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27편
(3장 - 서역 사절단(2))
인원 선별과 동인도회사의 여유 상선이 집결하는 동안 영국 정부에서 보낸 국서(國書)가 도착하였다. 무려 동인도회사의 간부도 아닌 부회장이 이 머나먼 조선까지 방문하였다.
“저는 동인도회사의 부회장 존 골즈버러 레이븐쇼(John Goldsborough Ravenshaw)입니다. 대영제국을 통치하시는 윌리엄 4세 폐하와 총리 찰스 그레이 경께서 작성하신 국서를 전달하겠습니다.”
조약을 맺고 싶으면 직접 오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이 먼저 제안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군사적으로는 몰라도 외교적으로 준 문명국도 아닌 제대로 된 문명국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된 국서가 전달되었구려. 사람을 보내 영길리에 방문하여 조약을 맺고 각종 물품을 교역하는 일에 대하여 논의를 하겠다는 뜻은 제대로 전달하였소?”
“물론입니다. 저희 대영제국은 수많은 물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니 오히려 동인도회사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 하였지요. 사실 저희가 보낸 직원이 서신을 보낼 때마다 하소연을 하더군요.”
존 레이븐쇼는 이 말을 하면서 나를 째려보았는데 영국인들에게 나는 악마 같은 외교관으로 인식된 것 같았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말하였다.
“총리께서 소식을 듣고 선물을 전해주셨습니다. 자신이 즐겨 마시는 홍차를 제공하셨는데 조선은 물이 맑고 공기가 청량하다 하였으니 홍차 맛이 더욱 좋을 것이라 하시더군요.”
“그토록 자랑스러운 차라니 마셔볼 용의가 있소. 듣자하니 영길리는 청나라에서 차를 수입하는데 차는 청나라 물건이 세상에서 으뜸인 법이오.”
존 레이븐쇼는 시종을 시켜 가져온 본차이나 다기에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낸 다음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향을 맡으니 화장품 냄새에 가까운 얼 그레이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훌륭하구려. 금귤(金橘)을 넣은 것 같은데 향에 익숙해지면 즐겨 마실 생각이 드는군.”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센 박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소문을 듣자하니 영길리에서 머무른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 차에 대한 감상이 듣고 싶네.”
휴 린지가 여러 각도에서 정보를 수집하였고 나와 일준이가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말했던 소식까지 들은 것 같았다.
당장 얼 그레이(Earl Grey tea)가 맛이 좋다고 할 수 있었지만 명칭이 언제 생겨났는지 몰라서 망설였다. 그러다 1700년대부터 홍차를 만들던 기업을 떠올리고 넘겨짚어서 말하였다.
“제가 홍차를 많이 마시지 않아서 맛이 좋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홍차를 만든 회사는 트와이닝스나 포트넘 앤 메이슨 중 하나 같군요.”
“트와이닝스(Twinings)의 공장장이 배합 비율을 결정한 홍차인데 용케 맞추었군.”
상대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치졸한 짓이 아니었다. 머나먼 동방에서 본토 외교와 비교할 수 있는 짜릿한 외교를 맛보았으니 이렇게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보다 이런 방향으로 부족한 일준이를 프랑스에 보내게 된 결정에 만족하며 차를 비우자 존 레이븐쇼는 효명세자에게 인원 선별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절단을 보내신다 하였는데 인원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애석한 일이지만 제법 많소. 총원이 나를 포함하여 삼백사 명이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조선의 왕자께서 직접 사절단에 참가하시다니요?”
“호응이 너무 좋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요. 각지의 유생들과 조정 관료들이 사절단에 참가하기로 하였으니 왕족이 아닌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옳은 일이지.”
동인도회사 부회장 입장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인원이 한 번에 움직였다. 그는 여러모로 계산을 해 보더니 여행 일정을 즉석에서 잡아주었다.
“저희도 접대를 위한 인력과 사절단을 모시기 위한 선박을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일정 개시는 9월 초가 될 것이며 선박이 짐을 옮기는 데에만 최소 한 달이 걸릴 겁니다.”
“서역의 역법으로 9월이라 하면 이 나라의 역법으로는 8월이구려. 마지막 선박에는 내가 오를 것이며 이 날을 길일인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다음 날로 하겠소.”
“그러하면 저희 기준으로 10월 15일 마지막 선박이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동안 먼저 출발한 분들은 광저우에 있는 저희 회사 사람들이 담당하면 되겠군요.”
모든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각지의 유생들은 가족과 만나 마지막 당부를 하였고 먼 길을 나아가기 전 손톱과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유해(遺骸)를 대신할 물건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정에 쌓여있는 인삼 5,500근도 차근차근 처리되었다. 임상옥은 최종 계약을 맺고 매 해 인삼 6,000근의 판매 및 시일에 따라 증량으로 결정하였다.
이외에 각지에서 올라온 토산품과 여러 물건들이 옮겨졌다. 이 여러 물건에는 일준이가 개발하고 특허권을 적당히 싼 가격에 매매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열수환을 제조해서 벵골 일대에 공급하면 참 좋겠군. 닐슨 조 자네를 왕립 과학협회에 추천할 생각도 있는데 함께 영국에 방문하여 과학에 대해 논하면 어떠한가.”
“저를 아끼시는 분이 프랑스에서 종교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하였습니다. 이 분을 내버려둘 수 없으니 세상 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제가 보좌해야지요.”
일준이를 설득하려던 존 레이븐쇼도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이 나라가 충(忠)과 효(孝)에 의해 움직이는 사실은 영국 본국에서도 알고 있으니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없으리라.
홍삼은 먼저 옮겨져서 은으로 돌아왔고 모시, 각종 가죽류를 시작으로 칠기나 백자를 비롯한 가공품의 차례가 되었다. 이번 사절단에서 상업 관련 관료로 선출된 임상옥은 자신만만하게 이를 보여주었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칠기도 그렇고 백자도 영 마땅치 않군요. 가격이 싼 편이니 이해는 하겠습니다만 절대적 품질을 따지자면 청나라 물건은커녕 일본 물건보다 못 합니다.”
그나마 저런 평가도 일준이가 만들어낸 여려 안료 덕분에 올라간 것이다. 19세기부터 일본의 도자기와 칠기 기술력은 점차 증가하여 조선을 역전하기 시작하였다.
개화기에 들어서는 일본제 도자기가 조선에서 더 많이 팔렸으니 그나마 지금이 시장 경쟁이 가능한 마지막 시기이다. 임상옥은 금과 은 그리고 각종 안료로 채색된 화려한 일본제 도자기를 보며 이를 갈아댔다.
“왜국이 이렇게 좋은 자기를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역시 세상은 넓게 보아야 아는 일이로군요. 참으로 좋은 물건이니 명심하고 다음번에는 더 좋은 물건을 만들 것입니다.”
“저희도 조선에서 홍삼 하나만 사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조선의 도자기를 사들여 비싼 값에 파는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몽금포에 정박한 다섯 척의 동인도회사 상선을 통해 100명 단위로 먼저 유생들이 출발하였다. 우리가 없는 동안 조정의 중핵(中核)으로 일할 조만영의 말에 의하면 저들은 오로지 청나라를 보려는 일념으로 응했다 하던가.
중양절이 지나고 양력 1831년 10월 15일, 효명세자와 관료를 중심으로 한 마지막 사절단이 출발하였다. 효명세자를 위하여 준비된 배에 나와 일준이도 탑승하였고 선단은 보름 만에 청나라 광주에 도착하였다.
“세자저하께 아뢰옵나이다. 신들이 한 달 먼저 청나라에 당도하여 물정을 파악하였지만 호조판서의 말과 지극히 일치하니 이를 감당할 길이 없었사옵니다.”
조만영이 당했던 일을 선발대로 나선 유생들도 당했다. 심지어 팔다리가 부러져 병상에 누운 사람마저 생겨난 상황이었다. 이들은 효명세자에게 억지로 절을 올리며 말했다.
“신들이 여러 물정을 모르고 있다 변고를 당하였사옵니다. 세자저하께서 품으신 큰 뜻을 거스르게 되었사오니 부디 엄히 벌하여 주시옵소서.”
“잘못을 저지른 이는 청나라이니 벌은 내리지 않겠소. 부디 충분히 정양(靜養)하여 기력을 되찾고 청나라의 실상을 이 나라에 퍼트려 주시오.”
열 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탈락하였지만 선단은 계속 움직였다. 사절단이 벵골에 꾸역꾸역 입항하자 더 이상 동인도회사의 상선이 아닌 영국 본토에서 건너온 전열함이 등장하였다.
“보십시오! 영국의 자랑이자 위대한 브리튼의 이름을 사용하는 HMS 브리타니아 호입니다. 저희 영국 해군의 최신예 전열함이지요!”
“저게 배란 말인가······. 마치 산이 움직이는 것 같군.”
지금까지 우리가 탑승한 배는 상업용 선박이라 배수량이 500톤 규모였다. 이 정도면 조선에서 군선으로 사용하는 판옥선의 배수량의 2배이며 길이 차이는 1.3배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브리타니아 호는 120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으며 배수량이 3,000톤에 달한다. 말 그대로 판옥선 열다섯 척을 합쳐놓은 압도적인 크기의 전열함이었다. 효명세자는 망원경으로 배를 살펴보며 말하였다.
“일전에 박현상이 논하기를 서역의 군선은 산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거대하고 사람이 뛰는 것 같이 느리다 하였는데 사실이었군. 영길리는 참으로 강성한 나라이구려.”
“세자저하께 아뢰옵나이다. 이러한 흉험한 나라와 교역에 응하면 저들은 무력으로 응할 것이옵나이다. 그러하니 교역에 응하지 마시옵소서.”
“응하지 아니하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소. 오히려 태도가 돌변하여 이 나라를 겁박할 마음을 품을지도 모르는 법이지. 모두 마음을 굳게 다잡고 태연하게 응하시오.”
지금 외무부를 이끄는 사람이 파머스턴 자작이며 포함외교의 대표주자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혹시나 초반부터 기를 꺾어놓을지 몰라 효명세자에게 이야기를 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대처가 늦었다면 전열함에 위압당한 관원들 때문에 삽시간에 불리한 위치에 놓이겠지.
첫 선물로 포함외교를 받았으니 나도 선물을 전해줄 마음이 샘솟았다. 우리를 홍해 입구까지 호위한 브리타니아 호가 돌아가자 이런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영국의 후원을 받는 친영국가 이집트의 수에즈를 육로로 통과해 마침내 지중해에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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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내각도 조선의 방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조선에서 논문을 보냈다 했을 때에는 별 일이 다 있다 생각하고 넘겼다. 이대로 두면 동인도회사에서 알아서 조약을 맺고 자신들이 들어갈 길을 열 것이 분명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조약을 맺는 것도 실패하고 교역에 대한 계약조차 조선과 합의점을 찾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현 총리인 찰스 그레이는 수없이 쌓인 보고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조선은 보통 나라가 아니로군. 내 머나먼 동방에서 이러한 외교정책을 본 적이 없네. 파머스턴 경이 보기에는 조선은 어떠한 나라인가?”
“관료들의 충성심과 귀족집단의 죽음을 불사한 투쟁 그리고 산이 넘쳐나는 지형까지. 모두를 고려하면 무력으로 무너트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가능은 해도 손해가 너무 큽니다. 여기에 외교능력도 준수하지요.”
포함외교, 무력을 동원한 폭압적인 외교정책의 시조와 마찬가지인 존 헨리 템플, 3대 파머스턴 자작은 외교문서가 도착할 때마다 혀를 내두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갔지만 홍삼무역으로 얻어낸 이득 덕분에 HMS 브리타니아 호를 인도까지 보낼 수 있었습니다. 조선을 시작부터 압박하여 기를 꺾어놓아야지 않겠습니까.”
“그 예산이 헛되이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통하기야 하겠는가?”
“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전열함 맛을 보았으니 낡아서 해체할 전열함을 헐값에 팔아치워야지요. 이건 통할 겁니다.”
파머스턴은 자신의 포함외교가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무력 앞에서 어지간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 법이니까. 다만 조선을 오로지 무력으로 압박하려니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충성도를 보니 현지 세력 포섭도 험난한 나라입니다. 무력으로 무너트리려 하면 미얀마와 같이 산속에 숨어 격렬히 저항하겠지요. 그러니 조약을 맺으셔야 할 겁니다.”
“강압적이지 않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조약 말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해야지요. 조선을 키워서 청나라와 싸우게 만들면 괜찮을 것 같군요. 일이 잘 풀리면 양국이 공멸할 것이 아닙니까.”
이미 영국의 무력은 동양과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이지만 아직은 정보를 모르고 있었다. 청나라는 구식 병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마어마한 물량을 동원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청나라의 엉망이 된 군기(軍氣)와 부패한 정부를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물량에 밀려 피해를 입느니 손해만 보는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는 시기였다.
대신 우회 수단으로 조선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여 청나라와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다. 파머스턴은 손가락을 들고 서류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며 말했다.
“동인도회사가 조선의 남쪽 해역과 동쪽 해역의 포경 독점권을 얻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포경을 실시하는 해역과 일치하니 또 다른 분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기껏해야 천만 명 이라 하였으니 잘못하다가는 양 국가에 협공을 당해 무너질지도 모르지. 더군다나 외교관인 한센 박이라는 자가 자네의 수작에 넘어가겠나?”
“넘어갈지 안 넘어갈지는 이야기를 해야 알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 당장 돈으로 설득해 제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싶군요. 이런 인재는 흔치 않습니다.”
파머스턴이 콧수염을 씰룩거리자 찰스 그레이는 마땅치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짓씹었다. 일 년 전 아서 웰즐리가 총리라면 저런 정책을 고스란히 실현했으리라. 파머스턴은 아쉬움이 남았는지 제안을 하였다.
“조선의 노동력은 매우 값싼 편이라 합니다. 총리께서는 조만간 노예제를 폐지할 것이라 하였는데 조선에서 쿨리(Coolie)를 사들여서 각 식민지의 노동력으로 제공하면 어떠하십니까?”
“절대로 안 할 걸세. 허위 계약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니 건전하지 못 한 일이 아닌가. 물론 전쟁 포로나 죄수라면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한센 박과 닐슨 조의 출신이 비슷하다 하였지?”
휴 린지는 여러모로 소식을 알아보아 박현상과 조일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미 친국(親鞫)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고변하고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입수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한 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보고서를 확인한 찰스 그레이는 코웃음을 치며 이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다른 관료에게 이를 전해주고 웃음을 참은 채 말하였다.
“라임하우스에서 일하던 노동자 주제에 뭘 이리 상세히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물론이요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이야기부터 온갖 주제에 대해 논한다 하더군. 재무부 장관이 보기엔 어떠한가.”
“어엿한 귀족의 자제가 아니고서는 여기 있는 서적을 모두 탐독할 수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홍차와 사탕을 입에 대자마자 어느 회사에서 만든 물건인지 알아차리다니요.”
내각 장관들이 보고서를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찰스 그레이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박현상 한 명만 저러하면 모르겠는데 조일준도 만만치 않은 인재였다.
열수환이라는 제사제(制瀉劑)의 개발과 은을 이용한 거울 반사막의 발명을 비롯하여 코발트블루를 비롯한 수많은 안료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냈다 하였다. 여러 정보를 종합한 찰스 그레이는 이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한센 박과 닐슨 조는 조선 왕이 보낸 첩자가 분명하네. 조선 왕의 모친은 판남 박이라는 가문 출신인데 재판에 나선 조선 왕이 눈물을 흘리고 그 가문으로 입양시키지 않았는가.”
“이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왕이 함부로 눈물을 흘리다니 심상치 않은 조짐이로군요.”
“한센 박의 정체는 왕의 외종사촌 혹은 그 후손일걸세. 우리를 정탐하기 위해 청나라 노동자 사이에 한센 박과 닐슨 조를 비롯한 사람들과 이들의 행동을 후원할 자들을 마련하여 영국에 투입한 것이 분명하지.”
찰스 그레이는 여러 정세를 보며 이야기의 앞뒤를 맞추어나갔다. 이들은 23세가 아닌 30세쯤 될 것이며 아마 15세 무렵에 영국에 건너와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라 하였다.
추측에서 맞아떨어진 것은 나이에 불과하였지만 이런 억측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박현상과 조일준이었다. 찰스 그레이는 한숨을 내쉬고 방침을 정하였다.
“조선 사절단의 방문을 최고 예우로 맞이할 것이되 이들의 숙소는 가급적 정보 유출을 막아내기 위해 런던 근교의 저택으로 정해두게.”
“라임하우스의 노동자들도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센 박의 인맥이 남아있다면 저희가 보여주기 싫은 정보도 유출될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빈민들을 이스트엔드로 추방시키도록. 또한 공장을 정비하고 견학(見學)을 요청할 장소를 선별하여 이들이 불순한 것을 보지 못 하도록 만들게.”
정체불명의 외교관 한센 박의 정체를 어린 나이에 유럽으로 건너온 왕의 친인척으로 파악한 찰스 그레이는 조선 사절단을 맞이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들의 대처는 쓰레기를 침대 아래에 숨기는 짓과 마찬가지였다. 박현상이 이를 찾아낼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못 한 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