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75화 (75/345)

< 8장 - 사업 설명회 >

충렬사와 같이 선열들을 배향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일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과업이 서원을 철폐시키지 않으려는 배려라 여겼다.

대신 안동 일대처럼 여러 명망 있는 서원이 난립한 곳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설득에 나섰다.

큰 규모의 서원을 우선시하여 지역 역사의 연구와 기록 보존에 힘쓰게 하였다. 이후에 규모가 조금 작은 서원은 다른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병산서당은 서당에 불과하나 안동의 수많은 서원 가운데 기풍을 유지하였으니 세자저하께서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이를 본보기로 삼아 병산서당을 서원으로 사액(賜額)할 것입니다.”

“믿기지가 않는구려. 안동 일대에서 아홉 곳의 서원이 문을 닫았는데 새 서원으로 사액하신다니 이는 크나큰 은혜요.”

부패와 비리를 저지른 서원들은 강제로 문을 닫았으며 심한 경우에는 속한 유생들이 도성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반면 올바른 뜻을 지킨 병산서당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 내려온 현판이 병산서당의 문 앞에 걸렸으니 이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관리는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헛기침을 하여 주의를 돌리고 연구 과업을 내려주었다.

“안동 지역은 명망이 깊은 유생들이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을 이어오고 있으니 나라의 본을 보여주기 가장 좋은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니 세자저하께서 과업을 내어주셨습니다.”

유생들은 연구 과업이 적힌 책자를 확인하더니 눈을 흘기며 관리를 째려보았다. 이들은 서양의 말로 서적을 번역하라는 말에 격렬히 반발하려 하였다.

“서적의 번역 작업이라 하였소? 서역 오랑캐의 말과 글을 우리가 배우란 뜻이오?”

대놓고 거절할 수 없으니 효명세자가 내놓은 연구 과업인 <동방 문화에 무지한 서양인들을 위한 서적 번역>의 내용을 확인한 유생들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하였다.

“이건 막 관례를 올린 애송이보다 못 한 수준이 아닌가? 사서삼경을 번역하라고?”

“번역하는 서책에 손자병법이 속해있다니? 서역의 오랑캐들이 서로 전쟁을 벌일 것인데 손자병법도 모르고 전쟁을 벌이다니 어떻게 되어먹은 놈들인가?”

한 평생 서책만 읽어온 사람이고 앉은 자리에서 십삼경과 무경칠서 정도는 줄줄 외울 줄 아는 사람들이 이들이었다. 서양 오랑캐들은 이들이 보기에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누구나 능히 탐독하여야 하는 서적조차 모르다니 엉망진창이로군!”

“이러한 사람을 교화시키는 것이 유생으로서 올바른 길이라네. 저들이 와서 배워야 마땅하지만 우리가 서역의 말과 글을 익혀 서적을 전파해야 더 빠르게 교화할 수 있겠지.”

사람이 덜 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유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이들이 완벽한 번역을 하려면 서양의 언어와 문화를 익혀야 한다는 점은 모르고 있었다.

사업에 참가하지 않은 서원은 각 지방의 기록을 정리하고 조정의 연구 과업을 수행한다. 일종의 국문과와 사학과만 존재하는 지방 사립 대학교가 설립된 격이었다.

서원의 두 번째 대응은 포기였다. 재력이 부족하여 기업을 세울 방법도 없었으며 인원도 부족하여 연구 과업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서원을 폐지하기 전 마지막 제사가 배향되었다.

“자네들은 지금까지 허름한 서원을 관리하며 고생을 많이 하였으니 어서 들어가 쉬게나.”

“아닙니다. 진사님께서도 제 뒷바라지를 많이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고직사에 머물고 있던 관리인이 제사를 준비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몇몇 젊은 유생들을 주축으로 마지막 제사를 올렸다. 눈물을 글썽거리던 유생은 스스로 서원의 현판을 내렸다.

이러한 방식으로 팔십여 개에 달하는 서원이 문을 닫았으며 남은 건물은 조정에서 관리하기로 정하였다. 유생들은 남은 서원에 들어가 연구를 하게 되었으니 큰 손해는 아니었다.

남은 서원은 세 번째 대응을 하였다. 이들은 명망이 그리 높지도 않으며 학식도 깊지 않았으며 오로지 이득을 위하여 서원을 경영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돈을 놓고 돈을 먹는 일에 몰두하였으니 조만영의 예상대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제안에 응했다. 이러한 서원을 위해 간단한 사업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일전에 조정에서 권한 이야기는 잘 듣고 모두에게 알려주었네. 서원의 각종 혜택과 서원전을 회수하고 사업을 시작할 때 기본 자금을 내려주시기로 하시지 않았는가?”

“알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유생 여러분이 모은 자금에 비례하여 조정에서 이 할의 지원금을 내려줄 예정입니다. 그러하면 얼마나 많은 자금을 모으셨는지 궁금하군요.”

유생들이 손짓을 하자 하인들이 나서서 토지대장과 각종 패물 그리고 장롱 속에 잠들어 있던 상평통보를 가져왔다. 유생들은 모든 물자를 점검하고 말하였다.

“도합 십칠 만 냥이오. 종가에서 모아온 자금과 각지의 사소한 땅을 팔고 여러 경로로 자금을 융통하였소. 그러하면 조정에서 어떠한 사업을 권하는 것이오?”

“십칠 만 냥이면 조정에서 삼만 오천 냥의 자금을 보태어 이십만 오천 냥이 모이게 됩니다. 이 정도 자금이라면 직조공장을 설립하는 것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직조공장의 구조와 생산품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 유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옷감은 언제나 부족한데 이를 생산할 수 있다면 손해를 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답하였다.

“일전에 도성에 올라가서 직조공장을 본 적이 있소. 쉴 새 없이 면직물을 자아내는데 수익이 얼마나 될 것 같소?”

“근로자들의 임금과 물품을 납품하고 거래하는 상인의 수익을 떼어내셔야 하지요. 아마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면 일 년에 삼만 냥 정도의 수익은 거두실 수 있을 겁니다.”

자금을 땅으로 환산하면 700결 내외에 불과한데 소작농을 시켜 농사를 지어도 1만 5천 냥의 수익이 전부였다. 계약서에 날인을 한 유생들은 악수를 나누고 공장 설립 일정을 확정지었다.

“앞으로 삼 년 이내에 공장의 설비를 마련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또한 더 많은 투자를 원하시면 공장을 가동하고 나서 주식(株式)을 만들 것을 권장합니다.”

자본이 있을 뿐 자본주의 논리를 명쾌히 알지 못하는 유생들은 주식의 개념을 듣고 혼란을 겪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념에 눈을 뜨려면 상인들이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각자의 자본 수준에 적합한 공장의 설립이 끝난 다음에는 욕심은 가지고 있으나 자금이 부족한 서원들의 차례였다. 이들은 돈을 모으기는 하였으나 한없이 부족하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업은 없는 것 같구려. 가장 설비가 적은 공장도 오만 냥의 자금이 필요하지만 모은 자금이 이만 오천 냥에 불과하오.”

“그러시다면 조금 위험한 투자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도성에 있는 그랑제콜에서 졸업생들이 여러 시험적인 상품을 만들어 보았는데 이것에 투자하심은 어떠하신지요?”

이런 위험한 사업은 조정의 출자금을 최대 75%까지 높일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거절하겠지만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서원을 경영하던 사람들이니 제안에 응하였다.

“조정에서 자본을 많이 내놓기로 하였다면 쓸모는 있을 터. 어떠한 물건인지 확인하고 사용해 보아야 알 것 같으니 도성에 다녀올 것이오.”

22개의 서원에 속한 대표들은 그랑제콜의 졸업식이자 사업 설명회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이윽고 1839년 8월이 되어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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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졸업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과에 합격한 사람이 입학하여 대과에 합격하면 그 자체가 졸업식이었다.

반면 그랑제콜은 졸업식이 존재하였다. 현대 대학과 같이 4년의 학습을 통해 작성한 졸업논문이 교수들의 허가를 받아 통과하면 그 자체가 졸업 자격과 같았고 소과를 면제받았다.

사업 설명회를 추진할 겸 졸업식에 참가했는데 마침 모시로 만든 정장을 차려입은 갈루아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센 박을 오랜 간만에 보는군. 사람을 조금 가르쳐 봤는데 사람다운 놈들이 없으니 답답하고 짜증이 솟구치고 있다네. 이를 어찌 하면 좋겠나?”

“사람다운 놈이 없다 하였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미적분과 공업수학 정도는 터득하였던데요.”

“공업수학? 닐슨 학과장이 만든 수학의 이름을 덮어쓴 누더기 말인가? 아름다운 수학의 정수를 갈기갈기 찢어 증명 과정을 생략하고 계산만 할 줄 아는 머저리로 만드는 과목이야!”

갈루아가 발을 구르고 분통을 터트렸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분명 기초수학이라 하여 중학교 과정부터 대학교 초입까지의 교과서를 만든 사람인데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그는 눈을 흘기면서 말하였다.

“내가 기초수학을 만든 이유는 닐슨의 제안을 따라 수학에 입문하고 재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원한 것이었지. 그런데 입문을 하고 바로 빠져나가! 이 은혜도 모르는 놈들아!”

조선에 왔음에도 갈루아의 독선적인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독선적인 면모를 겉으로 숨기고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재능 있는 자를 선별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는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섞어가며 고래고래 욕설을 질렀고 다른 교수들과 졸업생도 갈루아의 태도에 주눅이 들어 자리를 피할 지경이었다. 그러한 갈루아에게 오귀스트 마르몽이 다가와 진정시켰다.

“그래도 자네 덕분에 거둔 성과가 많으니 기쁜 일이 아닌가. 수학의 ‘수’ 자도 모르던 머저리들에게 기초수학을 가르치니 포병 육성이 편해졌네.”

“마르몽 원수께서 제 서적을 칭찬해 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 뿐이겠는가? 자네가 만든 서적이 우리 프랑스에 건너가게 되었다네. 듣자하니 프랑수아 기조 장관이 기초수학과 이를 참조하여 만든 서적으로 초등교육을 실시한다더군.”

인정을 받아 마음이 풀린 갈루아는 어느 새 표정이 풀어져 웃는 얼굴로 졸업식을 바라보았다. 일준이는 준비가 끝나자 단상 위에 올라가 졸업 축사를 낭독하였다.

“그랑제콜 분원에 첫 해에 입학한 일백 명의 학생 중 여든 네 명이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학으로서의 첫 성과이며 더더욱 많은 학문을 연구하는 장이 될 것임을······.”

졸업생들은 몇 명씩 조를 이루어 학사모를 쓴 채 졸업식을 맞이하였다. 대표는 당연히 흥선도정(都正), 본래 역사에서 흥선대원군이 될 이하응이었다.

축사가 끝나고 프랑스에서 온 유학생들은 학사모를 높이 집어던지며 환호하였고 조선 출신 학생들은 절을 올렸다. 교수들과 악수가 끝나자 다음 차례로 사업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이제 졸업생들이 거둔 성과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각 과목을 이수하며 논문을 작성하고 이를 세상에서 널리 쓸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었으니 확인하여 보심이 어떠하신지요.”

일준이가 말하길 졸업 논문에 계속 수정과 첨삭을 거쳐 가며 사업성이 있는 녀석으로 바꿔두었다고 했었다. 처음으로 나온 졸업생은 쭈뼛거리며 자신의 작품을 말하였다.

“저는 아연과 망간 그리고 염화암모늄을 숯과 조합하여 전지를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쓰이는 전지와 비교할 수 없이 약한 녀석이지만 응용하여 조족등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출품된 물건은 정말 손전등이었다. 현대에 쓰이는 물건과는 다르지만 정말 전구와 전지를 이용하여 스위치를 통해 불을 켜고 끄는 물건이었다.

이 졸업생의 논문은 본래 아연 전지를 만든 수준이겠지만 일준이가 개입하여 실용화를 한 것이다. 손전등을 받아들고 여러 차례 확인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저러한 물건을 하나 지참하고 다니면 장대비가 내려도 불을 밝힐 수 있을 걸세.”

첫 평가부터 좋았고 다음 물건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프랑스 유학생이 누런 덩어리를 가져왔는데 생고무를 응용하여 만든 라텍스 베개였다.

이외에도 본래 가압 추출용으로 만들어진 압력솥의 크기를 키우고 압력을 낮추어 요리하는데 쓸 수 있게 만든 물건, 가황고무의 물성을 한껏 응용하여 만든 군화가 선을 보였다.

서원에서 방문한 사람들은 각자 논의를 하여 이러한 물건들을 자신들이 생산해 보기로 하였다. 마침내 프랑스 유학생이 조심스럽게 유리병을 가져와 말하였다.

“저는 이황화탄소(CS2)와 다른 화합물을 응용한 살충제를 개발하였습니다. 조금 흉한 꼴을 보실 지도 모르겠지만 살충제를 시험하겠습니다.”

“살충제를 개발했다고? 본래 자네의 논문은 해초의 번식과정에 대한 연구였는데?”

“석사 학위 논문으로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서 살충제로 진로를 틀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다른 졸업생과 겹치게 되었습니까?”

일준이가 생힐레르 데 아우구스투스의 연구생이니 딱히 간섭을 안 하여서 벌어진 문제였다. 온갖 벌레를 잡아넣은 뒤주에 이황화탄소를 부어넣자 연기가 피어오르며 지독한 냄새가 밀려왔다.

십 분이 지나고 뒤주를 열자 해충들이 모조리 죽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 모습을 확인한 이하응은 일준이에게 달려와 초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제 졸업 과제와 완전히 겹치게 되었으니 석사 과정에서 연구할 물건을 시연해 보겠습니다. 조금 위험한 물건이 되겠지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일세. 그나저나 위험한 이황화탄소를 응용해 더 위험한 물건을 만들겠다고?”

“간격만 유지하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폭발물을 실험할 때 사용하는 투척기로 안전하게 실험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일준이는 골똘히 생각하였지만 졸업생 대표인 이하응이 망신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허락을 받은 이하응이 사라지고 계속해서 사업 설명회가 진행되었다.

“제가 만든 것은 땔감을 오분지 일 만 사용하여도 음식을 할 수 있는 화덕입니다. 형상이 조금 기괴하며 철로 만들었지만 벽돌을 쌓아 만들어도 충분한 물건입니다.”

“저 물건은 병사들이 요긴히 쓸 수 있을 것 같군. 돌을 쌓고 장작을 가져와 화덕을 만드는 대신 스무 근(12kg) 정도 되는 철 화덕 하나면 백여 명이 먹을 수 있을 걸세.”

물건 중에는 현대의 적정기술 중 하나인 로켓 스토브도 있었으며 알루미늄을 응용하여 만든 반합도 있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갈 무렵 이하응이 도착했다. 그는  연구실에 다녀왔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진한 갈색 안에 희뿌연 물질이 녹아있는 유리병을 가져왔다.

“조금 늦게 되었습니다. 이 물건은 폭염수(暴炎水)라 하는데 소량으로 연구한 것이 전부이고 이런 대용량을 실험한 적은 없습니다.”

이하응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의 도착을 환영하였고 미리 준비한 소형 투석기가 준비되었다. 이하응은 발사대에 유리병을 올리고 앞마당 구석을 향해 발사 준비를 마쳤다.

“그러면 발사하겠습니다. 발사 장소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져 주십시오!”

“이황화탄소에 백린을 섞었잖아! 당장 멈춰! 멈추지 못······.”

일준이가 다급하게 달려갔지만 이하응은 이미 투척기를 가동시켰고 유리병이 날아가 앞마당 구석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를 확인하려고 다가갔지만 일준이가 필사적으로 만류하였다.

“가까이 가면 죽을 수도 있으니 멀리 떨어지시오! 너희는 모포에 물을 적셔서 가져와! 어서!”

“저 물건이 뭔데 그렇게 당황하시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의문을 표시한 사람들이 일준이의 지시를 무시하고 다가갔다. 내가 보아도 화학약품 냄새가 밀려오고 희뿌연 색으로 풀잎이 물든 것이 전부였다.

“저건 백린 덩어리란 말이오! 흥선도정 자네는 대체 무슨 흉물을 만들었는가!”

백린 덩어리라는 말에 사람들이 황급히 대피하였고 백린이 연소되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달려온 하인들이 먼저 물을 끼얹었지만 백린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저런 불이 세상에 어디 있어! 물 위에서 불타는데다가 물이 끓어오르잖아!”

“모포 가져오라고 말 했잖아! 백린 화재는 모포로 덮어서 끄는 것이라고!”

수십 장의 모포가 소모된 끝에 이하응의 발명품 폭염수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나마 풀숲이라 다행이지 저 장소에 사람이 있었다면 끔찍한 몰골이 되었으리라.

일준이와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이하응을 바라보았고 그는 시선에 주눅이 들어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 침묵을 수습하기 위해 이하응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며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니 좋은 연막탄 아닙니까? 기병이 난입할 때 포병대를 보호하기 위해 미리 뿌려두면 될 물건이군요. 가장 좋은 발명품 같으니 이는 조정에서 사용할 것입니다.”

이건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청나라를 상대로 백린탄을 뿌릴 정도로 부족한 군대도 아니고 사용하면 정복지의 민심은커녕 온 세계의 공적(公敵)이 될지도 모른다.

억지로 웃는 이하응이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폭염수가 아닌 연막수라고 이름을 고치기까지 하였다. 정말 급한 상황이면 모를까 이런 흉측한 병기를 쓸 생각은 없었다.

작가의말

백린탄은 영국에서 1차대전에 사용한 물건도 있지만 그 이전의 발명품도 존재합니다.

1848년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에 창설된 페니언(Fenian) 이라는 단체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하며 이황화탄소 용액에 백린을 섞어 백린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하응이 발명하게 되었군요. 오물을 소독하는데는 쓸 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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