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39편
(4장 - 진실 (3))
(효명세자의 1인칭 시점입니다)끔찍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몰골의 반대편에는 조금 전 까지 상국으로 모실 마음이 들었던 런던의 길거리가 있었다.
모두가 제대로 된 옷을 입은 신사들이며 모두가 미소를 담고 움직였다. 그러나 내 앞에는 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건져낸 사람이 있었고 의사가 나에게 절망적인 말을 속삭였다.
“제가 환자에게 따로 말은 안 해두었지만 아마 몇 달 이내에 턱뼈가 모조리 썩어 죽을 겁니다. 아편팅크를 많이 사서 먹이면 잠들 듯 죽을지도 모르지요.”
의사의 말을 들으니 묵직한 무언가가 뱃속에서 들끓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정약용이 조선에서부터 챙겨준 석화(石花 - 굴) 환약을 삼켰지만 저절로 눈물이 그렁거렸다.
“고생이 많았네. 병이 치유되었으니 한동안 아편을 마시며 푹 쉬도록 하게나.”
방금 전 치료를 받아 볼이 홀쭉해진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감사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내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런 지독한 병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극약을 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영길리와 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화려한 외양 안에 인세에 볼 수 없는 지옥을 숨기고 있듯이 나 또한 환자의 병을 숨기고 이를 덮어 숨길 아편을 먹여야 하였다.
“세자저하. 근처의 다점(茶店)에서 잠시 몸을 편히 하시옵소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은 물론이요 이 세상도 엉망이었고 이들과 교역을 맺어야 하는 조선도 엉망진창이 되리라. 이미 증기기관을 도입하기로 하였으니 이를 중단하기도 힘겨운 일이었다.
사람들을 살펴보니 박규수는 나를 염려하는 눈빛을 보내왔고 찰스 디킨스라는 사람은 자신을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반면 여기까지 나를 인도한 박현상은 차가운 눈빛으로 길거리만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박현상의 의도대로 이루어졌으니 이제 내 판단을 기다리고 있겠지. 아마 자신에게 이 모습을 보여준 것도 머나먼 영길리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러한 일이 부모의 나라인 조선에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뜻이리라.
만약 박현상이 없었다면 조선은, 그리고 나 자신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멋도 모르고 영길리의 문물을 받아들여 허우적거리다 이들의 야욕에 국토를 강탈당하고 짓눌릴 것이 분명하다.
“만약 영길리를 상국으로 모시게 된다면······.”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아침에 했던 말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박규수가 마음을 굳게 다잡으라 하였지만 오히려 목을 옥죄는 올가미처럼 숨이 막혀왔다.
지금까지 자신은 오로지 눈앞의 일만 보고 살아왔다. 이 나라를 건사하기 위한 대계(大系)는커녕 그저 산적한 업무를 세도가를 포함한 외척들의 힘을 빌려와 하나하나 치워나갔다.
그러다 보니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이미 서역의 문물이 조선으로 흘러들어갔고 압도적인 격차를 목격하였다. 이대로 문을 걸어 닫는다 하여도 나날이 발전하는 열강들의 힘에 짓눌려 무너져 내리리라.
가만히 있으면 저들의 아래에서 온 백성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꼴을 목격해야 한다. 그렇다고 저들과 같이 행동하면 결국 똑같은 일이 벌어지리라.
그러니 영길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들에 대응하며 살 길을 찾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몇 가지 방법을 생각했지만 모두를 깨우치려면 스스로 움직여야 하리라.
“······. 이제 할 일은 따로 있다네.”
지금 영길리의 수작에 넘어가 모두가 현혹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강대한 국가임에도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영길리의 마음에 들고 비위를 맞추며 이들의 신용을 얻는 것이 첫 과제였다. 이후 모든 계략을 안에서부터 파악하여 허점을 찾고 무너트려야 한다. 양복점의 문을 두드리자 주인이 나와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조선에서 오신 왕자님께서 이 가게에 방문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가게는 아서 웰즐리 공작님의 옷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마침 잘 된 일이구려. 재료 가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가장 호화로운 정복(正服)을 포함하여 여러 벌의 옷을 맞추어 주시오. 가급적 빠르게 한 벌을 먼저 맞추어 주시구려.”
몸을 측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뼈를 깎아 만들어진 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을 보니 분변더미를 헤집던 아이들이 뼈를 찾아내고 주머니에 넣던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두 시진, 이제는 영길리를 속이기 위해 그들의 마음에 들기로 하였으니 시간이라 불러야 하리라. 네 시간 뒤에 완성될 옷을 기다리는 동안 갈 곳이 더 있었다.
이발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막 다른 손님의 수염을 다 깎은 이발사가 인사를 했다. 아바마마께 송구한 일이지만 내 머리 위에 있는 갓과 망건(網巾)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말하였다.
“참으로 난해한 일이겠지만 머리를 영길리의 신사들이 주로 다듬는 형상으로 만들어 주게. 또한 아바마마에게 보낼 머리카락을 남길 수 있도록 처음에는 깊숙이 깎아주게.”
“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깎으라니요?”
자신을 영길리의 문물을 뼛속까지 받아들여 마음이 넘어간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박현상은 침묵하였지만 박규수는 격렬히 반대하였다.
“세자저하! 아니 되옵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여 주상전하께서 내려주신 머리카락을 어찌하여 함부로 베어버린단 말이옵니까?”
“상투의 크기를 맞추기 위하여 숱을 치고 길이를 다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인가? 영길리의 사람들이 상투를 관리하기 힘든 것이라 하였으니 머리를 짧게 깎아볼 것일세.”
“세자저하의 뜻에 저 또한 동참할 것이옵나이다. 제가 세자저하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고 편안히 두발(頭髮)을 깎으시옵소서. 유생들에게는 제가 말해둘 것이옵니다.”
역시 박현상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고 걸어야 하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완수하는 마음부터 세상의 정세를 파악하고 자신의 뜻을 알아차리는 재주까지 가지고 있었다.
혼자서 머리를 깎으면 유생들이 질색할 것이라 생각하여 함께 머리를 깎자 하였으니 더더욱 좋은 일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박규수도 당당히 의자에 앉아 말하였다.
“저도 같이 깎아주시지요. 머리칼이 섞이지 않도록 따로 분별해야 함은 잊지 말아주십시오.”
“주문하신 대로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조선의 왕자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발사는 상투를 푼 다음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빗질하고 가위로 베어내었다. 이를 봉투에 고이 넣고 찰스 디킨스에게 건네주고 본격적으로 머리를 깎았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처음 느껴보는 시원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위를 놀리는 손길이 계속되고 마침내 머리를 면도날로 깎아내 결을 살리는 파트(part - 가르마) 작업이 남았다.
“파트는 얼마의 배율로 나누면 좋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신체도 훤칠하고 용모가 수려하시니 칠 대 삼 정도를 내어 가볍게 포마드를 바르면 적합할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내어 주시오. 상투가 사라졌으니 감을 잡을 수 없구려.”
비누로 머리를 감은 다음 얼굴을 확인하니 외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능숙한 손길로 머릿기름을 바르니 검은 머리칼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어엿한 영국 신사의 외모였다.
다음으로 박현상과 박규수가 머리를 깎았고 우리 셋 다 어엿한 영국 신사의 외모를 하게 되었다. 찰스 디킨스는 그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심(女心)은 물론이요 모든 사람들이 용모를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선의 왕자님께서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된 저의가 참으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자네도 머리가 좋으니 어느 정도 예상하지 않았소?”
“물론입니다. 사교계에 뛰어들고 정치에도 깊이 관여할 생각이 아니십니까.”
박현상이 재주 있는 사람을 등용할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찰스 디킨스도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였다. 이제 가장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 하니 그와 함께 나에게 배정된 저택으로 돌아갔다.
“세자저하! 대체 어찌 된 일이옵니까? 어찌하여 상투를 자르고 복식을 영길리의 사람들과 동일하게 하였는지 영문을 알 길이 없사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인사를 올리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벌렸다. 어차피 모두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 마땅하니 웃옷을 벗으며 말하였다.
“오늘 아주 좋은 경험을 하였네. 그러고 보니 요즘 논쟁이 구화주의(歐化主義 - 유럽 화를 추구함)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대립이 아니던가. 나는 이미 답을 찾았네.”
소스라치게 놀라 혼절하는 사람도 있었고 박현상의 멱살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뭐라 말을 해도 이미 깎아버린 머리를 되돌릴 사람은 없었으니 나는 사람들을 소집하여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우리 모두가 변화가 부족하고 진실을 알지 못 하여 눈이 뜨이지 않았다네. 앞으로 여기 있는 찰스 디킨스와 함께 영길리의 문물을 더 많이 확인하여 눈을 뜨게나.”
“아니 되옵나이다. 저하께서 영길리의 풍습을 받아들이시어 이 나라의 사람과 같게 변모하였으니 이는 지극히 잘못된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통촉하지 아니한 적이 없네. 영길리의 사람이 되어 영길리의 사람처럼 행동하고 이들의 수심을 알려 하는 의도일세. 그 수심이 어떤 수심인지 스스로 알면 되겠지.”
짐승의 마음을 뜻하는 수심(獸心)이나 우울함을 뜻하는 수심(愁心) 혹은 마음을 닦는 수심(修心)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었다. 짐승보다 못 한 참상을 보고 근심하여 마음을 닦으면 세 가지 수심을 동시에 할 수 있지 않은가.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유생들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아예 혼절하여 병원에 머무른 사람도 있었으며 간혹 발작을 일으켜 호위들에게 포박당해 억지로 끌려온 사람조차 있었다.
간혹 나처럼 머리를 깎고 서양의 복식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복장을 유지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방에 모여 하나의 뜻을 합쳤다.
“방법과 중점은 각기 따로 구분하여야 하지만 동도서기도 구화주의도 모두 잘못된 일이옵니다. 서역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면 지독한 일이 벌어질 것이옵니다.”
“신 또한 같은 마음이옵니다. 뒤처지면 짓뭉개질 것이니 변혁은 일어나야 하지만 이를 가급적 많은 백성을 품으며 진행함이 마땅하옵니다.”
“적어도 백성이 스스로의 끼니를 유지하고 머나먼 훗날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을 영위함이 마땅하옵나이다. 이를 위한 여러 대책이 수반되어야 하옵니다.”
영길리에서는 우리의 변화를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외모가 변하면 마음도 변하기 마음이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넘어왔다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
옥석을 가려 영길리의 좋은 문물을 받아들이고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 나가리라. 오늘도 연회장에서 나에게 잔을 내미는 귀족의 인사를 받으며 대화를 시작하였다.
“조선의 속담에는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었는데 정말 날개나 다름이 없군요. 저 필리어스 포그(Fhileas Pogg)가 말씀을 드리는데 제가 원숭이처럼 보일 정도로 돋보이십니다.”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무슨 말씀이시오. 그나저나 포그 경은 재건(regeneration)클럽의 회원이자 주식의 달인이라 하였지. 이에 대해 소개해줄 수 있겠소?”
잔을 마주치며 지금쯤 조선에 도착했을 내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생각하여 보니 아무리 아바마마에게 문안을 위하여 편지를 보내도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잘못하면 중병(重病)에 걸린 사람이 변사하기 전 무덤을 대신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잘라 보냈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아바마마께서 지나치게 놀라시면 아니 될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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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양력으로는 해가 바뀐 1833년 1월 무렵 조선에 전달된 그의 머리카락과 문안 편지는 순조를 비롯한 왕실 사람들을 격동하게 만들었다.
“세자가 어찌하여 자신의 상투를 잘랐단 말인가! 서신에 의하면 큰 문제는 없고 뜻을 가다듬었다 하였는데 이는 중병을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오나 외양을 묘사한 회화에서는 그러한 기색이 보이지 않사옵니다.”
“정약용을 부르도록 하라! 혹여나 병환을 숨기고 있는지 필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더냐!”
오매불망 자식에 대한 걱정을 하던 순조는 조만영을 탓하고 정약용에게 병의 징후가 보이는지 물어보며 용상(龍床)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거렸다. 마침내 정약용이 답하였다.
“비록 회화이지만 병의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사옵니다. 신이 박현상에게 받은 서신에서도 그러한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하였으니 부디 근심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하면 잘 된 일이네만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군. 영길리의 술책을 알아내기 위해 세자가 비위를 맞추다니. 영길리의 국력이 청나라를 능가할 정도로 강하다는 말인가.”
전해온 서신으로 듣기는 하였지만 그토록 강대한 나라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순조였다. 마음을 가다듬은 순조는 효명세자가 보낸 서신을 읽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영길리를 넘어서서 이 나라가 오롯이 주체(主體)를 유지할 길을 찾으려면 방도가 없다 하였는가. 그러하면 영길리는 분명 청나라보다 강한 나라이로군.”
“이미 도성의 백성들이 영길리의 물건을 항구에서 사들이기 위하여 황해도를 오가기에 이르렀사옵니다. 비록 거리가 멀어 다행이오나 이를 그대로 두시면 아니 되옵니다.”
“자네야 호조판서로 재직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수익을 거두는 것을 원하고 있겠지. 도성에서 날품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금의 이득을 거두는 것은 뭐라 하지 말게나.”
조만영이 지적당한 대로 변화는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동해와 남해에서 활약하는 포경선은 수많은 왜구를 – 실제로는 일본 포경선을 – 해치우고 고래의 부산물을 거둬들였다.
경상도 해안에서는 이미 장정들이 영길리의 배를 타면 몇 년을 먹고 살 수 있다고 자원하기에 이르렀다. 도성의 빈민들은 시전 상인들에게 고용되어 황해도를 오가며 제한적으로 판매되는 영국산 모직물을 구해왔다.
청나라에서 들여오던 각종 문물들은 물론이요 인도에서 들여오는 향신료는 식생활에 이바지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대가는 홍삼이었다.
“이 풍파를 해쳐나가려면 세자가 돌아와 대리청정을 수행해야 할 것인데. 하필 내년까지 구주(유럽)에서 머무르겠다고 하였으니 난감한 일이로군.”
“얼마 전에는 영길리에서 군사고문(軍事顧問)을 파견하기로 정하였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년이라는 시간도 짧을 것이옵나이다.”
이 년으로 연장된 효명세자의 유럽 사절단이었지만 순조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정약용이 어의로 있으며 자신의 속병을 다스리고 쇠약하던 자신의 딸들도 기력을 되찾았다.
다만 순조는 오랫동안 정무에 손을 놓고 있었기에 섬세한 일을 통제하는 것이 부족했다.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와 얼마 전 정계에 복귀한 김유근을 비롯한 안동 김씨도 이런 허점을 모두 막아내지 못 하였다.
“주상전하께 아뢰옵나이다. 의주에 청나라의 사신이 당도하였는데 홍삼을 영길리의 상인에게 헛되이 매매하였다 하여 이에 대해 논하자 하였사옵니다.”
방금 전 도착한 전령이 전한 소식에 순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홍삼은 정규 판매 물량 오천 근을 제외하고 모두 동인도회사 상인에게 팔아치우고 있었다.
처음 일 년 정도는 흉년이나 담합으로 인한 판매 금지라 생각한 청나라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밀매될 홍삼을 판매하려는 북경의 상인들과 중국 각지의 중계상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엉망진창인 청나라의 내부 사정에도 사신을 보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리라.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한 순조는 조만영을 바라보았지만 조만영은 오히려 순조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호조는 오로지 동인도회사와의 교역에 관여하고 있었사옵니다. 청나라에 보내는 홍삼에 관한 일은 예조가 할 일이라 생각하고 딱히 관여치 아니하였사옵니다.”
“나는 자네가 관리할 줄 알고 생각을 아니하고 있었는데. 생각하여 보니 이지연이 자리를 비웠으니 예조판서 자리가 공석이었지!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본래 뇌물을 먹이고 각종 물산을 보내 눈을 가리려 하였지만 서로의 손발이 맞지 않았다. 시시각각 당도하는 청나라 사신을 대응할 방법을 찾던 순조는 효명세자의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