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4화 (24/345)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24편

(2장 - 교역 (3))

효명세자는 거래 계약이 원활히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말을 마치고 돌아갔으며 다음 날 거래에 능통한 임상옥과 이를 보증하기 위한 여러 관리들이 올 것이라 하였다.

휴 린지도 좋은 자리라 말했지만 속은 달랐다. 나를 상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려고 회의에 돌입했다. 문 밖으로 나오자 피로가 몰려오며 눈이 핑핑 돌아 기둥을 잡고 중얼거렸다.

“내일부터 또 말싸움이 시작되겠군. 생각보다 피곤한 사람들인데.”

“자네도 참 대단하군. 겉으로는 화평을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사갈(蛇蝎)과 같이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인데 이들의 수작을 근본부터 막아내지 않았나.”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金逌根)이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조순의 병세가 심해지며 안동 김씨를 이끌게 되었으며 효명세자도 아끼는 사람이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혁파(革罷)에는 병조판서 홍석주가 앞에서 전체적인 조율을 하고 한성부판윤을 담당한 김유근이 자금과 훈련장소를 지원하며 이끌어 나갔다.

둘의 노력 덕분에 무너져가던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행색이라도 제대로 갖춘 군대가 되었다. 그는 오늘의 대화 기록을 확인하며 말하였다.

“논의에 대한 기록을 보니 이상한 점이 있어서 자네에게 물어보려 하네. 자네는 분명 영길리에서 살다 온 사람인데 휴 린지라는 자에게 그러한 말을 하지 않은 것 같군.”

“그야 사사로운 일을 논할 이유가 없어서이지요. 실제로는 저에 대한 것을 숨길수록 상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 수 있으니 일부러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자네는 역시 재주가 있다니까. 그러하면 내일 논의를 할 적에 상대를 시작부터 격동(激動)시킴은 어떠한가?”

격동이라 하니 무엇으로 움직여야 할지 막막했지만 휴 린지는 온갖 물건을 일단 다 가져와서 팔아치우려 했다. 당연히 밀가루와 설탕 그리고 인도산 정제 버터도 끼어 있었다.

“격동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서역에서 잠시 빵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며 빵을 만드는 법을 익혔습니다. 마침 재료도 모두 갖추어져 있군요.”

“자네의 경연을 통해 여러 소식을 들었는데 빵은 서역에서 먹는 음식이라 하였지. 혹여나 가수텨라(加須底羅 - 카스테라)라도 내놓을 생각인가?”

“그 물건은 포도아(포르투갈)에서 만들어서 제가 제조법을 상세히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영길리에서 항시 즐기는 빵을 몇 종류 알고 있습니다. 마침 재료가 있군요.”

내가 밀가루를 섞어서 난이도를 낮춘 마카롱까지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은 오븐도 재료도 없는 시대이니 만들 수 없어서 참고 있었을 뿐이고. 김유근은 나를 보며 흡족한 듯이 말하였다.

“이 머나먼 이국에서 갑자기 고향의 음식이 나온다면 마음이 요동쳐서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 할 것이네. 그러하면 재료를 마음껏 사용해도 좋으니 만들어 보게.”

초보자도 간편하게 만들 수 있으며 누구나 먹어보았을 빵인 파운드케이크면 적당하겠지. 생각해 보니 내 입맛에는 정통방식 파운드케이크가 딱딱하고 기름져서 영 만족스럽지 못 했다.

베이킹파우더 하나면 해결될 일이라 일준이를 찾아가니 녀석은 이미 칼 귀츨라프에게 자신이 만든 도구를 소개하고 있었다.

“유리의 가공기술은 부족하지만 이토록 찬란한 반사면을 만들 수 있다니. 은이 아까울 지경이로군요. 제가 가지고 있는 거울의 뒷면을 바꾸어주실 수 있습니까?”

“가능한 일이니 화로에 넣으셔서 주석 박막(薄膜)을 녹이시지요.”

칼 귀츨라프는 자신은 물론이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거울들을 가져오려고 사라졌다. 일준이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내가 다른 건 다 생각해 뒀는데 야드파운드법 단위가 문제였어.”

“야드파운드법이 뭐가 문제라고? 어차피 척관법을 사용하잖아? 알아서 변환하면 되잖아.”

“네가 이공계가 아니니까 야드파운드법의 역겨움을 모르지! 인치, 피트, 그리고 야드로 변환을 해봐. 부피계로 넘어가니 정신이 나갈 것 같더라.”

이어지는 푸념을 들으니 나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현대에 살 때에는 미국 놈들이 미개하기도 하다면서 욕을 했지만 일준이에게는 모든 단위를 뇌에서 변환해야 하는 끔찍한 사태니까. 일준이는 설명을 마치고 한숨을 푹 쉬며 말하였다.

“지금 프랑스가 미터 단위계를 사용해도 영국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야드파운드니까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이거 어떻게 해결할 방법 없을까?”

“조선 단위계는 SI 단위계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그나저나 내일 협상장에 빵을 좀 만들어서 보내려고 하는데 베이킹파우더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

“베이킹파우더는 제조법도 간단하니 당장 만들 수 있어. 지금 특허권을 매각하려고 만든 기술들이 죄다 십 년 이내에 만들어질 간단한 기술이니 이것도 팔자고.”

녀석은 탄산수소나트륨과 포도주 병 안에 가라앉은 물질을 걸러냈다. 이를 화로에 슬쩍 말리고 갈아서 감자녹말과 섞으니 30분 만에 모든 과정이 끝났다.

“베이킹파우더 완성. 시제품이라 시험을 해보지 않아서 현대의 것과 품질이 다른 것은 이해해줘. 이건 네가 빵을 만들면서 점검해 봐야 할 거야.”

“이렇게 금방 만들어지는 물건이었어? 싼 이유가 있네.”

“그러니 조선이 발달하면 특허로 돈을 벌어들일 초석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뿐이야. 그럼 특허 가격은 어떻게 정해야 할지 알려줄 수 있어? 나야 이 시대 시세를 잘 모르고 있으니 네 지식이 필요해.”

“일단 은 반사판 거울은 오천 파운드(은자 25,000냥)정도로 비싸게 부르고 베이킹파우더를 비롯한 사소한 물건은 이천 파운드(은자 10,000냥)로 시작해서 절반 정도로 낮추도록 해.”

조만간 발명될 특허라 하니 아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협상 과정에서 시간을 질질 끌면 제 값도 못 받고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일준이는 가격을 기억하고 말하였다.

“물론 먼 훗날에 발명될 물건이자 절대로 놓을 수 없는 특허들도 여럿 시험해 보았어. 니트로글리세린의 제조에도 성공은 했고 글루탐산나트륨도 분리에 성공했다.”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들었다고? 정말?”

“만들기는 했어. 예상보다 빠른 삼 분 만에 스스로 폭발해 버렸지만.”

니트로글리세린이 민감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터지는 물건이었던가?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일준이는 변명하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하였다.

“불순물이 있으니 어쩔 수 없더라고.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원료 자체의 순도가 낮고 실험기구가 엉망이라 극복할 수 없는 문제야. 계속 해 볼까?”

일준이가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한계가 명확했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나라에 최첨단 기술을 아는 기술자가 떨어져 보았자 납땜이나 할 것이라는 자조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지.

결국 영국 왕립학회나 프랑스 과학한림원을 비롯한 최첨단 기술을 섭렵한 집단이 필요하다.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 녀석을 위해 조언을 하였다.

“일단 위험한 물건은 만들지 말고 재료를 수입하거나 네가 유럽에 갔을 때를 대비해서 제조법만 확립해 둬. 네가 불의의 사고로 폭사(爆死)당하면 내가 평생 후회할거다.”

이 정도로 해 뒀으면 큰 문제는 없겠지. 일준이에게 받은 베이킹파우더와 휴 린지가 가져온 물품들로 파운드케이크를 여러 종류 만들어 두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본격적인 계약 여부를 결정하기 시작하였다. 피로가 눈가에 내려앉은 휴 린지는 임상옥을 마주하고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이미 소개는 들었습니다. 듣자하니 청나라와 교역을 실시하는 상회의 대표라 하셨는데 연륜도 경험도 충분하신 것 같군요.”

“저희는 상인이니 칭찬보다는 오가는 은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다과(茶菓)라도 드시면서 논의를 하시지요.”

임상옥을 상대로 어떻게든 후려치려는 휴 린지였지만 내가 파운드케이크를 가져와 썰어서 내어주었다. 임상옥은 이를 먹고 나를 슬쩍 바라본 뒤 말하였다.

“근래에 들어 조선에서도 이런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듣자하니 서역의 주식(主食)이 밀가루로 만든 빵이라 하였는데 이를 값싸게 들여올 수 있겠군요.”

“그······. 그야 불가한 일은 아니지만 수입하는 거리가 문제이지요.”

“제가 알기로 동인도회사는 천축에 있다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밀을 재배하여 빵을 만들어 드시지 않습니까?”

휴 린지는 벌써부터 수세에 들어갔다. 이후 협상을 진행하였지만 휴 린지 입장에서 건져낸 것이라고는 동해 일대의 포경권이 전부였다.

“조선의 해역 중 서쪽 연안을 제외한 모든 해역에 대한 포경권을 동인도회사가 십 년 동안 독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다른 이들과 분쟁이 벌어지면 계약에 근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 정도야 저희가 처리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동인도 회사 입장에서는 새로운 거래처인 조선의 독점권을 십 년 동안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독점조항으로 시세를 후려칠지도 모르니 임상옥을 통해 제안을 하였다.

“시세를 정할 때에는 현지 시세를 위주로 정합시다. 홍삼 시세는 중국의 광주 일대의 시세의 절반으로 삼으면 어떠합니까?”

“절반은 너무 적습니다. 조선 단위인 한 근당 은자 일백오십 냥으로 고정하시지요.”

“저희도 다 알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미 조선 내부의 홍삼 시세가 은자 일백 냥인데 이를 도성으로 옮기고 관세(關稅)를 부과하고 관리하는 비용을 생각해 주십시오.”

거의 울 것 같은 입장이 된 휴 린지였는데 시세의 절반에 달하는 홍삼에 관세가 부과되면 끔찍한 비용이 나오리라 예상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 조정할 마음으로 제안하였다.

“그러하면 최저가와 최고가를 정합시다. 은자 일백오십 냥을 최저가로 삼고 최고가는 은자 삼백오십 냥으로 하여 관세를 포함한 가격을 정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장 광주에 다녀와서 시세를 알려드리지요.”

“혼자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호조판서, 영국으로 따지면 재무부 장관님과 다른 관료들이 함께 다녀와야지요. 두어 달 정도 걸릴 것 같지만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광주의 시세가 얼마나 뛰어올랐을지 모르지만 잘 하면 한 근당 은자 600냥에 달할 것이다. 우선 홍삼 오백 근을 팔고 이를 기준으로 시세를 삼으니 잘만 하면 최고가인 근당 350냥을 받을 수도 있겠지.

졸지에 시세를 속일수도 없게 된 휴 린지는 나를 바라보고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최고가를 정해두었으니 광주 현지의 매점매석도 막힌 형편이다.

-----

조정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조만영이 시세 확인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김조순의 자택에도 사람이 방문하였다. 김조순의 병이 깊어져 몸이 온전치 않음에도 이들은 사람을 찾았다.

머슴들은 당장 이들을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선비들의 눈빛이 매섭고 봇짐에 삐죽이 튀어나온 도끼를 보고 주저하였다. 결국 가장 앞에 있던 선비가 말하였다.

“나는 양근 벽계(현 양평 일대)에서 경서(經書)에 매진하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화서(華西)라 하네. 나라의 일이 온전히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의기를 가지고 영돈령부사 대감을 만나보고자 하였네. 어서 문을 열어주게나.”

“대감께서는 몸이 편찮으시어 손님을 만나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 손님이 당도하였는데 맞이하지 않음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내 몸이 불편해 이들을 앉아서 맞이하니 참으로 불민한 일이로구나. 어서 들이도록 하여라.

김조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머슴들은 두 말을 하지 않고 대문을 열었다. 다섯 명의 선비들을 대표하여 앞에 나선 사람은 위정척사파의 일원 중 한 명인 이항로(李恒老)였다.

아직 초명인 이광로(李光老)라 불리고 있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김조순은 이들의 소개를 듣고 말하였다.

“의기를 가지고 이 자리에 왔다 함은 나라의 일에 대하여 논하려는 마음이겠지. 아마 서역과의 교역을 반대하기 위하여 지부복궐소(持斧伏闕疏)를 행하려는 것이 분명하군.”

“영돈령부사 대감께서 하신 말씀이 실로 옳으십니다. 궁궐 앞에서 상소를 올리기 전 미리 언질을 드려 불편한 일을 피하려 하였을 뿐입니다.”

김조순이 예상한 사태가 벌어졌다. 훗날에야 완성될 이항로의 화이론(華夷論 -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주장)은 지방에 대한 압박과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급격히 완성되었다.

로드 암허스트 호가 이 나라에 도착하고 두 달. 협상이 시작되고 한 달이 흘렀으니 누군가 움직일 때가 되었음을 김조순도 눈치 채고 있었다.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불만이 터져 나왔음을 알고 김조순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이항로는 자신이 주장할 말을 미리 김조순에게 알려주었다.

“양이들의 방침은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고 이를 널리 퍼트려 불손한 마음을 돌아다니게 합니다. 이러한 일을 추구함은 금수(禽獸)와 같이 변모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리하여도 유근이의 말을 들어보니 금수는 아니고 사상이 다르고 도덕이 부족할 뿐이지.”

“도덕이 부족한 나라와 교역을 행하여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이를 오로지 한 손을 두어 경계하는 마음을 품고 임하면 모르옵니다만 나라의 귀한 물건이 헛되이 쓰일 것입니다.”

이항로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서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선이 아닌 서양과 동조하는 이들을 처벌하고 성리학을 올바로 세워 민생을 안정시킨다.

현실적으로 한계가 많은 주장이었지만 불만이 팽배한 지방의 유생들에게는 먹힐 주장이었다.

설득을 해 보았자 불만을 잠시 억누를 뿐 더욱 큰 문제가 불거지리라. 이런 문제에 허우적거리는 조선은 빈 틈을 보일 것이며 결국 서양의 열국들에게 약점을 잡힐지도 몰랐다.

“그러하니 영돈령부사 대감께 고변하는 바입니다. 저희가 세상의 물정을 명확히 모르나 의기만은 품고 있으니 지부복궐소를 행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려 하였습니다.”

“고작 다섯 명이 지부복궐소를 행해 보았자 뭐가 나아지겠는가. 어서 지필묵을 가져 오거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은 김조순은 심호흡을 하며 글을 써내려갔다. 모든 지방의 유생들에게 지금 조정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일을 알리기 위한 격문(檄文)이었다.

격문의 내용은 최대한 공정한 서술을 하였지만 여기에는 이항로의 주장이 끼어 있었다. 모든 지방의 유생들이 주상전하와 논의(論意)를 하라는 말이었지만 사실상 지부상소를 권장하는 격문이었다.

“자고로 종기가 생기면 이를 곪을 때 까지 내버려두고 제대로 쥐어짜내야 하는 법이지.”

격문을 모두 작성한 김조순은 이를 이항로와 함께 방문한 젊은 유생인 최대(崔岱)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하인을 시켜 은전을 수천 냥이나 건네주면서 말하였다.

“이를 즉각 목판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퍼트리도록 하게. 원한다면 필사를 하여도 좋으며 글귀가 절대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 하였는가? 상소를 올리는데 내가 준 돈으로 의복을 정돈하고 올라오도록 하게. 도끼의 날을 벼려 자신의 목을 떨굴 수 있음을 알려주면 더욱 좋겠군.”

다섯 명의 유생이 물러나자 김조순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허우적거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머슴에게 소식을 들은 정약용이 급히 다가와 이를 질책하였다.

“자네는 도대체 뭘 하는 것인가! 그토록 상여에 오르고 싶단 말인가!”

“지금 오르면 아니 된다네. 밖에는 호랑이들이 넘실거리며 안에는 승냥이들이 발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다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는데······.”

“호랑이 이전에 자네의 목숨이 문제라네. 맥을 짚어보니 며칠 이내에 절명할 사람이 아닌가!”

침과 탕약을 마셔서 가까스로 기력을 찾은 김조순은 숨을 헐떡거리며 정약용을 바라보았다. 그 형형한 눈빛에 정약용조차 고개를 돌렸고 김조순은 자신의 목숨을 다 하여 마지막 상소를 올리려 하였다.

“내가 내 자신의 복록과 안동 김씨의 부흥을 위하여 평생을 다 하였네. 그러나 나라의 명운이 무너지면 부흥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걸세. 이 나라의 뜻을 하나로  뭉쳐야 하네.”

“나라의 뜻을 하나로 뭉치는 일은 내가 대신할 것이니 제발 쉬도록 하게!”

“자네는 할 수 없으니 내가 해야지. 경서에만 매진하여 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오로지 의기만 가지고 움직이는 지방의 유생들을 깨우치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정약용 자신도 그러한 사람을 수두룩하게 보아왔다. 백성들이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겪는데 오로지 책에만 몰두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혹 제대로 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현실 정치와 일치하지 않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약용이 침묵하자 김조순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법은 하나일세. 이들을 모두 서역으로 보내서 현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면 이들도 변모하지 않겠는가?”

친구의 죽음을 앞둔 정약용도 이를 만류하지 못 했다. 거의 들려나가다 시피 가마에 올라탄 김조순은 궁궐로 입궐할 채비를 갖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