던가요.”
“회가 나쁘다 하였는가? 사람이 살면 뱃속에 사는 것이 회라네.”
“뱃속에 달라붙어 먹는 것을 빼앗아 가니 매우 나쁩니다. 여기에 콜레라, 이 시대에는 호열자라 불리는 병이 이미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조선에 콜레라가 퍼지고 10년가량이 지났다. 이미 인구밀도가 높은 한양에는 콜레라가 대유행을 하지 않을 뿐 잠복해 있으리라. 콜레라의 설명을 들은 정약용은 머리를 짚으며 한탄하였다.
“팔 년 전 이 나라 전체에 괴질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일이 떠오르는군. 하필 물을 통하여 돌아다니는 병이라니 내 부족함을 한탄할 뿐이네.”
“병이 퍼지는 이유는 걸린 사람의 변이 섞인 물이 다시 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물을 끓여 마시거나 사람과 닿지 않은 산골의 물을 마시면 막을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이 제법 사는 사람은 장작을 구하여 물을 끓여 마실 수 있지만 도성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은 불가하네. 조만간 호열자가 다시 도성에 돌아다닐지도 모르겠군.”
황량한 조선의 산림을 보면 뭘 해도 문제다. 일준이는 그동안 생각을 마쳤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기생충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주었다.
“기생충 약을 구할 수는 있어. 다만 조금 문제가 있는 물건이라 문제지.”
“기생충 약을 구할 수 있다고? 조선시대에 구충제를 만들 수 있는 거야?”
“카이닌산이 포함된 해인······. 아무튼 해초가 있어. 부작용이 제법 심하긴 하지만 이걸로 때우다 더 좋은 산토닌 성분이 있는 식물을 찾자고.”
녀석이 부작용이 심하다 말하니 무슨 수준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도 정약용도 한참을 바라보니 녀석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말했다.
“구충제 관련 과제 쓰다가 과거의 구충제 목록에서 찾은 내용이라서 상세한 부작용은 몰라. 다음으로는 콜레라 대책인데 경구수액으로 대처하면 될 거야.”
정약용은 예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일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괴질이 한창 돌아다닐 적에 관직에 있었다면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네. 이리도 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자네들을 가르치며 나도 배워야겠군.”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다음 날부터 우리는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을 먹고 점심까지 이 시대의 기초 상식을 배웠다. 이후 저녁부터는 미래의 지식과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논하였다. 몸이 나을 때 까지는 따로 할 일도 없으며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만포(晩圃 - 심환지)가 정녕 선대왕의 어찰을 수백 통이나 받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근래에 발견되었지만 사적인 서찰이 분명하며 대소신료들의 중진이 되라는 언질까지 있었습니다. 내용 중에는 나라를 다스릴 때 도움을 주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렇게 신임을 받은 사람이 선대왕에게 험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 내가 괜한 사람을 의심하였군. 언젠가는 심환지의 묘에 가서 잘못을 뉘우칠 마음이 드는군.”
늙은 몸을 불살라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신념을 가진 정약용이니 미래의 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분위기를 돌리려 했는지 정약용은 우리의 신상을 되새기며 감탄하였다.
“자네들이 대학(大學)이라는 곳에 다니니 이는 성균관과 버금가는 곳이 분명하군. 자네들이 배운 서책의 양을 보니 보통 재주를 가진 이들이 아닐세.”
“성균관에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사부학당(四部學堂)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사부학당이라 하여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각기 석사(碩士)와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준비하고 있으니······. 조일준 자네는 왜 웃는 것인가. 내 말이 잘못 되었는가?”
나도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지만 일준이는 참지 못했다. 정약용이 질문하니 일준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저희가 받은 것은 관직이 아니라 교수에게 묶인 노비 문서이지요. 또한 저희는 이 시대를 기준으로 젊은 나이가 아닙니다.”
“젊지 않다니 무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자네들의 나이가 얼마인지 묻지를 않았군?”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지금은 스물 이전에 장가를 가지 않습니까?”
일준이의 말을 들은 정약용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과 일준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아예 눈을 흘기며 말했다.
“누가 자네들을 보고 약관(弱冠)이 아닌 이립(而立 - 30세)이라고 하겠는가. 안면만 보면 약관에도 미치지 못한 애송이라 여길 것이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우리 둘 다 얼굴을 돌아보았는데 딱히 동안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연구실에서도 평범한 외모였다. 잠시 생각하던 일준이가 이해했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젊은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어. 당시 스무 살이라 하셨는데 지금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이 들어 보였지. 이 시대는 다들 고생을 많이 해서 피부가 빨리 상하잖아.”
“그럼 이 시대 사람들은 20살에 현대의 40대 외모와 흡사할 정도로 삭아버린다는 말인데.”
갈수록 이 시대와 현대의 괴리가 점점 드러나 골치 아팠다. 언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몇 년은 걸리지만 효명세자의 죽음까지 윤달을 감안해도 고작 8개월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