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13장 4화 칭제 건원(1)
각 국가의 형편과 격식에 맞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다른 관원들은 물론 외교권한을 쥐고 있는 효명세자와 상담을 거쳐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초대할 사람의 목록 선별부터 이들에게 보내는 요청까지 감안하면 내가 작성한 서류만 한 달 동안 백 장이 넘어갔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오늘도 궐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초청장은 잘 배송되고 있는지 궁금하군. 진일 자네가 어련히 잘하겠건만 태자전하께서는 여러모로 심사숙고하여 일을 진행하라 하셨네.”
“환재(桓齋 - 박규수의 호) 종형께서 염려하실 필요는 없지만 한번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외부(外部 - 외무부)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 판단이 부족할 것 같군요.”
남은 서신은 청, 일본 그리고 미국에 보낼 초청장이었다. 박규수는 조만간 개편될 궁내부, 왕실 업무를 총괄하는 관청의 대신으로 임명될 사람으로서 내부 행사 준비를 진행하였다.
내가 외국의 일을, 박규수가 내부의 일을 총괄하는 형태였다.
박규수는 남은 세 개의 서신을 확인하고는 평가를 내렸다.
“역시 십덕(十德)이라니까. 청나라에 보내는 서신은 원하면 참석하라는 의도라니.”
“종형께 간곡히 말씀드리는데 제 별호는 너무 무거운 뜻이라 가급적 쓰지 않으려 합니다.”
“그럼 종제의 호를 오덕(五德)이라 하면 되겠군.”
이광정의 입방정 때문에 내 호가 십덕 혹은 오덕이라 조선 전체에 퍼져버렸다. 다들 좋은 뜻이라 생각하니 뭘 어쩔 수도 없다.
정약용은 내가 현대인이니 현대 기준으로 호가 안 좋은 의미라는 것을 짐작하였지만 다른 친밀한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 특히나 사촌 수준으로 친밀한 박규수는 더더욱 모른다.
내가 자초한 화라고 생각하니 별로 억울하지는 않지만.
일본과 미국에 보낼 서신을 읽은 박규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신을 확인하고 말했다.
“왜국을 점차 이 나라의 영향권으로 두는 정책은 이해할 수 있는데 너무 과하지 않은가. 동래에 들러 문안인사를 하면 충분할 것을 굳이 도성까지 데려올 이유는 또 뭔가.”
“작금의 이 나라를 왜국이 보고 배울 수 없으며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왜국의 각 지방은 몰라도 중앙을 담당하는 대군(大君 - 쇼군)이라면 이 나라를 경외할 것이 분명하지요.”
“이 나라를 경외할 것이라. 옳은 말이지만 내 판단으로는 그렇게 급할 이유가 없는데…….”
박규수는 일본에 보내는 서신에 대한 판단을 잠시 미루고 미국에 보내는 서신을 확인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에 지원군을 보내 신형 소총의 문제점 분석과 개량을 실시하려 하였는데 영국 기술자 휘트워스가 개입하며 이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할 의지를 다시 피력하였다.
박규수는 이 항목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하였다.
“미국에 굳이 지원군을 파견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이 나라에서 보내는 필수적인 물품을 제외하면 제반 비용을 모두 미국에서 제공하는 조건이지만 괜한 조처 같군.”
“실전 경험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근래에 청나라와 단 한 번의 일전을 벌인 것을 제외하면 그리 많은 경험을 축적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걸. 미국은 영길리를 상대로 독립을 쟁취한 나라이지만 식민지 출신 국가에 불과하지 않나? 어설픈 나라이니 배울 것이 많지 않을 걸세.”
“그렇다 하여도 다른 나라의 일을 배우면 이 나라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박규수는 내 말을 듣고 괜한 수고를 한다며 중얼거렸다.
전 세계는 아직 미국의 진정한 힘을 본 적이 없으며 미 대륙의 막대한 생산력과 잠재력에 대해 명확히는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청나라를 가볍게 억누르고 제국을 칭하는 조선 입장에서는 잘해야 자신들과 대등하거나 조만간 추월할 나라로 볼 거다.
그러니 설득을 위해 다시금 말하였다.
“미국은 경쟁자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들이 어떠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소문을 들으니 열 결의 땅을 개척하면 주변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땅을 나누어준다더군요.”
“나 또한 영길리에 있을 때 그러한 소문은 들었지만 진실은 모르지 않는가. 한번 사람을 보내기는 해야 하나 이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제국을 칭하는 나라가 한 줌의 사람만 보낸다면 격식에 맞지 않습니다.”
“과한 말인 것 같으나 이해하겠네. 이 서신은 태자전하께서 확인하시어 결정을 내릴 걸세.”
세 나라에 보낼 외교문서를 챙긴 박규수는 바로 돌아가려다가 피로를 호소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칭제 건원을 실시하며 연설문도 준비하고 있는데 여러모로 생각할 바가 많더군.”
“근래에 순학자(舜學者 -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비석이 연설문의 내용을 정했다 하던데요.”
“그뿐이겠는가? 비석을 열 개 넘게 발견하여 이 나라의 옛 기록에 대해 명확히 알게 되었네.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각 지역의 역사를 확인하던 사람들도 한 손을 거들더군.”
얼마 전 도성에 각 서원의 대표들이 집결하였다. 지방 대학이자 사학과를 시작으로 역사를 연구하던 이들은 순학자들이 발견하여 탁본한 비석들과 자신의 기록을 대조하였다.
여러 정보를 통하여 삼국시대와 그 이전 원삼국시대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제국을 칭하는 자리에 활용할 목적이라 하였다.
박규수는 당시의 일을 생각하였는지 푸념하듯 말했다.
“옛 고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황제 대신 태왕(太王)이라 칭하자는 이들도 있었지.”
“그 소문은 들었습니다. 태자전하께서 말씀하시길 태왕은 이미 넘어섰다 하셨지요.”
“나도 당시 그 자리에 있었는데 모두 웃을 말이었지. 태왕은 삼한을 근본으로 삼은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를 정벌하지 못하였으니 작금의 이 나라보다 격이 낮은 칭호가 아닌가.”
예전이라면 태왕도 너무 높은 칭호라고 비판을 받을 것 같지만 지금 조선이라면 엄연한 제국을 칭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강역으로 삼았고 북방을 정벌하였다. 결국 옛 고구려의 영토는 물론 주변 부족도 모두 집어삼키지 않았는가.
그 뒤로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막 옹알이를 하는 둘째 딸 은영이를 볼 새도 없이 수많은 외교관과 접견하고 행사를 준비하며 석 달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순조는 마침내 8월 2일, 기습적으로 양위를 선언하였다.
효명세자는 열흘 내내 석고대죄를 하며 양위를 거부하였으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였고 예정대로 왕위에 오르며 칭제 건원 행사를 겸하여 표명하기로 하였다.
* * *
1844년 음력 8월 15일이자 양력 9월 26일. 마침내 행사의 막이 올랐다. 이미 한 달 전부터 한양 일대에 집결해 있던 각국 외교관과 대표들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으로 향하였다.
외교관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필리프의 아들인 오말레 공작 앙리를 보내왔고 영국에서는 의지를 표명하려고 2대 멜버른 자작 윌리엄 램을 보내왔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보내온 외교관은 대선 후보이자 차기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이다. 이 양반을 보낸 이유는 아마 멀리 다녀와 고생하라는 뜻 같은데 대화를 나누기 좋은 인물이었다.
가장 많은 인원을 파견한 국가는 역시나 청나라와 일본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을 염탐하기 위하여 서른 명을 파견하였으며 일본은 초대를 받아 스무 명을 파견하였다.
먼저 대소신료들이 속속들이 궁궐로 들어가고 다음으로는 내가 외교관 인솔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 행사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리고 경복궁으로 달려들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복원된 경복궁 밖에 도열한 채 칭제 건원을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가위와 겹쳐 칭제 건원이 시작되니 두 축일이 겹친 격이다.
행사 총괄 진행자야 얼마 전 병세를 극복한 경양군이지만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종친들의 자리를 배정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잡다한 업무를 하였다.
“열국의 외교관들은 모두 입장하시오! 폐하께서 행사를 거행할 준비를 마치라 하였소!”
모든 사람들이 집결하는 가운데 새 경복궁 건물이 마침내 개방되었다.
지금까지는 온전한 모습을 공개하지 않으려 숨겨두었지만 이제는 벽면의 휘장을 걷어낼 때가 되었다.
“아름다워. 동양의 미를 넘어선 새로운 미학이로군.”
프랑스를 대표하여 방문한 루이필리프의 아들 오말레 공작 앙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경복궁을 바라보았다.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지체될까 봐 손짓으로 안내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그렇게나 아름다우십니까?”
“물론이지. 격식이 다르다 하여도 미학은 전해질 수 있다네.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3층 건물로 만들어진 경복궁은 철근콘크리트라는 신소재를 완벽하게 활용하였다. 표면 착색이 용이한 콘크리트에 화려하지 않지만 기품이 넘치는 단청을 그려두고 절제미를 지켰다.
지붕은 구리 기와와 알루미늄 용마루를 만들어 색을 대비시켰으며 고의적으로 무광 처리를 하여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시일이 지나면 녹이 올라오지만 이 또한 미학을 가중시키리라.
단상에 오른 효명세자는, 이제는 황제라 불릴 사람은 경복궁 근정전의 마당인 조정(朝廷)에 집결한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우측에는 대한의 관료가, 좌측에는 외국의 사신들이 집결한 모습을 확인하고는 손짓을 하였다.
[황제폐하께서 옥음(玉音)을 내리실 것이니 모든 대소신료와 열국의 사람은 경청하시오!]
지독할 정도의 침묵은 물론 이 고함을 들은 궐 밖의 백성들도 환호를 멈추었다. 하늘을 수놓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만 퍼지는 와중에 효명세자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 나라가 건국되고 사백오십이 년이 흘렀으며 이 나라의 이전에, 옛적에 이 나라에 살던 이들이 처음으로 만든 옛 조선이 건국되고 사천여 년이 흘렀다.”
“그간 이 땅에 수많은 국가가 있었으며 황제국이라 자칭한 국가도 있었다. 그러한 국가들이 모두 옛 기록으로 사라지고 이 조선만이 오롯이 남았다. 감히 말하거늘 이 조선은 제국을 칭하고 연호를 세울 자격이 있다.”
“이 나라를 건국하신 태조대왕을 비롯한 수많은 열성조(列聖朝)께 말씀을 올리니 후손 된 자로서 격식을 갖추고 힘을 품고 있으며 지식을 갖추고 있다 자부하고 있노라.”
“그러하니 이 조선이 제국을 칭하고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연호를 세울 이유를 세 가지 논하도록 하겠다. 이미 조공 관계는 옛 일이 되었고 형제국의 자리에 올랐으니 청의 이견은 없을 것이라 믿겠다.”
잠시 숨을 고르며 연설문을 확인한 효명세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뒤에 앉아 있는 순조는 눈가를 닦으며 감동에 빠져 있었으며 종친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옥음을 경청하였다.
옆을 바라보니 외교관들과 초대받은 사람들의 표정도 다양했다.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으며 청나라의 왕공족인 두안후와는 아예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조선의 역사가 깊다 하지만 사천 년 전의 국호를 그대로 물려받은 줄은 몰랐다.’라는 평가였다.
숨을 고른 효명세자가 연설을 재개하였다.
“세 가지 이유 중 첫째는 이 나라의 강역이 삼한으로 시작하여 옛 고려(고구려)와 북방의 수많은 예맥(濊貊)의 일파와 옛 고려에 복종하였던 부족들을 모두 거느리고 있어서이다.”
“강역이 아무리 넓고 수많은 세력이 있어도 이를 온전히 통솔하지 못하면 나라가 분열될 수 있다. 이미 망령되이 칭제한 나라들이 분열로 인하여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옛 고려의 강역을 얻어내며 모든 세력의 복속을 받아냈으며 이들은 통치에 순응하였다. 건실한 내치를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이 나라의 아래에 모여들었으니 합당한 뜻이 아니겠는가.”
첫 대목은 청나라를 대차게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엄연히 따지면 청나라는 중원을 지배한 국가가 아닌 ‘중원을 지배하기 위해 엮어서 구성한’ 국가이다.
이미 분열을 시작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겠지. 오히려 옆을 슬쩍 돌아보니 훗날 대통령이 되고 남북전쟁을 방임하다시피 한 제임스 뷰캐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세 가지 이유 중 둘째는 이 나라의 역사가 깊으며 서역에 있는 중화(中華)의 제국과 견주어 부족함이 없는 덕분이다. 이전에는 조공 관계를 맺어 부족한 점을 키워나갔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청출어람이라 하였다. 옛 중화의 기상을 이어받은 명나라가 임진년 이 나라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렸으니 은혜를 받은 자로서 더욱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하니 중원과 같이 시작한 옛 조선의 후예로서 칭제를 행하겠노라. 칭제를 하여도 더 이상의 조공과 책봉은 없으며 열국의 평등한 관계만이 이 나라의 앞날에 남아 있으리라.”
두 번째도 만족스러운 내용이었다. 더 이상 중화에 얽매이지 않고 조공 관계를 폐지한 평등한. 실제로는 무력에 좌우되는 외교 관계를 맺겠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중국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은 입장에서 명나라의 은혜를 받고 이를 뛰어넘는다는 말은 고리타분한 사람들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요소였다.
효명세자는 분위기를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연설의 마무리를 지었다.
“마지막 이유는 이 나라가 화이(華夷 - 중국 주변의 이민족)가 아닌 온전한 문명국이기 때문이다. 옛 중화에는 수많은 열국이 있었으나 수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흡수되었노라.”
“옛 고려와 자웅을 겨루었던 선비족은 중원으로 들어가 수나라를 건국하고 습속을 잃어버렸다. 이외에도 수많은 주변의 국가들이 중원에 흡수되어 본질을 망각하였으나 이 나라는 오롯이 자주성을 유지하였다.”
“이는 이 나라가, 이 나라가 있는 조선 반도가 그리고 이 나라와 인접한 옛 조상의 땅 요동과 만주가 중화에서 벗어날 명백한 운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누천년에 걸쳐 증명한 것이다.”
“북방의 옛 조선부터 남방에 있던 삼한(三韓)까지 상고시대부터 조상들이 지켜온 명백한 운명이 아닌가. 이 땅에 사는 조상들이 이토록 명백한 운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옛적에 습속을 잊고 중화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하니 감히 옛 조상과 이 나라의 백성 그리고 이 나라를 일군 수많은 중신들을 대표하여 말하겠노라.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워 이 명백한 운명을 세계만방에 알리려 하노라.”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분위기를 알아차린 백성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모두가 열광하는 가운데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의 사절단은 멍하니 효명세자를 바라보았고 두안후와를 비롯한 청나라 사절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아예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마 도광제 입장에서는 최소한 자신들을 위한 배려를 할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아직 행사는 많이 남았다. 지금은 칭제 건원을 표명하는 연설을 하였을 뿐이며 앞으로 연호를 만들고 복식을 갈아입어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였음을 증명하는 자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