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 62편
(7장 - 꿈)
어느덧 해가 지나 1837년이 되었다. 일본과의 무역 조율과 이미 조선을 혈맹으로 생각하는 프랑스의 지원과 관련된 업무를 하니 잠시 짬이 생겨났다.
마침 각지를 돌아다니며 산 아래로 내려온 화전민에 대한 치료 및 새로운 의약품 실험을 하던 정약용도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준이와 같이 정약용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는데 녀석은 사람을 보내 서신을 전해주었다.
[에이다가 급하게 나를 보자고하네. 딸이 나를 찾는다 하던데 조금 늦게 갈 것 같아.]
서신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일준이는 어느 새 아빠가 되었으며 아이는 두 달 전인 1836년 11월에 태어났다. 두 달 된 아이를 달랠 일준이를 보니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남 구해주려다가 코가 꿰어서 애까지 낳았구나. 여기서 더 나아가 공처가가 되어버렸네.”
아직 항생제도 없는 시대이니 아직 아이를 만나지는 않았다. 듣자하니 첫 아이는 일준이의 피보다 에이다의 피를 많이 물려받았는지 코가 오뚝한 여자아이를 낳았다더라.
에이다의 성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바이런을 유지하였다. 당연히 아이의 성은 일준이를 이어받아 조라 정했고 이름은 유나로 지었다.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머니가 대단한 사람이니 훗날 두각을 드러내지 않을까. 오랜만에 정약용의 집으로 찾아가니 이미 정약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하여서 불민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산 선생님은 제 대부나 마찬가지이신 분인데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요즘 기력이 살아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같으니 염려하지 말게.”
정약용은 그 동안 어의로서 활동하고 수많은 곳을 활보하였지만 오히려 젊어진 것 같았다. 이 시대의 75세 노인이면 죽을 날을 기다리겠지만 아직 허리가 꼿꼿하였다.
그래도 나이를 속일 수 없었는지 지팡이에 의지하기는 하였지만. 정약용은 방 안으로 들어가 안경에 서린 김을 닦아내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야 죽기 전에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서역에서도 내 명성이 떨쳐졌으니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당연하네.”
“제가 보기에는 십 년은 더 사실 분 같은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네와 함께 한 시간이 제법 길다 보니 표정 정도는 알 수 있네. 천기가 바뀌지 않았다면 내가 이미 죽어 없어질 사람이었던 것 같군.”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은 본래 1836년 초에 사망했을 사람이다. 본래 역사에서는 시골에서 편안하게 삶을 이어가다 기력이 쇠하여 죽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의원 어의로서의 의무는 물론이요 온 힘을 다 하여 연구와 저술을 실시하니 그 열정으로 기력이 돌아온 것이다. 정약용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하였다.
“풍고(김조순의 호) 그 친구가 온 힘을 다 하여 나라를 고치려다 명을 달리하였지. 내가 풍고보다 부족한 점은 많지만 그 정도는 해야 혼백이 되어 부끄러운 일을 겪지 않을 것 같군.”
“이미 많은 것을 고쳐내지 않았습니까? 세자저하의 환후는 물론이요 공주님들의 안위 그리고 주상전하의 환후까지 손을 보셨지요.”
“어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지. 그러나 서역의 의술을 접하고 부족한 점을 느꼈다네. 아직 발전할 길이 많은 의술에 만족할 수 없지 않은가.”
자리에서 일어난 정약용은 옆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한 한약 냄새가 풍겼는데 놀랍게도 일준이가 개발한 실험 기구들이 즐비한 방이 있었다.
“이 물건들은 무엇입니까? 실험 기구들도 있는데다 저건 차를 우릴 때 쓰는 사이펀(Siphon)이 아닙니까? 이 물건들로 의술을 연구하고 계셨습니까?”
“내 능력이 부족한데 의술을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이 나라에서 쓰이는 약재를 명확히 아는 것을 시작으로 약재의 성분에 대한 분석을 하는 중이네.”
가만히 보니 보통 물건들이 아니었다. 얼마 전 개발된 물건인 압력솥도 있었다. 방 바깥에 둔 다른 솥에는 뚜껑이 두껍게 덮여 있었는데 위에는 바이메탈 온도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유리로 만든 찜통은 수증기를 뿜어 약재에서 목표 성분을 추출하는 물건이리라. 여기에 약재가 우러난 물에 길쭉한 한지를 늘어트린 물건도 있었다. 정약용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모든 약재는 과하면 독이 되고 잘못 사용하여도 독이 된다네. 그러나 정해둔 성분만 뽑아내어 이를 정확하게 배분하면 처방에 실패가 있겠는가?”
“모든 약재를 마구잡이로 섞어 응축하면 사약이 된다는 말을 들었지요.”
“바로 보았네. 약재 각각의 성분을 뽑아내 유효한 물질만 응축하여 처방을 내리는 것을 연구하고 있지. 이를 계속 연구하다 보면 누구나 편안히 약을 먹을 수 있을 걸세.”
이런 방식으로 한약재를 다루면 현대 의술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격이다. 현대에 널리 쓰이는 약도 한방성분이 들어가지만 처방전이 필요한 의약품에 생약을 그대로 넣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내가 과학이나 의학은 잘 모르지만 생약은 품질이 제각각이라 일정한 약효를 보장하기도 힘들고 아편 같은 마약류를 제외하면 약효가 나타나는 속도도 느리다.
그래도 설명이 필요하였는데 일준이가 뒤늦게 방문하였다. 녀석은 금속이나 유리로 만든 실험기구를 한아름 가져와서 연구실의 빈 공간에 배치하면서 말했다.
“표정을 보니 처음 연구실에 와서 놀란 것 같은데. 너도 할 일이 많아서 여유가 없었나보네.”
“너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매번 다산 선생님의 연구실에 방문한 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냐. 다산 선생님을 내 스승이라고 공언한 덕분에 서로의 연구를 돕게 되었어. 새로운 실험기구의 절반은 다산 선생님이 창안한 물건이라 소개했지.”
정약용은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멋쩍게 웃으며 일준이를 바라보았다. 실험기구를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이걸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정약용의 재능이 뛰어난 덕분이다.
아무리 좋은 기구를 줘도 보통 사람들은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 하고 어설프게 주물럭거리다 성과를 거두지 못 하리라. 실험기구의 설치를 마친 일준이는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하였다.
“이 물건은 틸레 관이라 합니다. 공식 명칭은 열수 관이라 하여 다산 선생님의 호 가운데 하나를 적용하였지요. 물이나 기름을 교반시키지 않아도 전체가 가열되는 물건이지요.”
“기름에서 추출하는 약재를 확인하기에 좋은 물건이로군. 그나저나 자네가 개발한 물건인데 내 이름을 사용해도 되던가?”
“저 혼자서 이 많은 물건을 창안하였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좋은 일이니 마르고 닳도록 사용해 주십시오. 또한 이 물건은 새로운 유리로 만들었습니다.”
일준이는 시험관 두 개를 들고 세게 충돌시켰는데 캉 하는 쇳소리가 나면서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 수많은 실험기구를 다룬 정약용은 시험관을 매만지고 살펴보더니 말하였다.
“충격에도 강하지만 굴절률이 다른 유리로군.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였는가?”
“프랑스에서 연구비를 더 많이 지원해서 붕산과 규산을 혼합한 유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만들기도 어렵고 단가도 높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실험에 쓸 만한 유리지요.”
“이 유리로 안경을 만들면 굴절률이 높아서 훨씬 좋을 것 같네만······. 좋은 물건이니 잘 쓰도록 하겠네. 그나저나 얼마 전에 새로운 약을 하나 찾아낸 것 같다네.”
정약용은 찬장에서 샬레를 꺼냈는데 갈색과 녹색이 섞인 가루가 있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아세톤 냄새를 맡은 일준이는 정체를 알고 물어보았다.
“에테르(Ether)로 약재 성분을 추출하셨군요. 무슨 약재를 추출하셨습니까?”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의 처방 가운데 청호(菁蒿 - 개똥쑥)로 학질을 치료한다는 처방이 있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네가 준 용매로 저온에서 침출하여 보았네.”
“이거 아르테미니신이지 않습니까? 알고는 있었는데 약재를 찾을 시간이 부족해서 실험으로 추출하지 못 하던 약이었습니다. 다산 선생님께서 먼 훗날 쓰이는 약을 찾아내셨군요.”
아르테미니신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약이었다. 1,800년 전의 의서에서 나온 처방을 현대 의학으로 재현한 약이고 말라리아 표준 처방이 되었으며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약이다.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겠지만 현대 표준 처방은 이 시대에는 신의 축복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말라리아에 시달리는 유럽에서는 이 약재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겠지.
홍삼의 뒤를 잇는 동방의 신비가 될 것 같은 약재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약을 개발한 정약용은 대수롭지 않게 샬레의 뚜껑을 덮고는 흥분을 감추며 덤덤하게 말했다.
“옛 습속을 되살리려 하였는데 운이 아주 좋았군. 이 약의 값은 홍삼과 견줄 정도로 비싸겠지만 기존에 사용하는 금계랍(金鷄蠟 - 키니네)과 섞어서 사용하면 더 좋을 것 같네.”
“이는 세기의 발견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생산체계를 그랑제콜에 설치하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말년에 성과를 거두었으니 그간 유배를 당하며 생긴 체증(滯症)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군. 얼마 전에 좋은 차가 들어왔으니 같이 한 잔 하세나.”
정약용은 조선에서 쓰이는 찻주전자가 아닌 사이펀을 들고 왔다. 위에 찻잎을 넣고 아래에 물을 넣은 다음 알코올램프에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현대에도 간혹 사이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지만 차를 이런 방식으로 마시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아래의 물이 끓어오르고 위로 넘어가서 찻잎이 물속에서 계속 요동쳤다.
정약용은 실험기구를 다루던 솜씨로 가열을 마쳤고 물이 아래로 내려오며 순수한 향을 담은 차가 추출되었다. 차의 정체는 녹차가 아닌 진한 갈색에 가까운 홍차였다.
“내 벗인 초의선사가 만든 홍차라네. 서역의 사람들은 이 홍차를 대동홍차라 부르며 새로운 맛을 창안하였다 하더군. 물론 초의선사는 만족하지 않고 짜증을 내면서 만들어 내더군.”
“맛이 아주 훌륭하군요. 서양의 입맛에는 훌륭하다는 뜻이지 이 나라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겁니다. 찻잎의 맛이 너무 강하지 않습니까.”
“에이다는 좋아할 맛이로군요. 영국사람 아니랄까봐 아이가 태어난 이후 매일같이 홍차를 찾는데 이 홍차를 좀 가져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처가 영길리 사람이었지. 아이는 잘 출산하였다 하니 다행일세.”
덕담이 오간 다음 정약용은 말을 하지 않고 나와 일준이를 한참동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먼저 일준이를 보면서 물어보았다.
“자네는 지식이 많고 훗날 재주가 드러날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지. 내가 보기에는 이들을 마음대로 부려 더욱 많은 성과로 만들 수 있지만 그러지 아니하는 것 같다네.”
“그야 남의 지식과 업적을 도둑질한 것이 아닙니까. 꼭 필요한 물건이야 제가 스스로 만들었다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물건은 본래 만들어야 할 사람의 성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일준이는 세기의 천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현대인으로서 익혀둔 답안지를 가지고 있으니 이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더욱 빠르게 키우고 필요한 학문을 발전시키려 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더 나은 물건을 만들 것이니 훗날 벌어질 일을 기대할 뿐이지요.”
“자네 생각이니 뭐라 하지는 않겠네. 마치 농부와 같은 마음인 것 같군.”
“그렇습니다. 훗날 크게 자랄 나무를 기름진 땅에 옮겨 심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과정에서 이득도 얻어낼 수 있지만 이 세상이 얼마나 발전할지가 궁금합니다.”
일준이는 과학자로서 미래를 보고 싶어 하였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라면 몰라도 나머지는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고 위인들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이는 위인에 대한 존경이며 그들의 발명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는 태도였다. 정약용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질문을 시작하였다.
“그러하면 박현상 자네는 무슨 뜻을 품고 있는가? 보아하니 이 나라를 변혁시킨 다음에 내가 살아있을 것 같지 않으니 속내를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제 꿈은 나라가 떳떳하게 독립을 유지하며 강대한 힘을 가져 옛 강역을 되찾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이네만 부국강병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군. 아마도 원하는 바는 따로 있을 것일세.”
효명세자도 내 뜻에 대해 부국강병이라 생각하였지만 정약용은 내 행동을 보며 이것보다 더 나아간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20년은 걸려야 달성할 수 있으니 효명세자 앞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일준이와 정약용 앞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제가 원하는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며 손에 꼽을 정도로 부강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부유함은 백성까지 풍족한 삶을 누려야 하며 힘은 다른 나라가 겁에 질릴 정도여야 합니다. 여기에 문화의 힘이 필요합니다.”
“영길리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다른 나라를 짓뭉개지 않고서는 이룩하기 힘든 일이네.”
“이 모든 것을 이룩하며 다른 나라를 핍박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물론 견제 정도는 가능한 일이지만 가급적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룩할 일입니다.”
정약용은 말도 안 된다면서 허탈하게 웃었지만 일준이는 나를 심각한 표정으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뭐라도 해 봐야겠다면서 발버둥을 치던 놈이 아예 제국주의의 표본이 되어서 날뛰려고 하네······. 조만간 청나라 두들겨 팰 거면서 그게 견제야?”
“옛 고토인 만주와 요동은 당연히 획득해야 할 땅이고. 청나라를 아예 멸망시킬 생각은 아니지만 원한이 많으니 한 대 두들겨 패고 견제정도는 해야지.”
“그게 견제면 이러다가 일본도 거슬린다고 견제를 날려서 죄다 박살낼 것 같은데?”
“일본을 박살내는데 왜 전쟁이 필요해? 경제 규모가 커지면 견제 몇 번에 20년은 후퇴하는 나라가 일본인데. 조선의 진짜 적은 영국이니 저 정도는 달성해야 대적할 수 있지.”
일본을 견제하려면 전쟁도 필요 없고 재정 여유가 은자 500만 냥에 달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정약용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자네가 심히 염려되는 말을 하였네만 백성들의 생활이 나날이 나아지고 있으니 내 다른 말은 안하겠네. 주상전하께서도 명하신 바가 있으니 이를 엄중히 따르는 것이로군.”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나라의 백성은 아직 새로운 문물에 적응하지 못 하고 있지만 조만간 적응하고 생활이 나아질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새로운 조세제도와 급격한 산업화가 시작되며 여러 어려움을 겪겠지만 이것도 오 년 이내에 해결될 일이다. 지금쯤 백성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는 눈에 보이듯이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