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 친정 결단 >
북경에서 돌아온 경양군은 내가 가장 원하던 소식을 가져왔다. 물론 상태야 매우 좋지 않았으며 피해망상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으니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안 보아도 알 것 같았다.
“주상전하께 아뢰오니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달하였사옵니다! 청나라 조정의 관료들이 논의를 하여 이 나라가 죄를 뉘우칠 방법을 알려 주었으니 이를 논하겠사옵니다.”
온갖 미사여구가 담겨있었지만 요약하면 음력 9월 1일까지 관련자를 처형하고 효명세자를 북경으로 들여놓으라는 말이었다. 순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하였다.
“이 제안을 고스란히 따르게 된다면 나는 물론이요 형조의 인원과 여기에 연루된 수천 명을 참수하는 꼴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구나.”
먼저 관련자에 대한 명확한 조항이 없었다. 조선의 시선으로 보면 관련자는 오로지 칼을 놀린 망나니라 규정하고 네 명 정도만 처형하여 수급을 보내면 될 수도 있었다.
반면 청나라의 시선으로 보자면 관련자를 한 없이 늘릴 수 있다. 의주에서 밀수꾼을 잡은 군관이나 이들에게 명령을 내린 의주의 관리도 포함된다. 심지어 한양까지 압송을 명령한 평양 감사와 휘하 군관까지 포함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중앙 관료들도 관련자이다. 이들을 하옥한 형조는 물론이요 포도청과 의금부도 포함되며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린 순조까지 관련자이다.
이 요구만 들어도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경악하겠지만 다음 항목도 문제였다. 효명세자가 북경을 방문하라 하였는데 처리해야 할 사안이나 머무르는 기한에 대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영길리를 사특한 나라라 말하지만 이들에게도 본받을 것이 있으니 약조와 관련된 일이다. 약조를 맺을 적에 몇 번이고 심사를 거듭하여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이를 필히 지키지 않더냐. 반면 청나라의 국서는 어떠하더냐.”
“실로 잔혹한 말이옵나이다. 설령 이 조선이 고개를 숙여 성의를 보인다 하여도 부족하다는 명분을 앞세워 병자년을 넘어서는 화근을 불러오겠다는 협박이나 같은 말이옵니다.”
순조는 물론 효명세자도 계속 서양과의 조약은 물론 거래까지 맺어오면서 깔끔한 외교문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니 이런 강압적인 외교문서를 보고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이는 지극히 부당한 말이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 청나라의 오만한 뜻이로다. 그러하니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일이로구나.”
어느 누구도 순조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청나라가 진정한 아량을 베풀어 스스로의 잘못을 논하거나 좀 더 온건한 처우를 원했다면 반전의 목소리가 생겨났으리라.
결국 청나라의 전근대적 외교가 자초한 화나 마찬가지였다. 순조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명령을 내렸다.
“군관들을 소집하고 국영 공장을 담당하는 관료들을 모으도록 하여라. 또한 각 지방의 사단에게 명을 내려 합동 훈련을 실시할 것이니 도성으로 집결하라 명하여라.”
구석에 물러나 있던 경양군이 이 말을 듣더니 사지를 흐느적거리며 혼절하였다. 기껏 인생이 나아졌다 생각했는데 나라가 망할 꼴에 처한 충격이 겹쳤으리라.
“외부승지는 사람이 모이는 동안 경양군을 정약용에게 보내 치유시키도록 하여라.”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순조도 냉정하게 경양군을 사지로 보냈지만 돌아오고 나니 사촌동생이라고 배려하는 것 같았다. 정약용은 내의원 소속이지만 나이도 많고 의약품 연구에 매진하여 혜민서에서 근무했다.
물론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이니 얻은 배려이지만 간혹 중요한 손님은 혜민서에 들려 치료를 받았다. 정약용이 머무는 가장 안쪽의 방에 들어가니 먼저 온 환자가 있었다.
서양인 노인이 온 몸에 침이 박힌 채 콧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누구인지 잠시 고민하였는데 그는 눈을 번쩍 뜨더니 독일어 억양이 남아있는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하였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십니까? 이름이 알렉산더 폰 훔볼트라 하며 조선의 유쾌한 귀족들과 함께 지질학과 고생물 그리고 고고학에 대한 지식을 논하던 사람이지요.”
“훔볼트 교수님께서 여기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체 어찌 되신 일이신지요?”
“그야 발굴 작업을 진행하다 심한 일사병에 걸렸기 때문이지요. 덕분에 좋은 의사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훔볼트는 아마 젊은 시절에 수많은 곳을 드나들어 자신만만하다 끔찍한 더위를 경험하고 일사병에 걸린 것 같았다. 어느 새 지팡이를 짚고 들어온 정약용은 침을 빼며 말하였다.
“며칠 정도 정양하시면 열기가 모두 빠져나갈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몸에 열이 쌓이는 것을 가급적 피해 주시지요.”
“독토어(Doktor) 여유당보다 뛰어난 의사는 흔치 않으니 의사 소견에 따라야지요. 시일이 남으시면 저와 함께 말라리아 치료제에 대한 논의를 나누어 보지요.”
머쓱한 표정으로 일어난 훔볼트는 열이 빠져나간 몸을 휘적휘적 돌리며 자리를 비웠고 정약용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참 뛰어난 사람이 아닐 수 없군. 온갖 지식을 섭렵하고 약재에 대한 지식도 있어서 내가 개발한 주후비급방의 처방을 자신이 추출한 금계랍과 비교하자 하더군.”
“훔볼트도 뛰어난 사람이지만 저 또한 한 분을 알고 있지요. 다산 선생님 아니십니까?”
“나야 자네들이 전해준 지식이 아니었다면 대화를 이어가지도 못 하였을 걸세.”
더 이상 칭찬을 그만하라는 눈빛을 보낸 정약용은 몸을 돌려 경양군이 누운 방으로 향하였다. 한참 진맥을 하고 눈을 확인하더니 허탈한 듯이 말하였다.
“마음의 병이 지나치게 깊으니 이런 몰골이 되었군. 그나저나 경양군 대감께서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려주도록 하게.”
“경양군 대감께서는 북경을 다녀오신 다음부터 이러한 몰골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일에는 손을 놓고 의술의 발전에만 전념하던 정약용은 나의 설명을 들으면서 경양군에게 침을 놓고 뜸을 떴다.
경양군은 갑자기 헛숨을 삼키더니 마음이 누그러져서 바로 잠에 빠졌다. 신기에 가까운 침술을 보여준 정약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였다.
“참으로 주상전하다운 일을 하셨구나. 건릉(健陵 - 정조의 능)에 계신 분이 떠오를 지경이니 이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닌가.”
“건릉에 계신 분이라면 정조 대왕이 아니십니까?”
“지금은 정종 대왕이라 불리시는 분이시지.”
치료를 마친 정약용은 답도 하지 않고 옆방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얼마 전 새로 바꾼 안경을 내려놓고 고운 비단으로 닦아 다시 쓰고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하였다.
“자네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겠군. 청나라와의 전쟁을 코앞에 두었는데 마음이 평온하고 오히려 기대하는 눈빛이 엿보이지 않나. 승산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십 할입니다. 사실 패하는 것이 더 힘든 전쟁이 될 것입니다.”
“자네가 일전에 논하기를 청나라가 수십 년 동안 절치부심을 하여도 왜국을 상대로 패하였다 하였지. 어찌 보면 지금의 청나라를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겠군.”
다른 사람이라면 신뢰하지 않을 발언이지만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으니 신뢰하고 있으리라. 정약용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만 나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러하면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자네가 주상전하를 모신지도 어언 십 년이 넘지 않았는가? 주상전하께서 경양군을 북경에 보낸 속뜻을 혹여나 알고는 있는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격식은 맞추어야 하고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니 보낸 것이 아닙니까?”
“자네는 여전히 머나먼 훗날에 살던 시절의 습속을 버리지 못하였군. 그럴 것이면 남연군 대감의 차남인 흥완군(興完君)을 보낼 것이지 왜 더 가까운 종친을 보낸단 말인가?”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극히 냉정한 말이지만 쓰고 버려야 할 패가 생긴다면 가장 안 좋은 패부터 보내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었다.
설령 남연군의 둘째아들인 흥완군이 처형을 당하더라도 남연군을 철저히 대접해주면 문제를 억누를 수 있었다. 정약용은 잠시 고민하더니 생각을 정리해 말하였다.
“내가 보기엔 주상전하께서 친정(親征)을 논하려 준비하신 것이 분명하군.”
“친정이라 하셨습니까? 주상전하께서 왜 친정에 나서십니까!”
“그야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며 옛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야 이성계가 고려의 주 전력을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해서 벌어진 일이다. 순조 입장에서 보면 대상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순조가 도성에 남아있는다면 7개의 사단 가운데 잘 해야 4개 사단 정도만 동원할 수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남아있는 지원군을 합쳐도 3만 명에 불과한 병력이며 통제도 힘들다.
대신 순조가 움직인다면 정말 최소한의 방어병력을 제외하고 모든 군대를 동원할 수 있으리라. 정약용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 여겼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말하였다.
“내 자네가 말해준 훗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네. 왕의 자격이 없는 자가 보위에 오르고 나라를 분열시켰으며 결국 왜국의 공족(公族)이 되는 결말을 맞이하였지.”
“이런 역사에서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벌어지지 않아야하네. 설령 벌어진다 하여도 주상전하께서 나서서 모범을 보이셨으니 훗날의 일이 달라지겠지. 이 나라의 중심에는 언제나 왕실이 함께 할 것이네.”
정약용의 마음속에 고종으로 인해 멸망한 본래 역사의 조선은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당시에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도 어디까지나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기쁨이었지.
그는 이번 친정으로 왕실이 모범을 보여 대대손손 왕의 자리가 이어가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말해 보았자 언쟁만 벌어지니 내가 할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났다.
“미리 알아두고 있겠습니다. 그러하면 제가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겠군요.”
“자네가 할 일이라 하였는가? 자네는 외무승지로서 외교 업무를 주선해야지.”
“주상전하께서 친정에 나서게 되면 설득할 사람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사태를 관망하거나 피난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정약용은 내가 할 일을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긴급히 소집된 비변사로 돌아가니 지도가 벽에 걸려있고 회의가 바로 진행되었다.
“우리 군의 대전략을 논하도록 하여라.”
“주상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길림성의 팔기군을 무시하는 방안을 택하겠사옵니다”
조선군의 전략은 간단했다. 그루시의 정보를 존중하여 요동의 거점인 심양을 기준으로 서쪽에 배치된 길림성의 팔기군을 단숨에 제압하고 회전을 벌여 심양을 함락시킨다.
몽골팔기의 지원과 요동팔기의 잔당을 억누르고 즉각 요서회랑을 통하여 진군한다. 문제는 청나라에서 이미 병력을 동원했다는 점이었고 예상 동원 병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청나라 군대의 수효는 도합 사십여 만 명에 달할 것으로 사료하옵니다.”
“그 사십여 만 명이 모두 정군(正軍)인가?”
“그러하옵니다. 북경에 있는 팔기군이 도합 십여만 명, 인근 여섯 개 성의 팔기와 녹영을 모두 소집하면 이십여 만 명에 달합니다. 또한 요동 일대의 병력까지 합산하면······.”
숫자만 보아서는 바윗덩어리를 돌멩이로 부수라는 말과 같았다. 청나라가 멍청해서 조선군과 대등한 삼만 내외의 규모로 군대를 나누어도 10회의 전투를 치러야 한다.
말이 10번의 전투이지 한 번의 전투를 치를 때 전체 병력의 10%가 손실된다 치면 조선군의 생존자는 40%에도 미치지 못 한다. 순조는 이를 알고 허탈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로구나. 곽거병이 흉노를 토벌할 적에 연전연승을 거두며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하였다. 이 나라의 군대가 곽거병처럼 청군을 무너트릴 수 있겠느냐.”
“처음 두 번 정도는 가능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만 그 이후는 대응할 것이옵니다.”
“그 말이 지극히 옳구나. 북변에 있던 흉노족과 중원을 차지한 청은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
순조는 숨을 들이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야 태연하게 있었지만 절망적인 상황이라 생각하고 결사 항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순조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외부승지는 왜 그리 편안하게 있는지 궁금하구나.”
“신은 주상전하의 뜻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함께 할 마음이옵나이다.”
“좋은 말이로구나. 작금의 상황은 이 나라의 군대를 온전히 쓸 수 없어 벌어지는 문제가 절반이다. 기껏해야 네 개의 사단만 청군을 상대로 싸울 수 있지 않더냐.”
이 이상 사단을 보내라는 말은 반란을 종용하라는 말과 같으니 모두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순조는 이를 짐작하고 있었으니 이를 악 물고 말하였다.
“내가 종제(從弟)인 경양군을 북경에 보낸 일을 기억하고 있더냐. 종친 가운데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하였으니 내가 친정에 나서야 이 보답을 하지 않겠더냐.”
“주상전하! 아니 되옵나이다!”
“무엇이 아니 된다는 말이더냐. 내가 친정에 나서서 지휘를 하면 네 개의 사단이 아닌 여섯 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구나. 그리 하면 병사의 수가 이 할 넘게 늘어나는 격이 아니더냐?”
순조는 수많은 반발을 마주하였지만 이를 하나씩 받아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감정적인 면모를 앞세우고 잔꾀를 부렸지만 정조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참 놀라운 기세였다.
“만에 하나라도 이 나라의 군대가 무너지고 패주하게 되었을 때에는······.”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논하는 법이 없지만 그럴 때에는 내가 스스로 나서면 될 일이다. 그리하면 청국도 분노를 억누를 수 있겠지.”
“이는 선례가 없는 일이오니 강화도로 미리 몽진하시옵소서.”
“이미 강화도가 함락당하여 인조대왕께서 치욕을 겪으셨는데 같은 일을 겪으라는 말이더냐? 맞서 싸우는 것 외에 답이 있더냐?”
모든 반박을 받아치고 있으니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이론상으로는 순조가 친정에 참여하는 것이 승률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는 답이다.
더군다나 순조는 조선왕조 특유의 고집불통의 성격을 드러냈다. 아예 엎드려서 빌고 있는 효명세자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려 울먹거리며 순조를 뜯어 말리려 하였다.
“아니 되옵나이다! 소자는 견문이 부족하며 경험이 일천하여 아바마마께서 친정에 나선 뒤에 신료들을 통솔할 능력이 없사옵니다!”
“그러하면 양위를 하여도 되겠느냐? 내가 상왕이 되면 일이 편해질 것 같구나.”
마침내 효명세자까지 순조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순조는 지금까지의 계획에 추가로 일만 명의 병력을 더 파병하라고 독촉하며 말하였다.
“이번 전쟁은 조선의 국운을 건 전쟁이다. 다시금 인조대왕의 치세처럼 흉험한 일이 벌어지는 꼴을 보느니 내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것임을 명심하도록 하라!”
마침내 순조의 친정이 결정되었고 동원 병력도 7개 사단에서 최소한의 지방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을 제외한 총군 4만 3천으로 결정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 비용의 충당과 보급 문제의 해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