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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10화 (10/345)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10편

(1장 - 친국)

김조순은 안동 김씨와 자신의 사람들에게 경강 상인 중 도고 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한 지원을 일시 중단하라 하였다. 여기에 정약용이 양주에서 보낸 열수환을 유통 이전에 사들여 비축하였다.

정약용이 유죄로 판결되면 수상한 약의 유입을 막았다고 할 수 있고 무죄로 판결되면 증거를 수집해 놓았다가 제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김조순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것은 순조의 개입이었는데 이것이 현실이 되었다.

“세자에게 이번 일을 내가 판단할 것이라 말 해 두겠소. 직접 나아가 친국(親鞫)을 거행할 것이니 이를 도와주시구려.”

“신이 친국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게 여러 신료를 만나볼 것이옵니다.”

가뜩이나 많은 업무로 인하여 몸이 축나고 있던 효명세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친국이 일어날 것이 확실해지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다.

서능보는 모든 일이 순탄히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여 도성 각지의 열수환을 압수하고 있었다. 친국으로 더욱 바쁘게 움직이는 서능보에게 김조순이 방문하였다.

“참으로 고생이 많군. 약에서 나오는 독한 냄새가 육조거리에 퍼질 지경이네.”

“영돈령부사께서 여기까지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인 일이신지요?”

“그야 친국을 거행할 것인데 내가 한 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능보는 자랑스럽게 현재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김조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확인하였다.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김조순은 아직 부족하다는 듯이 역으로 질문하였다.

“혹여나 열수환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신상명세를 확인하였는가? 또한 열수환을 압수한 장소와 시기는 물론이요 열수환을 만들기 위한 약재의 구매 경로도 확인하였고?”

“그것은 제가 부족하여 미처 확인하지 못 하였습니다.”

서능보가 뒤통수를 맞은 듯이 김조순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짐작하고 있던 김조순은 혀를 차면서 말하였다.

“자네는 일이 커질수록 식견이 좁아지는 사람이니 고치도록 하게. 다산이 다시금 유배를 당하면 가산과 판매 대금을 압류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문해야 하지 않겠는가.”

“옳은 말씀입니다. 듣고 보니 엄벌을 내린다고 백성들의 앓던 배와 열수환으로 사들여 피해를 입은 상인들의 손해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열수환으로 손해를 입은 사람부터 이를 압수당해 피해를 입은 상인까지 모두에 대한 기록을 적어두도록 하게. 내가 이런 일 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가.”

김조순이 돌아간 다음 날부터 포도청은 열수환의 피해를 접수하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심지어 가짜 약을 만들어 유통한 도고까지 자신의 가짜 약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증언하였다.

김조순의 명령대로 열수환은 입수된 시기와 장소에 따라 철저히 분류되었다. 그 속에는 정약용이 만들어 유통되지 않은 진짜 열수환도 분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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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열흘이 지났다. 무죄 판결이 내려지거나 정약용에게 변론의 기회라도 줘야 하는데 의금부가 소란스러웠다. 갑자기 금부도사가 내 감방 문을 열면서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친국을 명하셨으니 네 놈의 죄를 모조리 고변하도록 하라.”

“친국이라 하셨습니까?”

몽둥이를 들고 있는 병졸들이 나를 이끌었고 일준이는 똥 씹은 표정으로 끌려 나왔다. 잠시 주춤거리자 관원이 엉덩이를 걷어찼는데 잘못하다가 두들겨 맞을 지도 몰랐다.

“네놈들이 사특한 짓을 저지르거나 중언부언을 일삼으면 즉각 고신(拷訊)을 행할 것이다! 허튼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도록 하라!”

정약용이야 당당했지만 나는 가슴이 콩닥거려 진정할 수 없었고 일준이는 아예 넋이 나간 몰골로 끌려갔다. 우리가 마당에 무릎을 꿇으니 친국에 참가하는 관리들이 먼저 들어왔다.

“지금부터 추문을 시작할 것이다! 주상전하가 납시기 전 까지··· 주상전하 납시오!”

곤룡포를 입은 중년의 남성. 지금의 왕인 순조가 왔는데 체격이 커서 신장이 180cm는 될 것 같았다. 효명세자가 기록상에는 미남이라 하였는데 순조도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오뚝한 콧날과 부드러운 턱선으로 미남이었을 것 같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비만으로 인해 살이 늘어지고 피로에 시달리는지 피부가 거무스름하였다. 순조는 의자에 앉아 장계를 펼치며 처음으로 어명을 내렸다.

“증좌를 확보하였으니 내가 장계를 읽는 동안 압수한 독약을 가져오도록 하라.”

순조는 우리의 신상명세를 확인하였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계속 바라보았다. 이윽고 열수환이 마당에 옮겨졌고 지독한 목초액의 냄새가 밀려왔다.

가짜를 얼마나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대략 수만 개가 넘는 열수환이 마당에 쌓일 무렵이었다. 순조가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정약용을 꾸짖었다.

“선대왕께서 정무에 임할 적에 총애한 신하가 정약용이라 하였다. 이후 서학(西學)을 믿어 죄인이 되었고 내가 해배(解配 - 유배를 풀어줌)를 하였다. 그 은혜를 잊었느냐?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고변해 보아라.”

“주상전하께 아뢰옵나이다. 주상전하께서 내린 은혜로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차에 흉험한 소식을 접하였사옵니다. 구 년 전에 평안도를 시작으로 토사곽란을 일으키는 괴질이 퍼져나갔사옵니다.”

내가 알려준 콜레라의 정체를 친국이 벌어지는 장소에서 그대로 써먹을 줄은 몰랐네. 순조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놀라서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실로 흉험한 일이었다. 그러하면 괴질과 극약 간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소인이 조금의 의술을 익혀 괴질을 치유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영길리에서 건너온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사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을 만들게 되었나이다.”

“네가 만든 약으로 해를 입은 사람이 일백 명이 넘는다. 증좌로 수거된 약이 십만 환(丸)이나 남았는데 이는 도성에 독을 풀어버린 꼴이 아니더냐.”

몇 명이 이번 일에 관여했는지 몰라도 우리가 무죄가 된 순간 도성에서는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정약용은 순조의 말을 듣고는 당당하게 항변하였다.

“소인이 만든 약은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게 조절하였사옵니다. 또한 삿된 이들이 위약을 만드는 일을 염려해 표식을 남겨놓았사옵니다. 그러하니 환약을 쪼개 심지로 사용한 쌀알을 꺼내 주시옵소서.”

순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관들이 수거된 열수환을 분해했다. 당연히 가짜 약도 속에 치자열매로 물들인 노란 쌀알이 있었다. 정약용은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순조에게 말하였다.

“이 노란 쌀알에 진하게 우린 잿물을 바르면 증좌가 드러날 것이옵니다.”

이 시대에 비누 대신 사용하는 잿물은 어디에나 있었고 붓에 축인 잿물이 노란 쌀알에 발라졌다. 그러자 노란 쌀알 가운데 단 두 알이 주황색으로 변하였다.

“환약에 넣은 쌀알을 치자 열매와 미역취의 꽃잎을 섞어 물들였사옵니다. 미역취의 꽃은 잿물을 만나면 붉게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러하니 두 색이 섞여 주황색이 될 것이옵니다.”

순조는 주황색으로 변한 쌀알을 들어서 유심히 살펴보더니 수염을 푸들푸들 떨면서 놀라워했다. 관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였고 정약용은 한 숨을 돌린 뒤 말하였다.

“신은 미역취의 성질을 이용하여 제가 만든 진짜 환약에 증좌를 남겨두었사옵니다. 가짜 약은 쌀알을 치자열매만 사용해 물들였을 것이옵니다.”

“형조판서는 무얼 하는가. 환약을 압수한 시기와 장소에 따라 열 알 씩 골라내 잿물을 바르도록 하라.”

다른 지시약인 강황은 향이 다르고 값비싼 수입 약재이니 이걸로 쌀알을 물들인 놈은 없으리라. 서능보가 머뭇거리자 김이교가 함께 나서서 알약을 분해했다.

결과는 극명했다. 진품 열수환의 쌀알 색만 변했고 약효가 없거나 구토를 일으키는 가짜 열수환은 색이 변하지 않았다. 순조는 서능보를 노려보자 바로 변명이 이어졌다.

“신이 판단하기로는 정약용이 제대로 만든 약에만 미역취의 꽃잎을······.”

“죄를 저지른 흔적을 수고를 들여 남겨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니면 누명을 피하기 위한 흔적을 수고를 들여 남겨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 영돈령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이 세 살 어린아이라 하여도 누명을 피하기 위한 흔적을 남겨두었을 것이옵니다.”

김조순이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대답을 마친 김조순은 우리 셋을 번갈아 보면서 슬쩍 웃었고 서능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막 변명을 하였다.

“어느 누구라 하여도 누명을 피하기 위한 증좌를 남겨둘 것이옵니다. 하오나 약효를 검증하지 못 하였사옵니다.”

“형조판서가 열수환을 수집하여 나눠놓을 때 구입한 장소와 시기를 모두 나누어 두지 않았더냐. 그러하면 정약용이 만든 열수환을 찾아서 시험하도록 하자꾸나.”

“주상전하께 아뢰옵니다. 신 김조순 사특한 약이 도성에 퍼질까 염려하여 양주에서 올라오는 열수환을 일만 환을 구매하여 두었사옵니다. 이를 사용하시옵소서.”

이번 사건을 더욱 키운 사람은 김조순이 확실하였다. 정약용이 무죄가 되건 유죄가 되건 그는 이득을 챙길 방법을 확실히 마련해 둔 것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잘못이 없다 하는 서능보를 노려본 순조는 콧김을 뿜으며 분노를 다스렸다. 잠시 숨을 고른 순조는 정약용에게 사실상의 무죄 판결을 내렸다.

“혜민서를 통해 도성에서 병을 앓는 사람 일백 명을 불러들여 열수환의 약효를 시험할 것이다. 약효가 드러나면 서능보에게 반좌를 적용할 것임을 익히 알고 있으라.”

서능보는 사지를 휘청거리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정약용의 건은 끝났지만 이제 우리가 남았다. 순조는 다시 장계를 읽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영길리에서 건너왔다 하는 두 청년에 대하여 논할 차례이다.”

대소신료들의 이목 모두가 우리에게 쏠렸다. 순조는 우리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눈이 심하게 떨리며 장계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하였다.

“장계를 보니 너희들의 부모가 청나라로 도주하였고 다시금 영길리라는 나라로 이주하였다 하였다. 이 말이 틀림이 없느냐.”

“그러하옵나이다. 영길리에서 태어나 항구에서 온갖 고된 일을 하며 부모와 함께 살아왔사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문을 익혔으나 대성(大成)에는 이르지 못하였사옵니다.”

“언변(言辯)이 유창하지 아니하고 말의 음색이 다르니 이국(異國)에서 살다 온 사람이 분명한 것 같구나. 박현상이 너희들이 겪은 일에 대하여 논하도록 하여라.”

왕으로서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되지만 순조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아마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어 마음이 흔들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순조의 마음을 더욱 흔들 생각으로 말하였다.

“저희의 선친께서는 제천 일대에 기거하시던 옹기장이와 숯쟁이였습니다······.”

내가 창작한 인생 이야기가 구구절절하게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진행되니 순조는 점점 더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묻기까지 하였다.

가짜 인생의 사례는 산업혁명에서 소모되던 노동자 가운데 신세가 안 좋은 사람들의 사례를 들면 충분했다. 김조순은 눈시울을 붉힌 것이 전부지만 순조는 점차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삯을 모으기 위해 굴뚝을 닦아내고 부친은 극약인 비상(砒霜)으로 안료를 만드는 곳에 끌려가 일을 하였다고? 급기야 반 년 만에 절명했다 하였느냐.”

“비상 가루가 들끓는 곳에서 일하신 부친께서는 사지가······. 송구하옵나이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는 시늉을 하자 순조가 동요하며 울음을 감추려 하였고 신료들 중 몇몇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친국이 아닌 신파극(新派劇)이 되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모친께서는 곽란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시며 유언을 남기셨사옵니다. 이에 따라 네 분의 유골을 추려 재로 만들고 이 땅으로 돌아와 가묘를 만들게 되었사옵니다.”

“참으로 험난한 일이로구나. 너희들이 영길리에서 왔다는 사실은 가지고 있는 재주로 증명하였으니 믿을 수 있구나. 이제 너희와 너희 부모의 과오에 대하여 논하도록 하겠다.”

울음을 겨우 참아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올라온 순조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더니  영국에서 건너왔다는 우리를 위하여 차근차근 쉬운 말로 설명해 주었다.

“너희의 부모가 청으로 도주한 일은 엄연한 죄이다. 너희도 이를 두려워하여 이 나라에 몰래 들어오고 이를 알리지 아니하였으니 이 또한 국법을 어긴 것이다.”

조선시대에 국경을 넘는 사람은 밀수 목적이면 참수, 죄가 좀 덜하면 유배형이다. 다만 우리는 정상참작의 소지가 있었고 순조도 이를 기특하게 여겼다.

“다만 너희의 부모가 이역만리에서 변사(變死)하기 전에 돌아오기를 청하였고 시신을 태운 재가 돌아왔으니 이 죄는 없는 것으로 하겠다.”

“선친의 죄를 없던 것이라 하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또한 이 땅에 돌아와 부모의 유고(遺稿)를 이행하려 하였으니 이는 지극한 효심으로 여겨야 할 일다. 너희를 죄인이라 하면 세상 사람 모두가 효행을 거스른 죄인이 아니겠느냐.”

신료들도 순조의 말에 동의하였는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고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까지 하였다. 순조는 주변을 돌아본 다음 말하였다.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너희에게 관직을 내리고 궐에서 일하게 함이 마땅하구나.”

“예조판서 이지연 아뢰옵나이다. 저들의 말이 지극히 옳다 하여도 서역에서 건너온 이들이옵니다. 네 자로 된 흉언(무부무군, 無父無君 - 부모도 왕도 없다)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김조순이 경고했던 이지연이 개입하였다. 다음 천주교 박해의 주동자이니 우리를 천주교 신자라고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이지연을 보니 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일준이는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며 이지연을 바라보았고 순조도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말하였다.

“신이 서역에서 사람이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준비한 물건이 있습니다. 서학을 믿는 이들은 이 물건을 몸에 숨기고 신주(神主)보다 더욱 중히 여기는 법입니다.”

놀랍게도 이지연은 친국 소식을 듣고 십자가를 만들어 두었다. 사람을 시켜 어설프게 형상만 본뜬 물건이지만 이걸 어떻게 쓸지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를 판별한 방법이다.

“신이 사람을 시켜 만든 상을 훼손하면 서학을 믿는 이들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사옵니다. 신 또한 주상전하께서 품으신 뜻을 알고 있으나 후일 일어날 변고를 염려할 따름이옵니다.”

“옳은 말이로구나. 이미 의금부에서 너희가 서학 교도가 아니라 증언하였다. 그러하니 이 목상(木像)을 꺾을 수 있겠구나.”

십자가를 받았는데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인지 엉성하고 형태도 대충 만들었다. 잠시 고민하니 일준이 쪽에서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와 나도 십자가를 꺾었다.

내 앞에 있던 이지연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꺾인 십자가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옆에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이미 서학교도가 아님을 증명하였는데 대체 뭘 하는가?”

“모든 일은 확실히 행해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일준이는 온 몸의 힘을 써서 이지연이 만든 십자가를 사정없이 부숴나갔다. 심지어 파편을 옆에서 불타고 있던 화로에 집어넣고 이지연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의심이 생기면 여러 사람이 이를 논하여 결국 억울한 일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하니 의심을 가지지 않도록 확실히 처리하였습니다.”

“예판이 지나친 염려를 하였군. 말이 올바르며 행동이 올바른 이들이 서학을 퍼트리려 이 땅에 온 것이라 의심하였는가. 이 이상 의견을 내놓을 이들이 있는가?”

일준이의 행동이 더욱 마음에 들은 순조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였다. 마침내 친국의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박현상은 불란서와 영길리의 언어를 알며 서역의 역사에 능통하다 하였다. 홍문관에 정자(正字 - 정9품 관원)로 일하며 서역의 일을 논하는 서적을 작성하도록 하여라.”

“소인에게 크나큰 은혜를 내려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홍문관 소속이면 나쁘지 않다. 각종 장서를 관리하는 기관이며 일종의 연구기관에 김조순의 입김이 닿아있으니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이다. 다음으로는 일준이의 차례였다.

“조일준은 재주가 여럿 있다 하였다. 그러하니 여러 물산이 움직이는 장흥고(長興庫 - 각종 물품을 관장하는 기관)에서 봉사(奉事 - 종8품 관원)로 일하며 재주를 뽐내도록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또한 두 젊은이의 선친이 묻힌 가묘를 제대로 된 묘로 바꿀 것이며 본관(本貫)을 알 수 없어 멋대로 지은 성을 바로잡도록 대가 끊긴 성씨의 호적으로 입적시킬 것이다.”

모든 조치가 완벽하게 끝났다. 이지연마저 우리를 의심하지 않으니 이 조선에서 우리를 의심할 사람은 없으리라. 사태를 뒤에서 움직인 김조순은 새하얗게 질린 서능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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