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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8화 (28/345)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28편

(3장 - 영길리 (1))

지중해 연안에 들어설 무렵 음력으로 해가 바뀌었다. 양력으로 1832년 2월 2일 무렵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기다리며 효명세자를 필두로 제사를 드렸다.

“조종(祖宗 - 임금의 조상)께 송구하오나 머나먼 땅에서 제사를 올리옵나이다. 견문을 넓힐 마음으로 타국에 당도하였으니 제사의 예법에 어긋남을 부디 송구하여 주시옵소서.”

나도 평생 제사를 지낸 적은 없지만 여기에 참가해야 했다. 사실 가짜 부모의 기일에 주변 시선을 염려하여 나름 제사를 지내니 별 수도 없고.

조선에서 여기까지 가져온 식량들이지만 동이 나 버리고 제사상에 올릴 차나 술만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는 제사를 지내려고 해도 서양의 물건을 사용해야 하리라.

사절단은 홍해를 건너오며 이미 이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은 안경을 낀 사람들로 이들은 선원을 통해 서양의 안경으로 하나둘씩 교체하였다.

변명이야 모래바람으로 안경알이 깎여나가서라 하였지만 더 가볍고 도수가 잘 맞는 안경이 마음에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준이도 멋을 내기 위한 안경을 낀 채 이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네? 의복이야 언젠가 헤질 물건이라지만 유생들이 저렇게 물건을 사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위정척사파도 했던 일이니 이럴 줄 알고 있었어. 듣자하니 서역과의 통상을 거부하라면서 도성에 올라오면 외국 문물을 소달구지 가득 사들여서 고향으로 내려갔다더라.”

“그 정도였어? 이정도면 돌아가는 길에 모두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깎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지만 복장은 변할지도 몰라. 근본주의 사상에 몰두하여 태도가 변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아직 개선의 여지가 충분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개선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나와 일준이가 힘을 써야하지만. 제사를 마치고 이틀 정도 기다리니 지중해에 머물던 영국의 함대가 도착하였다.

또 다른 1급 전열함과 2,3급 전열함 그리고 호위를 위한 프리깃으로 구성된 15척의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도착하였다. 기함에서 내린 사람을 보니 영국이 이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스 외교를 담당하던 저 찰스 제임스 네이피어가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하여 응하였습니다. 조선의 왕자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린 네이피어와 악수를 나눈 효명세자는 함대를 확인하며 말하였다.

“지난 번 배는 국호(國號)를 본뜬 브리타니아 호였는데 기함의 이름이 로얄 게오르기 호인가 보구려. 박현상이 번역하기 이전의 서류를 보고 어느 정도 알아차리게 되었소.”

“거의 적중하셨으니 로열 조지(Royal George) 호라 읽습니다. 여행을 오신지 석 달이 지났음에도 벌써 영어를 읽는 법을 익히시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로군요.”

“배움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 아니오. 배 위에서 하는 일이 없으니 모두가 서역의 언어를 익히고 배우는데 여념이 없소. 말이 통해야 많은 것을 아는 법이지 않소.”

그야 하루 12시간 동안 공부를 하니 당연한 일이지. 내 예상대로라면 사절단 전체가 영어를 능숙히 읽고 쓰는데 길어야 1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찰스 네이피어는 사절단을 돌아보며 놀란 눈치로 말하였다.

“조선의 양반이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과거시험이라는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귀족 작위를 획득하였다 들었습니다. 이런 분들이니 나라의 수재(秀才)들이 집결한 것이로군요.”

“그러니 더욱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기 위하여 사절단을 구성한 것이오.”

“모두가 저희 대영제국에 오셔서 배우시면 좋은 일이지만 뜻이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아쉬운 일이로군요. 프랑스에 방문할 사절단 칠십여 명이 따로 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스에 배정된 인원도 나름 격식을 맞추었다. 효명세자의 주요 업무가 영국과의 조약이라면 이지연의 업무는 프랑스에서 천주교의 전파에 관한 확약(確約)을 맺는 것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 학문을 배우기 위한 젊은 유생 스무 명과 문화를 배우기 위한 사람들도 있었다. 네이피어는 이미 프랑스의 서신을 받았는지 휘파람을 불며 프리깃을 가리켰다.

“프랑스 정부에서 사절단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압박을 가하더군요. 문화의 근본은 프랑스인데 어떻게 천박한 저희가 동방의 귀족들을 접대할 수 있느냐는 말이었습니다.”

“천박하지 아니한 것 같고 강성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즐기는 것 같소만.”

“그야 어디나 마찬가지지요. 프리깃 열 척만 동원해서 여러분을 빠르게 옮기면 좋을 것 같지만 파머스턴 경이 해적을 핑계 삼아 격식을 맞추라 종용하더군요.”

복잡한 정치 문제를 논하지 않으려는 찰스 네이피어는 짐을 옮기며 우리의 탑승을 기다렸다. 이제 다른 배를 타고 프랑스로 향하게 될 72명의 인원을 위해 효명세자가 당부하였다.

“불란서는 영길리와 비견할 정도로 강성한 나라이자 서역의 모든 문물은 물론이요 온갖 재주에 능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라 하였소. 그러하니 서학에 대한 논의 외에도 다른 일을 알아보시오.”

“세자저하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서학이 이 나라에 발을 붙이지 못 하도록 엄히 다스릴 것입니다. 서학의 교리와 관련하여 여러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스스로 뉘우칠 것입니다.”

예조판서 이지연이 대표로 나서고 각 서원과 향교에서 엄선된 아홉 명의 유생들이 먼저 인사를 올렸다. 이들 모두는 경서(經書)를 앉은 자리에서 줄줄 외울 재주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리학 하나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음으로 모인 사람들은 20대 초반의 유생들과 이를 대표하는 일준이였다.

“조일준 자네는 이지연을 보좌하며 불란서에서 학문을 익히도록 하게. 듣자하니 불란서는 이학(理學)에 능통한 국가 중 하나라 하였으니 자네의 재주를 더 키울 수 있을 것일세.”

“세자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배움을 주고받을 것입니다.”

일준이는 몰라도 이들과 함께 한 19명의 유학생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대하며 꿈에 부풀었다. 아마 성균관을 능가하는 신고식을 당하고 필사적으로 학문에 몰두하리라. 마지막으로 손을 잡은 사람은 추사 김정희였다.

“추사는 필선(弼善 - 시강원에서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서예와 회화에서 이 나라의 으뜸인 사람이 아니오. 불란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가르치며 명성을 떨치시오.”

“제 재주가 서역에서 통용될지 한사코 의심하였으나 세자저하께서 말씀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잡기(雜技)가 아닌 온전한 서역의 일을 배워서 올 것이옵니다.”

그나마 정상적인 대접을 받을 사람 30명이 마지막으로 분류되고 이들을 호위할 군관 12명이 배정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하여 시칠리아를 우회하고 프랑스 남쪽에 닿을 무렵 수십 척의 선단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였군요. 아마 위엄을 보이기 위해 가용선박 모두를 끌고 온 것 같습니다.”

영국은 외교관인 찰스 네이피어가 우리를 맞이하였지만 프랑스는 해군 사령관 출신인 앙리 드 리니(Henri de Rigny)가 함대를 지휘하였다. 서로의 배를 가까이 대자 대표인 앙리 드 리니가 건너와 인사를 올렸다.

“머나먼 동방인 조선에서 오신 분들에게 저 앙리 드 리니가 프랑스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군주 루이필리프 폐하를 대신하여 조선의 왕자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야기는 들었소. 이전의 군왕을 내치고 새로운 불란서의 왕이 된 분이지만 이는 백성의 뜻을 받아들여 이룩한 것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복된 일이오.”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 루이필리프의 즉위 과정에 대하여 칭찬하자 앙리 드 리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효명세자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인원에 대해 다시 확인하고는 말하였다.

“저희 프랑스에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언제나 환영하는 일입니다. 또한 수많은 문호(文豪)와 예술가들이 넘쳐나는 곳이 프랑스입니다. 영국과 비견할 수 없지요.”

찰스 네이피어는 그 당당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고 이지연을 시작으로 프랑스로 향할 인물들이 건너갔다. 초반 통역이야 일준이가 알아서 할 일이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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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항지는 내 예상과 달리 런던이 아니고 브리스틀이었다. 이곳은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항구이니 발달에서 뒤쳐졌지만 여기만 하여도 사절단 사람들이 보기에는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영길리의 기후는 생각보다 온화하구려. 항구에 머무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이며 모두가 밝은 모습을 보이니 우중충한 하늘과 대조를 이루는군.”

“다른 것은 몰라도 물이 영 마땅치 않사옵니다. 물 안에 기름이 번들거리는 듯이 청량하지가 않고 몸을 씻으니 앙금이 남는 기분이옵니다.”

“물도 그렇고 음식이야 배 위에서 먹던 건량(乾糧)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지나치게 짜고 달며 기름이 많으니 문제로군. 채소로 입을 깔끔하게 씻어내고 싶은 심정일 뿐이네.”

맛없기로 소문난 영국의 요리라도 귀빈을 위한 식사이니 기름진 것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았다. 브리스틀에서 며칠 정도 여독을 풀고 런던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자 기병대가 우리를 양 옆에서 호위하였다.

“병사의 기강이 엄정하고 모든 명령을 엄수하니 참으로 마음이 놓이는군. 다른 무엇보다 산이 적어 경치가 트여 있어서 좋군. 박현상 자네는 무엇을 준비하는가.”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고 있사옵니다.”

런던은 증기기관으로 인한 오염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으리라. 내 예상대로 효명세자는 런던 근처까지 오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였다.

“마치 화로 옆에서 연기를 맡는 것처럼 탁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왜 이러는지 아는가?”

“영길리는 증기기관이라 하여 사람의 힘 대신 석탄을 태워 기계를 움직여 직물을 만듭니다. 이러한 증기기관이 도처에 있으니 공기가 매연으로 탁해지는 법이옵니다.”

현대인인 내 기준으로는 미세먼지가 심한 날 수준의 공기 수준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이들은 난생 처음 접해본 매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급기야 마차의 창문을 닫고 모두 내가 만들어둔 비단 마스크를 쓰고 눈만 굴리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런던에 닿을 때 쯤 함성이 들려왔다.

[대영제국의 지배자이시며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이자 하노버의 군주인 윌리엄 4세 폐하께서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시니 영광된 일입니다!]

효명세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조선이 상국으로 모셨던 중원 왕조라면 한 달 내내 뇌물공세와 예의범절을 지켜야 가까스로 접견이 허가되는 것이 관례였다.

나도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 했는데 정말 윌리엄 4세가 우리 사절단을 직접 맞이하였다. 마스크를 벗고 마차에서 내리니 열 명 정도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은 윌리엄 4세가 인파들 사이에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머나먼 조선에서 이 나라의 학문을 배우고 문물을 습득하기 위해 왕자를 보냈으니 내가 직접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대영제국에 방문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네.”

“조선의 세자가 영길리의 군주를 뵙사옵니······.”

“자네는 절을 올릴 필요가 없으니 무릎을 꿇게나. 자네들이 동방의 예법을 배우고 있음을 알지만 조선의 왕자는 왕위에 오를 사람이니 인사가 부족하여도 좋네.”

효명세자가 무릎을 꿇고 서양식 예법으로 인사를 올리고 우리는 동양식 예법으로 절을 올렸다. 인사가 끝나고 윌리엄 4세가 손짓하자 영국의 국가가 연주되었다.

아마 내각에서는 화려한 환영식을 계획한 것 같지만 윌리엄 4세가 이를 반대하였으리라. 인파가 길을 내어주자 효명세자는 윌리엄 4세의 옆에서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런던으로 향하였다.

“여러 번잡한 행사가 많았지만 내가 귀찮아서 모두 취소하였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정치는 내각이 실시하지만 이런 행사는 내가 주관할 수 있으니 편안히 머물도록 하게.”

“벌써부터 접견을 허락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한 일은 되었네. 자세한 일은 총리인 찰스 그레이와 협의하도록 하고 시일이 남으면 나를 방문하게나. 내 조카인 알렉산드리나도 만나서 대화를 나누도록 하게.”

행사는 그저 호위를 받은 사절단이 런던 시내로 규정된 곳 까지 나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윌리엄 4세가 간단한 작별인사를 하고 마차에 오르자 드디어 내각 관료들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영국을 대표하여 외무장관 존 헨리 템플 파머스턴 자작이 인사를 올립니다. 저희의 환영 인사에 만족하셨는지 모르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저희 대영제국의 모든 것을 확인하시면 더욱 만족하실 겁니다.”

모든 것을 확인한다고 말했지만 그래 보았자 자기들이 보여주기 좋은 것만 알려주려 하리라. 효명세자는 내가 했던 말을 마음속에 담고 악수를 나눈 뒤 말하였다.

“모든 일은 엄격한 검증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니 지극히 옳은 말이오. 그러고 보니 서역의 군선이 크고 훌륭하던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면 어떻겠소?”

“바로 보셨습니다. 저희가 호위를 위해 파견한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합니다. 이는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검증 되었지요. 그런 점에서 전열함 몇 척을 구매하시면 어떠하신지요?”

“전열함이라 하면 브리타니아 호와 로열 조지 호 같은 든든한 함선이로군.”

효명세자가 미소를 지었고 파머스턴도 미소를 지었다. 파머스턴이 나를 슬쩍 바라보았는데 아마 내 개입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파머스턴은 청산유수처럼 전열함의 상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내가 전열함 시세만 알지 상세한 문제는 알 길이 없다 생각하리라.

“1급 전열함은 저희도 몇 척 생산하지 않는 물건이지만 일흔 문 정도의 대포를 장착한 3급 전열함은 추천하는 상품입니다. 가격을 낮추어 절반 아래인 은자 팔만 냥으로 모시겠습니까. 어떠하신지요?”

이 전열함은 낡아빠진 중고에 화포는 구색만 맞춰둔 소구경이며 선원도 없으니 해군 장교와 숙련 선원들의 고용비도 지급해야 하리라. 이걸 다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나쁘지 않은 가격입니다. 3급 전열함도 청나라에서는 감히 만들 수 없는 함선이 아닙니까?”

여기서 좋다고 전열함을 여러 척 구매하면 프리깃도 강매 대상이 된다. 이렇게 되면 막대한 숙련 선원 고용비와 유지비로 인한 채무가 발생하고 이권을 강탈당하겠지.

내가 반박하지 않자 파머스턴이 미소를 지었는데 다 예상해 두었다. 자고로 강한 상대가 욕심을 드러내면 대놓고 거절하면 안 되는 법이다.

체면을 차리게 해 주면서 적당한 변명으로 무마하는 것이 강한 상대를 대접하는 법이지. 효명세자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다섯 척 정도를 구매하여 위용을 떨치면 좋은 일이니 홍삼을 판 자금으로 구매하는 것이 좋겠군.”

“세자저하께 아뢰옵나이다. 전열함보다 작은 함선인 상선들도 황해에서 좌초하는 일이 빈번하였사옵니다. 조석(潮汐)이 오갈 때마다 큰 일이 벌어질까 두렵사옵니다.”

나를 대신해 미리 말을 맞춰둔 박규수가 효명세자를 말렸다. 파머스턴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이미 여러 보고서를 통하여 조선의 해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박규수의 말이 옳군. 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미안하게 되었소. 시일이 지나 이 나라가 전열함을 받아들일 항구를 황해에 여럿 만들게 된 뒤에 구입을 추진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렇게 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저희가 조선에 번듯한 항구를 만들어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만.”

“선물을 주는 사람이 선물을 둘 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소. 선물을 받지 못하는 비좁은 집을 주인이 고쳐야 하는 법이 아니오. 듣자하니 토목(土木)에 능통한 나라가 영길리라 하였는데 이를 배울 것이오.”

명분이 앞서니 파머스턴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포기하였다. 조만간 다른 수단으로 수작을 벌이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판단하였으리라.

환영회가 끝나고 영국의 길거리를 시찰하게 된 조선 사절단은 그야말로 눈을 둘 데가 없었다. 어디를 보아도 조선의 모습과는 천지개벽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길거리에 깔린 단석(端石)부터 쉴 새 없이 지나가는 마차와 즐비한 사람들까지. 사람들은 조선 사절단을 구경하기 위하여 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길거리 자체의 높이가 달랐다.

“전부 다 돌로 만든 집인데 최소한 삼 층이 넘는구려. 겨울철에 구들을 때지 않으면 추위를 어떻게 견딘단 말이오.”

“길거리가 말똥 몇 개를 제외하고 청결하기 이를 데 없구려. 내가 북경을 두 번 다녀와 보았지만 북경조차도 영길리의 도읍 런던과 비교하면 돼지우리나 마찬가지군.”

길거리에는 넝마주이를 비롯한 빈민들이 보이지도 않았다. 화려한 문물을 보여주어 시선을 사로잡으려 하는 태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숨긴다 하여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템스 강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악취가 몰려왔고 모두가 코를 싸매고 효명세자도 구역질을 참았다.

“여름에 청계천이 썩을 때의 몇 배는 되는 악취군요. 이 근처에 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박규수의 질문을 들은 영국 관료는 에둘러 북쪽을 바라보며 변명하였는데 참으로 애처로운 변명이었다.

“분변을 처리하는 곳이 있기는 한데 보실 것은 없습니다.”

“북쪽에는 템스 강이 있습니다. 듣자하니 육 년 전부터 강 아래에 굴을 파서 양쪽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는데 그 결과를 보고 싶군요.”

영국 관료들은 오염된 템스 강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이 분명헀다. 아마 비가 좀 내려 오물이 씻겨 내려간 템스 강을 보여줄 생각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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