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11편
(1장 - 순리(順理))
재판은 끝났다. 서능보는 수사를 엉망으로 하여 애꿎은 사람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순조는 목소리를 높여 서능보를 질책하였다.
“형조판서는 누명을 씌운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죄를 묻도록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반좌(反坐 - 무고죄)를 적용할 것이다.”
김조순도 친국을 주도하며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자신의 친척 김이교와 순조의 분노에 직면하여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서능보를 움직일 수 있겠지.
모든 원한은 서능보가 뒤집어 쓸 것이고 김조순은 그저 웃으며 자신의 정적(政敵)을 처단하면 되리라. 순조는 우리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반좌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되었으니 이 어찌 흉험한 일이 아니더냐. 앞으로 보름의 시일을 줄 것이니 몸을 추스르고 관직에 나설 준비를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순조의 은혜가 하늘같았으니 셋 다 절을 올렸다. 도성을 떠난 우리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양주로 돌아왔다.
정약용의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달려온 홍씨 부인은 정약용을 껴안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정약용은 이를 감싸 안으며 말하였다.
“내 변고가 있을 것이라 하였지만 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하였소. 주상전하께서 나를 어여삐 보시어 기회를 주셨으니 어서 도성으로 올라갑시다.”
“사랑께서 너무나 흉험한 일을 겪으셨으니 신유년(신유박해)의 일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습니다. 정말 끝이 난 것입니까?”
“주상전하께서 혜민서에서 내가 만든 환약을 시험할 것이라 하였소. 약효야 누구나 알고 있으니 일이 잘 풀리면 내의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요.”
홍씨 부인은 긴장이 풀려 다리를 후들거리며 휘청거렸고 정약용이 이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긴장이 풀려 안채에 있는 툇마루에 주저앉아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마침내 일준이가 입을 열었다.
“내 별로 오래 살지는 않았는데 그런 꼴을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너 괜찮아? 천주교 신자가 십자가를 꺾어서 부러트리고 아예 태워도 되는 거야?”
“그게 십자가냐? 천주교 신자를 찾아내서 죽이려고 만든 흉물이지? 그냥 남겨두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물건인데 아예 못 쓰게 만들어야지.”
논리적인 대응이었지만 일준이 입장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었다. 녀석은 잠시 기도를 하더니 나를 곁눈질로 보면서 말했다.
“나중에 천주교 선교가 허락되도록 노력 좀 해 줘라. 나는 방법을 모르니 답답해 죽을 것 같아.”
“서양과 교역을 맺으려면 천주교 선교를 허가해야 편해져. 파리 외방전교회가 움직이면 프랑스에서 보내는 지원의 수준이 달라지겠지. 네 말대로 당장은 해결할 수 없어.”
“옳은 말일세. 지금은 내가 혜민서에서 성과를 보여 내의원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서학이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약용이 이 대화를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정약용도 피로에 시달렸는지 우리 옆에 앉아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자네들이 올라온 자리가 요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직도 아닐세. 삼십 년이 지났지만 관직에 오를 자네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알려주겠네.”
나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이틀 정도 우리에게 조언을 한 정약용은 약효 검증을 위해 혜민서로 나설 준비를 했고 우리가 먼저 한양으로 올라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리는 우리를 집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며칠 동안 격무에 시달린 사람이었는지 피곤한 눈빛으로 대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도성에 집을 마련하라 하였네. 이미 대가 끊긴 반남 박씨 문중과 한양 조씨 문중으로 호적을 입적(入籍)할 것이니 차근차근 준비하여 두게.”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 집이 작기는 하여도 어엿한 기와집인데다 육조거리 인근에 있습니다. 대체 누가 살던 집이었습니까?”
배정된 집을 살펴보니 30평정도 될 법한 기와집이었는데 누군가 집을 철저히 수색했는지 온갖 집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관원은 한숨을 내쉬더니 우리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 줬다.
“이 집에 머물던 사람은 열수환을 사들여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던 경강상인 김재순이라네. 이미 형조에 끌려간 사람이니 피해를 입은 자네들이 집을 가져도 되지 않겠는가.”
“다산 선생님과 저희에게 누명을 씌운 자의 집이니 참으로 좋은 일이로군요.”
아예 생활하기 편하라고 쌀도 몇 석 정도 비축해 주었고 젓갈을 비롯한 찬거리에 엽전 천 냥을 상자에 담아 주었다. 일준이는 실험도구를 배치하며 궁금한 듯이 말하였다.
“살기 부족하지도 않고 오히려 넉넉하네. 이 일을 효명세자가 처리했나?”
“아마 아닐 거야. 순조는 의욕이 없을 뿐 기본적인 능력은 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의욕을 보이니 이번 사건과 연루된 놈들을 철저하게 수사할걸?”
“그 모습을 지켜보면 속이 후련할 것 같은데. 일단 집에 먼지가 많으니 청소나 하자. 이사를 왔으면 청소부터 해야지. 안 그래?”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집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니었다. 헝겊을 비누로 세탁한 다음 구석구석을 닦으니 먼지와 때가 마구 묻어났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집을 닦는데 누군가가 방문했다. 처음에는 정약용이 우리 집을 찾아왔거나 조정에서 물건을 보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낯이 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예조판서 대감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신지요.”
놀랍게도 우리 집의 첫 손님은 예조판서 이지연이었다. 그는 나와 일준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일부러 친한 사람인 것처럼 양팔을 벌리며 말하였다.
“누추한 곳이라 하였는가? 자네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으니 차기 중신(重臣)들이 사는 집이라 느껴질 지경이로군. 일전에 친국에서 자네들을 의심한 일은 참 미안하게 되었어.”
“예조판서께서는 서학을 경계하는 분이 아닙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하면 잘 된 일이로군. 보기 힘든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어서 나를 따라 오게나.”
이지연은 우리가 십자가를 부순 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가마를 태워주며 친한 척을 하였다. 가마가 도착한 곳은 우리의 친국(親鞫)이 열렸던 금위영 마당이었는데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 살려주십시오! 저는 다 말하였습니다! 제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으아아악!
금위영에서는 고기가 타는 것 같은 냄새가 풍겨오고 피비린내도 같이 풍겨왔다. 비명소리를 들으니 나도 일준이도 창백하게 질렸는데 이지연은 피식 웃으며 우리에게 설명하였다.
“다산이 만든 열수환은 약효를 시험하여 판단해야 할 일이지. 반대로 가짜 열수환을 만든 놈들은 이미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는가. 그러하니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네.”
“경강상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호조에서 연관된 사람의 신상명세를 모조리 받아놨으니 이들만 잡았지. 이들 모두가 자네들에게 반좌를 저지른 놈들이니 이를 지켜보고 마음을 달래도록 하게.”
금위영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이지연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이윽고 사극에서나 볼 수 있던 조선시대의 고문들이 모조리 시행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네놈이 중언부언을 일삼는구나! 무엇 하느냐! 두 명 더 올라가거라!
“압슬형은 폐지되었다 하였는데······.”
“평범한 죄인이라면 모를까 백성들에게 해를 입힌 도고(都賈)들일세. 엄히 다스려야지.”
불법인 압슬형은 물론이요 주리틀기도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다. 끔찍한 몰골을 보기 싫어서 반대쪽을 보니 거기서는 서능보가 두 죄인에게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김재순(金在純)은 물품의 매점매석에 가담하였기에 장형(杖刑) 서른 대와 적몰가산(籍沒家産 - 모든 재산 몰수)을! 자금을 융통한 박유성에게는 파직과 재산단부(財産斷付 - 벌금형) 이천 냥을 내린다.”
“저는 억울합니다! 김재순이 저에게 돈을 벌 궁리가 있다 하여 급히 자금을 융통하였는데 이것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현직 관리로 보이는 사람이 항의하였는데 아마 반남 박씨에 소속된 정계 인물의 친인척 중 하나이리라. 서능보가 당황하자 뒤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김조순이 타이르듯 말하였다.
“파직은 지나친 형벌 같으니 주상전하께 고변하여 형을 다시 결정함이 어떻겠나.”
“그 또한 옳으신 말씀입니다. 박유성의 형은 아직 내리지 않을 것이니 깊이 숙고하고 후일 출두하도록 하여라. 장형은 당장 시행하도록!”
“저는 동료들이 말하는 대로 물건을 사들였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우리 집의 원래 주인인 김재순은 곤장을 두들겨 맞고는 풀려나 구석에 방치되었다. 그가 옮겨진 곳에는 이미 곤장을 맞고 사지를 가누지 못하는 범죄자 수십 명이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심지어 몇몇은 직접 제조에 가담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하옥되었다. 이지연은 이 모습을 보더니 앓던 이가 빠진 사람처럼 상쾌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도고들을 쓸어버리시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닌가.”
“이 자리에 양반들이 죄인으로 끌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일준 자네가 좋은 질문을 하였군. 도고들이 가짜 약을 만들기 위한 자금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이 과정에서 매점매석을 하였는데 누가 뒤를 봐 주었겠나?”
경강상인이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은 이유는 권력자의 비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진데다가 명분을 철저히 앞세운 순조 앞에서 권력자의 비호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순조가 머리라면 김조순은 팔이고 서능보는 칼이었다. 순조는 마음대로 칼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는 김조순이 결정하였다.
모든 원한은 서능보에게 집중되었으니 그는 조만간 탄핵을 당해 관직에서 쫓겨나리라. 그리고 보니 압류한 재산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였는데 이지연이 먼저 말해주었다.
“압류될 재산이 육십만 냥에 달할 것 같군. 피해를 입은 백성들과 가짜 열수환을 사들여 손해를 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모조리 국고로 환수될 것이야.”
“매점매석을 일삼은 놈들의 재산 치고는 적은 양 같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이후로도 철저히 다스릴 것이라 하였으니 염려하지 말게. 효수를 당할 자들만 서른 명이 넘고 아예 형조와 관련된 정무에 임하기로 하셨으니 나라에 흥복(興福)이 따로 없군.”
경강상인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 대처라면 십 년 정도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상업활동을 하리라.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한 숨 돌리니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이보시오! 거기 누구 있소? 내가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이니 문을 열어주시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곤장을 서른 대나 맞고 풀려난 김재순 같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는데 일준이는 한창 권투 연습을 하다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소. 내가 적몰가산을 당하였지만 고향으로 내려가 반드시 재기할거요! 그러니 노자를 좀 주시구려. 이 집에 사는 사람이니 조금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
“구걸을 하실 것이면 다른 사람을 찾아 가시지요.”
“이 개놈의 새끼들이! 내가 살던 집에서 버젓이 살고 있으면······. 억!”
김재순이 팔을 움직이자 일준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배에 주먹을 날렸다. 한 대 맞은 김재순은 윽 소리를 내면서 무너지더니 게거품을 물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 이렇게 되면 보상금이라도 줘야 하나? 일단 정신 차리시오!”
사람을 두들겨 패 놓고 방치할 수도 없었다. 일준이가 허둥거리며 김재순의 숨통을 틔우는 동안 엽전 오십 냥 정도를 준비했다. 정신을 차린 김재순에게 이를 주고 정중하게 권유하였다.
“이 돈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사시오. 이 정도면 노자는 물론이요 곤장을 맞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 않겠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울음을 터트리려던 김재순은 인사를 올리고 엽전을 품에 넣어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번 일에 끼어든 사람 중 목숨을 부지한 사람 대부분이 이런 꼴을 겪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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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혜민서에서는 열수환의 약효 검증이 있었다. 설사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 백 명이 혜민서에 들러 간단한 진맥 뒤에 열수환을 처방받았고 개중 57명의 설사 증세가 멈추었다.
심지어 정약용은 가장 증상이 심한 사람을 선별하여 열수환의 검증 대상으로 삼았다. 대조를 위해 침과 탕약으로 다른 환자를 치료한 의원들은 정약용을 우러러 보며 말하였다.
“증세가 심한 사람이 환약을 먹었을 뿐인데 절반 이상이 치유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제대로 된 탕약도 이런 효과를 내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내가 뜻하던 것 보다 약효가 부족하니 아쉬운 일이라네. 나는 괴질을 잡아내기 위하여 열수환을 만든 것이지 단순한 설사를 잡아내려 만든 것이 아닐세.”
콜레라에 대한 지식을 배운 정약용은 열수환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우수한 약을 개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에 순조는 장계를 읽고 공을 치하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구나. 만약 괴질이 다시 발생하여도 열수환을 먹이면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건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정약용을 믿은 보람이 있구나.”
“송구하오나 열수환은 괴질을 이기지 못 할 것이옵니다. 괴질에 시달리는 사람은 쌀뜨물 같은 변이 나오는데 이런 환자는 열수환으로도 고칠 수 없었사옵니다.”
“훌륭한 일이니 자책하지 말거라. 이러한 약을 만들었으며 반좌로 인하여 고난을 겪었으니 관직을 내려줄 것이다. 어느 자리를 원하느냐.”
정약용은 모든 방면에 출중한 사람이기에 순조도 중요히 쓰고 싶었다. 정약용이 어느 관직을 원할지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약용은 의외의 대답을 하였다.
“중요한 관직은 원치 않으며 그저 내의원에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를 원할 뿐이옵니다.”
“내의원이라 하였는가? 내의원의 도제조 자리라도 원하는가?”
“아니옵니다. 신이 이제 칠순이 다 되어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막중한 책무에 몸이 무너질 것 같사옵니다. 그러하니 근래에 익힌 의술을 정리할 자리를 원할 뿐이옵니다.”
정약용과 눈을 마주친 순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당장 내의원 자리를 마련하려 했지만 효명세자는 정약용의 의술을 잘 모르니 서로 뜻이 맞지 않을지도 몰랐다.
결국 순조는 정약용이 가장 원하고 있는 제안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업무를 떠넘기는 행동이지만 이보다 더 좋은 판단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다만 어떠한 관직에 오를지는 세자가 정할 일이다. 세자에게 문안(問安 - 인사를 올리며 진찰함)을 올리며 의술에 대하여 논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신을 이렇게 믿어주시니 이 노구(老軀)가 진토가 될 때 까지 종사할 것이옵나이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뜻을 거절할 수 없어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닷새에 한 번 있는 문안이 다가오고 정약용은 문안을 시작하며 효명세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세자저하께 인사를 올리옵니다. 오늘의 문안은 말씀드린 대로 가벼운 진맥을 행하려 하옵니다.”
인사를 올린 정약용은 효명세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22세에 불과한 나이이지만 준수한 외모는 물론이요 체격도 순조의 피를 물려받아 늠름하였다.
다만 수려한 외모에는 깊은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효명세자는 고개를 숙인 정약용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내 몸은 아주 멀쩡하며 간혹 잠을 설치는 일이 있지만 큰 문제는 없소. 아무런 병세가 없는데 입진(入診 - 임금을 진찰함)하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만 두시오.”
정약용의 눈에 비친 효명세자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인해 격무(激務)를 일삼으며 몸을 망가트리는 사람에 불과하였다. 이미 양주에 머무를 적 조일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제 아버지께서는 교사이셨는데 가장 중책이나 마찬가지인 교무주임에 부임하셨습니다. 업무와 책임감에 시달리다 병을 억지로 참으셨지요. 급기야 병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진맥도 아닌 간단한 문답조차도 짧게 끝내려 하니 이대로 두면 병을 키우다 요절할 것이 분명하였다. 정약용은 고개를 숙이고 효명세자를 설득하였다.
“신은 세자저하를 진맥하여 의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사옵니다. 은혜가 작다 하여도 이미 세상을 등질 때 까지 몇 년 남지 않은 노구에 불과하옵니다.”
“진맥을 행해 보시오. 다만 곧 업무에 종사해야 하니 길게 하지 아니하겠소.”
효명세자의 손목을 짚은 정약용은 사력을 다 하여 진맥을 실시하였다. 손목을 바꿔 짚으며 맥을 확인하고 온 신경을 집중하는 모습에 효명세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약용의 손에 위장과 관련된 질환이 포착되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약용은 이 병의 증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려 하였다.
‘산성은 다른 물질을 녹이고 삭아버리게 만드는 물건입니다.’
조일준이 말하기를 위액은 산성이라 하였다. 위궤양의 증상 중 하나는 이 위액이 역류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식도를 넘어 입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했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면 효명세자의 입으로 위액이 역류하여 치아를 녹여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마음을 정리한 정약용은 진맥을 멈추고 효명세자에게 요청하였다.
“구중(口中 - 입의 높임말)을 확인하고 싶으니 잠시만 열어 주시옵소서.”
효명세자가 입을 열자 정약용의 눈이 번뜩였다. 구석구석을 살피던 그의 눈에 뭉그러진 흔적이 역력한 뒤쪽 어금니가 보였다. 위산이 역류한 명백한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