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40편
(4장 - 거짓)
조선의 이전 상국(上國)인 명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청나라가 되고 나서 사신의 방문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1831년에 음력 5월에 방문하였던 칙사도 며칠정도만 한양에 머무르고 돌아갔다. 운이 좋게도 휴 린지를 만나지도 못 하였고 천여 명이 유생이 집결한 지부상소도 보지 못 하였다.
반면 이번 사신은 달랐다. 그들은 도광제의 칙서(勅使)를 들고 의주부터 조선을 샅샅이 살피며 정탐하였다. 그만큼 상인들의 원성이 드높았다는 말이었다.
“정식으로 판매하는 홍삼 물량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밀매 물량을 영길리에 판매하다니? 조선 놈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심한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군.”
사신으로 배정된 사람도 직예(直隸)총독, 경기도 권역을 다스리는 총독인 보르지기트 키샨이 담당하였다.
청나라의 권력의 핵심부가 움직였으니 수많은 인원이 움직였다. 이들은 주변을 멋대로 정탐하고 오더니 이상한 보고를 시작하였다.
“황해도 일대를 정탐하였는데 기이하게도 빈민들이 여럿 해안가에 운집하여 움막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나도 모르니 조선 왕에게 물어보는 것이 마땅하다. 감히 영길리와 교역을 실시하여 막대한 인삼을 팔아치우니 단단히 따져야 하지 않겠느냐.”
보르지키트 키샨의 짜증은 태도에서 드러났다. 대접이 시원치 않으면 폭언을 일삼고 가끔 애꿎은 사람을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이런 청나라 사신을 보며 유생들이 혀를 차댔다.
그들은 조만영을 비롯하여 청나라 광주에 다녀온 유생들이 집필한 서적을 다시 살펴보더니 혀를 차며 평가하였다.
“이런 놈들을 상국으로 모시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군. 놈들이 천명(天命)을 집어삼키고 세월이 흐르자 오랑캐 시절의 옛 풍습을 되살린 꼴이 아닌가.”
“내 말이 그 말일세. 저들이 무슨 짓을 하건 우리는 이 조선을 위하여 논해야 할 것이네. 세자저하께서 영길리로 가서 학문을 배우는 일은 우리 모두가 모르고 있는 걸세.”
점점 부정적인 면모만 보여주던 청나라 사신들이 마침내 한양으로 들어왔다. 평상시와 같은 융숭한 대접을 하였지만 이 년 전에 한양에 다녀온 사람은 변화를 감지하였다.
“우리를 환대해야 하는 백성들이 줄어들고 어딘가 병에 걸린 듯이 힘이 없군요.”
“유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도 사신이니 접대를 함이 마땅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서 머무르게 된 청나라 사신들은 효명세자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종친인 남연군(南延君)이 도착하였다.
“세자가 아닌 종친이 어찌하여 방문하였는지 궁금하군. 대체 무슨 일이 있는가?”
“세자저하께서 널리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원자(元子)께서는 아직 관례도 올리시지 아니하시어 제가 이 자리에 당도하였습니다.”
점점 이상한 조짐이 느껴졌지만 보르지기트 키샨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순조가 살아있을 것이며 그에게 직접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이 답이었다.
이들이 며칠이 지나고 순조를 접견하게 되었다. 사소한 인사가 끝난 보르지기트 키샨은 대놓고 순조에게 따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다이칭 구룬의 번국인 조선은 모든 대소사에 관하여 논하고 허가를 받음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조선에서 멋대로 영길리와의 교역을 실시하여 귀한 인삼을 판매하였으니 무슨 꿍꿍이입니까? 병자년의 참극을 다시 겪고 싶으십니까?”
“참극이라 하니 과인이 얼굴을 들길이 없어서 막막하기 이를 데 없군. 이미 이 도성에 참극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 년 전에 세자가 변고를 당하였네.”
모욕에 가까운 언사에도 울먹거리던 순조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고 대소신료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순조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비단으로 감싼 머리카락과 효명세자의 상투를 장식한 비녀였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할 흉험한 일이 벌어졌으니 어찌 하면 좋겠나. 도성에는 정체불명의 괴질(怪疾)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내 부덕함으로 인하여 많은 백성은 물론 세자조차 병에 걸렸네.”
“세자가 중병에 걸렸다 하셨습니까? 그럼 지금 목숨이······.”
“이 나라의 의원들 모두가 병을 고치지 못 하였네. 병에 걸리고 한 달 내내 구토하며 섭생조차 하지 못 하다가 효험을 본 의원이 있었으니 영길리의 선박에서 보내온 의원이라네.”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낀 보르지기트 키샨은 근질거리는 목덜미를 긁으며 순조를 보았다. 괴질이 자신에게도 퍼지지 않았을까 염려하였는데 순조의 말이 이어졌다.
“병을 억눌렀지만 고치려면 영길리에 방문하여 진료를 받아야 한다 말하였네. 그리하여 애끓는 마음으로 영길리에 병을 치유하러 보냈지. 혹여나 객사(客死)를 염려하여 남긴 물건이네.”
“그럼 이 괴질이 어떠한 증상인지 알고 싶습니다. 혹여나 사소한 병을 거짓으로 논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증상이야 지금 혜민서에서 병에 걸린 백성들을 모아둔 어의 정약용을 만나면 알 것이네. 이들은 괴질을 떨치지 못 한 세자를 영길리에 가두어두고 막대한 치료비를 요구하고 있다네.”
영국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특한 행동을 벌이는 족속임을 청나라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졸지에 코가 꿰인 신세가 된 순조는 푸념하듯이 말하였다.
“세자의 치료비용과 이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의 비용을 합쳐 한 해 은자 십만 냥을 요구하니 인삼을 털어 바치게 되었네. 모두 과인의 잘못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실인 것 같았다. 효명세자가 상투에 꿰던 비녀가 확실하니 거짓은 아니리라. 의심을 가지고 유생을 상대로 탐문하여도 아예 모르거나 거의 같은 대답을 하였다.
다음 날 혜민서에 방문하게 된 보르지기트 키샨은 손에 장갑을 끼고 복면을 두른 정약용을 만났다. 그는 깊게 인사를 올리더니 청나라 사람들에게도 이를 착용하게 하고 말하였다.
“괴질은 어디서 어떻게 옮겨지는지 저도 알 길이 없는 끔찍한 병입니다. 한 달 정도 섭생을 하지 못 하다가 심한 구토와 함께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기껏해야 호열자(콜레라)나 염병(장티푸스) 같은 병이 아닌가? 저건 뭐야!”
두 시간 전에 미리 구충제를 먹여둔 백성들은 사지를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끔찍한 물건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보르지기트 키샨은 이를 보자마자 뒤로 자빠져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저게 뭐야! 뭐냐고!”
“저것이 괴질의 정체입니다. 저렇게 구토를 하고 몸이 온전히 치유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지가 늘어져 기력을 쇠하고 한 달이 지나면 다시 구토를 합니다.”
백성들의 입에서 흉측한 물건이 계속 튀어나왔다. 혜민서에서 당장이라도 도주하고 싶어진 청나라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는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어서 피하······. 우읍! 우우에에에에엑!”
어의인 정약용의 입에서도 끔찍한 흉물들이 토해져 나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정약용이 의식을 잃고 혼절한 척을 하자 보르지기트 키샨은 아예 혜민서의 문을 박살내고 도주하였다.
그날 저녁. 순조는 뒤늦게라도 뇌물로 삼을 홍삼을 보냈고 사신들은 이를 받아들자 마자 청나라로 도주하였다.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청나라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을 끊을 끔찍한 소문이 청나라 황실에까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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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박람회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니 조일준도 점차 바쁘게 움직였다. 박람회에서 자랑할 문물에 대한 안전 점검을 도맡아 하였으니 여러 수정사항을 말하였다.
“드라이아이스의 제조에 필요한 압축 이산화탄소 용기가 주철로 되어 있으니 이를 청동이나 연철 재질로 교체하시지요. 파열하면 사람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만. 아무튼 닐슨 조의 안전수칙은 누구라도 믿을 수 있으니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조일준은 박람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를 적극적으로 응용하려 하였다.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한 폭약은 군인 출신이면 몰라도 평범한 귀족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니 프랑스에서 발명한 수많은 문물을 활용할 방법을 찾고 이를 개선하고 응용하였다. 이를 위하여 조수들이 대거 투입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루시! 그루시는 대체 어디에 있지!”
“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인조 상아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티아스 그루시는 얼떨결에 조일준의 조수이자 연구생이 되었다. 그는 얼마 전 개발한 셀룰로이드 당구공의 표면을 깎아내고 있었다.
그를 찾을 때마다 보이지 않고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와 당황스럽게 하였지만 할아버지와 달리 일은 똑바로 하였다. 조일준은 당구공을 확인하고는 말하였다.
“셀룰로이드는 끓는 물 수준의 온도에도 발화하니 조심스럽게 다루도록. 라파움(탁구의 원형)용 셀룰로이드 공은 준비해 두었나?”
“발화가 일어나 새로 만들 예정입니다. 얼음물에 담가서 가공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안전수칙 준수하라고 몇 번이나 말 했어! 다시 복창하도록!”
조일준은 무질서한 과학자들의 태도를 뜯어고치는데 사력을 다하였다. 안전수칙은 물론이요 기본기부터 익히라는 그의 태도에 많은 이들이 반박하였지만 그런 사람을 내쫓으며 자신의 태도를 고수했다.
어느덧 종이 울리고 오늘의 할 일도 끝났다. 평소대로라면 사람들을 모아 권투를 가르쳐야 하지만 조일준이 갈 곳이 있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오르자 오늘 함께 일한 둘이 탑승하여 조바심을 감추며 말하였다.
“제가 로시니경의 미식을 체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닐슨 조께서 저와 협업을 하는 날에 일정을 잡으셨으니 평생 닐슨 조를 응원할 겁니다.”
쉬는 날도 별로 없이 일정으로 가득한 조일준은 가까스로 로시니와의 식사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오페라 작가이자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양에서 미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출생하고 프랑스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미식가로서의 명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기대감에 가득하였지만 조일준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자신의 초대를 받은 조일준이 도착하자 로시니는 입구에서부터 안내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의 미식의 결정체가 식탁위에 놓였다.
“제가 젊은 시절 오페라를 초연하였던 베네치아 지방의 비노 프리잔테(vino frizzante - 스파클링 와인)과 딸기를 섞은 식전주입니다.”
“영롱한 붉은 빛이 아름답기 그지없군요. 식전주로 안성맞춤입니다.”
로시니는 자신의 메뉴를 먹고 생각에 잠겨 다시 포크를 움직이는 조일준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머나먼 동양의 사람이 자신과 미각이 일치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 조일준의 미각에는 호화로운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그저 맛이 좋은 식사였다. 그래도 정성이 있으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간혹 푸아그라나 송로버섯이 들어간 음식을 대접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전에 먹은 푸아그라는 버터 덩어리나 마찬가지고 송로버섯은 쉬어빠진 녀석이군요.”
“닐슨 조가 먹은 기존의 푸아그라는 테린(고기를 섞은 물건)이고 이것은 생 푸아그라니까요. 송로버섯은 고향 이탈리아의 주먹 크기의 녀석을 마차로 배송하였습니다.”
고기 요리로 안심 스테이크 위에 구운 푸아그라와 송로버섯을 아낌없이 뿌린 투르네도 로시니(Tournedos alla Rossini)가 나왔다. 조일준은 이를 한 입 베어물고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꺼운 안심이 부드럽게 씹히니 소를 기른 사람들의 정성을 알 수 있겠군요. 조금 전에 나온 칠면조 요리도 대단하던데 이는 훨씬 좋은 맛입니다.”
“이렇게 칭찬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제 미식이 조선 사람들에게 통할 것 같습니까? 다른 사절단 일행도 초대하면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선은 사치를 줄이고 검약을 표방하니 잘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 눈을 낮추시는 것이 바람직한 일 같군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자신과 박현상을 제외하면 이런 느끼한 맛을 견딜 사람이 없으리라. 디저트로 마스카포네 치즈와 아이스크림이 섞인 물건이 나오자 로시니는 한 숟갈 먹고 말하였다.
“닐슨 조가 보기에는 어떠한 메뉴를 고쳐야 할 것 같습니까? 미식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어떠한 배움이라도 추구해야 하지요. 그러하니 의견을 경청하겠습니다.”
“스프의 맛이 부족합니다. 잘 만든 것 같지만 미식까지는 아닌 것 같군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닭 여덟 마리와 어린 송아지의 뼈를 이틀 동안 끓여서 계란 흰자로 누린내를 걷어냈습니다! 여기에 푸아그라와 정제 버터로 맛을 더하였는데요!”
주방장은 물론이고 함께 식사 대접을 받은 마티아스 그루시와 아드리앙 틸로리에도 조일준을 노려보았다. 로시니의 스프는 독창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누가 흠을 잡을 맛은 아니었다.
“이런 평가를 들으니 견딜 수 없군요. 혹시나 닐슨 조에게 들어간 스프에 다른 물건이 섞였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스프를 내올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시 스프가 나오고 모두가 한 수저씩 먹고 눈을 감고 평가하였다. 이전과 다르지 않은 스프의 맛을 다시 감상한 조일준은 계획대로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고 말하였다.
“스프에 이 녀석을 조금만 넣고 다시 드셔보시지요. 제가 조선에서부터 만들어 여태 보관하고 있던 조미료입니다.”
“조금이라 하였는데 귀이개로 한 숟갈을 넣는군요. 기껏해야 일 그램 정도 아닙니까?”
모두가 글루탐산나트륨 분말을 스프에 뿌리고 휘저었다. 고작 조미료로 맛이 달라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스프를 한 수저 먹더니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맛이 훨씬 좋아졌군요. 입 안에서 스테이크의 육즙을 머금은 것 같이 좋은 맛(savory)이 넘쳐납니다. 고작 조미료 일 그램으로 이런 변화가 일어나다니.”
“요리사 생활을 삼십 년이나 하였지만 이런 일은 처음 봅니다. 대체 무슨 조미료입니까?”
모두가 귀신에게 홀린 듯 스프를 게걸스럽게 비워버렸다. 난생 처음 느낀 순수 글루탐산나트륨의 짜릿한 감칠맛은 이들 모두의 미각을 사로잡았다.
감칠맛에는 네 종류가 있다. 다시마와 각종 채소 그리고 일부 유제품에서 나오는 글루탐산나트륨, 고기에서 나온 이노신산, 갑각류와 연체동물에서 나오는 아데닐산 그리고 균류에서 나오는 구아닐산이다.
기존 스프의 감칠맛은 육류의 이노신산이 전부였다. 여기에 조일준이 첨가한 순수 글루탐산나트륨은 몇 배나 강렬한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동방의 신비도 아닌 과학으로 만들어낸 조미료입니다.”
조일준이 당당하게 말했지만 로시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프를 한 수저씩 음미하며 맛의 근본을 찾았다. 그러더니 한참을 고민하다 눈물을 한 줄기 흘리며 말하였다.
“이 맛은 말린 토마토를 한주먹 갈아 넣거나 경질 치즈를 한줌 갈아 넣은 맛에 가깝습니다. 다만 아무런 잡맛이 느껴지지 않고 순수한 맛이 느껴집니다.”
“말린 토마토나 경질 치즈라 하셨습니까?”
오히려 조일준이 로시니의 미각에 감탄하였다. 글루탐산나트륨은 다시마를 비롯한 해초에도 많지만 토마토나 파마산 치즈를 비롯한 경질 치즈에도 제법 많이 있다.
아마 로시니의 미식가적 기질은 그의 천재적인 미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로시니는 체면도 잊고 조일준의 양 손을 잡고 흥분해서 말하였다.
“대체 어떠한 조미료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격이 홍삼에 준한다 하더라도 저 로시니는 반드시 사들여서 이 조미료를 두고두고 사용하겠습니다.”
“다시마라는 해초를 푹 끓이고 계속 정제하여 만드는데 원가가 홍삼의 세 배 정도 합니다.”
원가가 세 배이지 운송료와 중간 마진을 합치면 가격이 홍삼의 열 배로 폭증할 것이 분명했다. 이와 비교하면 사프란이나 송로버섯조차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값싼 물건이다.
지나치게 비싼 가격에 이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로시니를 바라보던 조일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로시니가 가장 원하던 말을 하였다.
“얼마 전 실험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시마를 다른 방법으로 가공하여 추출하면 원가를 이십분의 일 이하로 절감시킬 수 있지요.”
끓여서 추출하는 글루탐산나트륨의 양은 극도로 적지만 다시마를 염산으로 분해하여 추출하면 50배 이상을 추출할 수 있었다 이를 환원시키기 위해 수산화나트륨을 얻는 방법이 문제였다.
대량생산에는 전기분해를 위한 발전기가 필요하였다. 제대로 된 발전기가 생기면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을 생각하던 조일준에게 로시니가 달라붙어 간청하였다.
“다른 방법으로 가공하다니요! 그 방법을 제발 알려주시지요.”
“새로 개발할 방법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 투자자를 로시니경이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십 년 동안 독점 판매는 물론이며 이후 제조법을 공개해 드릴 겁니다.”
당장 모든 재산을 투자하고 싶은 로시니였지만 여러 변수가 많았다. 아무리 대단한 닐슨 조라 하여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고 다른 사람이 조미료를 개발할지도 몰랐다.
모든 재산을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로시니가 주저하였으나 조일준은 당당하게 말하였다.
“계약서를 당장 작성하시지요. 앞으로 십 년 이내에 조미료의 원가를 최소 이십분의 일인 일 킬로그램 당 은자 스물다섯 냥으로 절감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담보는 무엇으로 하실 작정이십니까? 투자금은 얼마나 받으시려는지요.”
“투자금은 오십만 프랑 이상이면 되겠군요. 만약 이번 일에 실패하면 저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최소 십 년 이상 머무를 것입니다. 제 자신이 담보입니다.”
프랑스 정재계에 암암리에 퍼진 명령이 있었다. 어떻게든 조일준과 연줄을 만들고 그를 프랑스에 망명시키라는 말이었다. 이 제안을 조일준에게 받은 로시니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공증인을 불러 계약서를 작성하고 즉석에서 투자자를 유치하겠습니다.”
성공만 하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할 기회가 생겼다. 이 위대한 조미료를 독점으로 유통하고 나중에 제조법까지 받아내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리라.
실패하면 젊은 천재가 십 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떻게 되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리라 생각한 사람들은 연판장(連判狀)을 작성하였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였다.
“나 또한 오를레앙 가문을 대표하여 삼만 프랑을 투자할 것이네. 닐슨 조가 부디 성공하기를 기원할 것이네. 실패하여도 타박하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로시니의 소문을 듣고 글루탐산나트륨을 맛본 귀족들이 투자자금을 칠십만 프랑이나 모아버렸다. 이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쓸지는 조일준이 잘 알고 있었다.
“발전소를 세우고 알루미늄부터 뽑아내야지 왜 글루탐산나트륨 따위를 먼저 만들어. 대량 양산은 구 년 차에 시작하면 되니까 느긋하게 사들일 물건과 만들 물건이나 정해볼까.”
영국에서 열리는 국제 박람회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빙정석(氷晶石)을 구매하기로 결정한 조일준은 조선으로 돌아가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 방대한 목록에는 향후 20년간의 기술 발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