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146화 (146/345)

146. 13장 6화 가장 좋은 선물

오로지 크고 아름다운 함선을 만들기를 원하는 이점버드 브루넬은 더 많은 예산을 받아낼 기회라 생각하였다. 그러더니 일본 사절단을 쳐다보며 평상시와 같이 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하물며 식민지 출신 국가인 미국에도 대한제국이 밀리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녀석들은 프리깃조차도 이천 톤이 넘어가는 배수량을 자랑하는데 우리는 기껏해야 천 톤 단위이지요!”

“그래도 풍벽선(윈드재머) 계열은 배수량 삼천 톤 규모를 양산할 계획 아닙니까?”

“윈드재머는 선회력이 부족해서 전선으로 쓸 수 없습니다! 더 크고 아름다운 전선이 없다면 태평양을 넘어온 미국 함대에 대한제국 함대가 호되게 당할 겁니다!”

이점버드 브루넬은 못 미더운 듯이 눈을 흘기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 인간의 욕망을 모두 채우려면 대한제국 예산은 물론이요, 영국의 예산으로도 답이 없으니 조용히 속삭여줬다.

“그리고 USS 미시시피는 외륜추진 증기선이고 발해급은 철갑 증기선인 데다 추진기관이 스크루(crew)이니 발해급이 우위에 있다고 예상하는데요.”

“그래도 함포 수준이 차이가 납니다. 녀석들은 충돌신관이 달린 십 인치 화포를 사용하는데 개력포는 구형 지연신관이 달린 함포를 사용하니 불리한 싸움이 되겠군요.”

예산을 받아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버드 브루넬은 먼바다에서 훈련 중인 해군 함선을 가리켰는데 숙련도가 부족하니 승산이 적다 판단하는 것이다.

나도 틀린 판단은 아니라 생각하였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지와 검지를 맞대 동그라미를 만들고 하소연을 하였다.

“현실을 자각하십시오. 예산이 나올 구석이 없는데 어떻게 만들자 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요동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감안하면 조금만 더 여유를 낼 수 있을 텐데요.”

“내실이 중요하지 외부에 힘을 투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유는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닌 내실을 다져서 남는 예산을 굴려야 여유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점버드 브루넬도 지금까지 대한제국에서 얻어먹은 것이 많으니 투정을 부리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나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윈드재머를 만들고 비어있는 도크를 가리키며 칭찬하였다.

“이점버드 경의 명성이 전 세계에 퍼져나갔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미 윈드재머 시험용 선박의 수주가 스무 건이 들어왔다 하였는데 누구나 쓸 수 있는 좋은 배를 창안하시지 않았습니까?”

“꿈은 언제나 크게 가져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도 한센 후작의 말이 옳으니 앞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더 효율적인 선박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일본 사절단과 함께 제철소로 향하였다. 역시나 막대한 격차를 확인한 다른 사절단 인원들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기차에 오를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일본 사절단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처음에는 대한제국이 거대한 호랑이라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아닙니다. 늑대였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머나먼 동쪽에서 거대한 호랑이가 천천히 다가오는 상황에도 자기 앞가림을 간신히 할 정도의 늑대일 뿐이지요.”

“그럼 궁금한 것이 있으니 어찌하여 저희 막부를 이토록 보살펴 주시는 겁니까? 늑대라면 막부를 무너트리고 일본을 집어삼켜야지요.”

제법 냉정한 질문이었다. 막부를 무너트리고 일본을 병탄하는 것도 가능한 전력으로 왜 이렇게 자신들을 보살펴 주느냐는 의도였다. 바꿔 말하자면 속내를 모르겠다는 뜻이고.

“전쟁을 벌여서 입는 손해를 감안하더라도 코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려면 손해를 불사할 수도 있겠지요. 이 답을 해주시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답해 드리겠습니다. 크게 세 가지의 이유가 있군요.”

일본을 머슴으로 만들고, 머슴이되 피 맛을 안 본 순박한 머슴으로 그리고 대한제국에 경제가 반쯤 예속된 국가로 만들려는 이유다.

이를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 손가락을 들어 말하였다.

“첫째로 황제 폐하께서 칭제건원을 하실 적에 조공과 책봉이 없고 열국 간의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무력 병탄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이해는 하였으나 아직 부족합니다.”

“둘째로는 다른 국가의 견제 때문입니다. 일본을 멋대로 삼키면 지금까지 우호적이던 불란서와 서반아가 동시에 견제를 할 겁니다. 대한제국은 이를 당해낼 힘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실리적인 변명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만큼은 상대를 압박하기 위하여 냉정하게 말했다.

“셋째는 지금 상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막부를 무너트리는 것이 너무 쉬운 일이라 전쟁조차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 전체를 무너트릴 수는 없지만 막부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저희가 미국과 손을 잡고 대한제국을 압박한다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그럼 막부가 확실하게 망합니다. 여러분이 막부의 중진이라면 말씀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정보가 유출될지도 몰라 도저히 답변을 드릴 수 없겠군요.”

일본이 자유무역을 실시하는 순간 막부가 망하는 이유는 화폐 가치 때문이다.

지금 전 세계의 화폐가치는 은 15 : 금 1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은 5 : 금 1이다. 무역으로 금이 쓸려나가고 은이 유입되면서 경제구조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는 온전히 에도 막부의 책임이 된다. 수많은 농민항쟁이 벌어지고 조슈와 사츠마를 비롯한 지방 세력들이 항거하며 지배 체계가 무너진다.

이건 최후의 설득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고 조용히 말하였다.

“결국 막부가 살길은 대한제국과 협력하여 체계를 굳건히 하고 내실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마침 저녁 6시가 되었으니 약속한 시간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저녁을 해결한 다음 전신국에 당도하여 느긋하게 한양에서 올라오는 전보를 기다렸다.

“왜 이 기계 앞에 서 계시는 겁니까?”

“조금 있으면 한양에 머무른 일본 사절단 인원이 소식을 보내올 겁니다.”

전신기가 신호를 받아서 작동하였고 이를 번역하여 나에게 건네주었다. 전보의 내용은 [오늘 대한제국의 건축 양식을 확인함]이었는데 이를 받은 사절단 인원들에게 권유하였다.

“아무 말이나 보내 보시지요. 오늘 무엇을 보았습니까?”

“말을 보내다니 이게 대체 뭔…….”

홀린 듯이 전신을 보낸 사절단은 한양에 도착해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서로가 오후 7시에 주고받은 전신을 확인하며 기겁하였다.

“어떠한 방법으로 이런 기구를 창안하셨습니까? 저희에게 판매해 주십시오.”

“막부의 통치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전신기를 전 일본에 무상으로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이래도 우리 대한제국을 믿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전신 정도는 보급해 주고 해저 전신을 연결해야 일본을 철저히 관리할 수 있지. 사절단은 모든 일정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나와 나눈 대화를 쇼군에게 보고하겠다고 확언하였다.

몸이 달아오른 막부가 어떻게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휴가를 즐겨야 하리라.

* * *

일본 사절단 접대가 끝나고 아내와 은찬이를 데리고 함께 휴가를 즐겼다. 아직 돌도 안 된 은진이는 같이 휴가를 즐기는 처가에 맡겨두고 여유 넘치는 하루를 보내려 하였다.

용산 일대에 생겨난 카페에서 차와 다과를 판매하였는데 대부분 그랑제콜에서 일하던 유럽 출신 요리사의 제자들이 경영하였다. 쿠키를 입으로 먹으니 고풍스러운 맛이었다.

“서역의 밀이 이 나라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군. 쿠키는 이렇게 깔끔해야 제맛이지.”

내가 제빵을 취미 삼아 하던 사람이라 이 쿠키가 쇼트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깔끔한 뒷맛에 아내도 차를 즐기며 말하였다.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도성의 백성들도 요즘 들어 국수를 즐기더군요.”

“누가 아니라 하겠소. 찬아, 맛이 어떻더냐?”

“아버지 쿠키 더 시켜주세요.”

초콜릿 쿠키에 홀딱 빠진 은찬이는 입가에 초콜릿을 묻혀가며 아이스티와 함께 쿠키를 먹었다. 간혹 관리들도 이 동네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어서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십덕 후작님이라고 인사를 올리는 관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은찬이에게 목말을 태워주고 아내에게 권유하였다.

“요즘 강변에 미곡이 들어와 장관이 따로 없다는데 한번 보러 갑시다.”

이미 소형 증기선이 돌아다니는 한강 백사장에는 한가위를 전후로 전국에서 운반된 미곡을 쌓아두었다. 각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금과 여유분의 곡식을 한군데 모아서 정리하는 작업이다.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두는 천만 석, 약 900만 톤의 미곡 가운데 삼 할이 한강변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하얀 백사장 위에 누런 곡식이 옮겨지니 한양의 명물 중 하나였다.

“아버지, 저건 무슨 기계에요?”

“대형 풍구란다. 곡식을 쉴 새 없이 분류할 수 있는 기계이지.”

작년에 농무아문, 지금은 농부(農部)가 된 관청에서 개발한 초대형 풍구(風甌 - 쭉정이를 걸러내는 기계)가 가동되며 쭉정이를 한강으로 날렸다.

“쌀겨가 마치 꽃잎처럼 흩날리니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것을 보시오. 참새와 산비둘기를 잡는 사람들도 있군.”

“농무아문에서 업무에 너무나 열중하여 백성들의 삶이 평안해졌다 합니다. 예전에는 열 명이 달려들어야 하는 농사일에 이제는 일곱 명이 달려들 것이라 하더군요.”

소 네 마리를 틀에 묶고 축력을 동원하는 풍구가 계속 가동되었다. 내부에 스크루를 넣은 원통으로 곡식을 높은 곳으로 올리고 아래로 떨구며 선풍기가 일으키는 바람에 곡식을 노출시켰다.

강한 바람에 밀려난 곡식은 거대한 깔때기로 떨어졌고 이 곡식들은 다시 통에 담겨서 정리되었다.

은찬이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흩날리는 쭉정이 사이를 뛰어다니다 손에 바닥에 흩어진 쭉정이를 쥐고 돌아왔다.

“어머니! 곡식을 가져왔습니다!”

“그건 곡식이 아니고 쭉정이란다. 이 쭉정이는 밀의 것인데…… 쭉정이가 작년보다 몇 배는 많은 것 같은데?”

아내가 은찬이가 가져온 쭉정이를 한 줌 쥐어서 보여주었는데 밀 특유의 길쭉한 외피가 보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쭉정이를 확인하며 답했다.

“요동에서 실시한 밀농사가 실패하였나 보구려. 첫해에 배부를 수는 없지 않소.”

얼마나 실패하였는지 궁금해서 한창 서류를 정리 중인 관원에게 다가가 슬쩍 기침을 하였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관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바로 인사를 올렸다.

“외무 부대신 후작님을 뵙습니다. 혹여나 업무에 문제가 있습니까?”

“밀의 쭉정이가 많이 보이니 궁금한 점이 있다네. 내가 알기로 북방에서 수확된 밀은 황해도와 도성으로 옮겨지는데 혹여나 밀농사가 흉년이라 이토록 쭉정이가 많이 나왔나?”

“대풍입니다. 작년까지는 십오만 석 정도의 밀을 보내왔는데 올해는 도성에만 사십만 석이 넘고 계속 보내오는 양을 감안하면 총 판매량이 팔십만 석에 달할 겁니다.”

“밀이 대풍이라고 하였나? 팔십만 석?”

아내가 놀라서 서류를 확인하였는데 밀이 전부가 아니었다. 옥수수, 보리, 수수, 조 등의 잡곡들도 북방에서 수확되었는데 도성에만 150만 석이 넘는 물량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도성에 들어오는 양이 전체 물량의 30% 내외임을 감안하면 총 500만 석에 달하는 막대한 수확량이다.

이런 곡물이 왜 생산되었는지 영문을 몰랐는데 아내가 조언을 하였다.

“북방의 민심을 휘어잡고 소작농과 화전민의 정착을 돕기 위해 세금을 십 년간 거두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마적을 모조리 소탕하고 농무아문에서 기술을 퍼트리지 않았습니까.”

“세금을 거두지 않으니 통계에 산입하기 이전에 다짜고짜 농사를 지었겠군. 철도 공사가 올해 초부터 완공되기 시작하였으니 농지가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구려.”

“그러하니 사람들 모두가 사력을 다하여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미 적응이 끝난 소작농들과 이 나라에 복속한 청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만주의 인구는 이주한 사람들과 기존 청나라 사람을 합쳐 500만 명에 달한다.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농토를 경영하고 닥치는 대로 농사에 뛰어들었다.

이 곡식 생산은 계속 증가할 예정이다. 화전민들이 완전히 정착하고 농지를 계속 개간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더 빠를 수도 있고.

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저…… 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성이 많은 곡식을 소출하여 흉년을 염려하지 않고 배불리 먹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자네 경제학 교육은 이수하기는 하였나?”

“수학을 너무 많이 배워야 해서 손도 안 댔습니다.”

이러니 현재 상황을 모르지! 아예 수학을 포기한 사람에게 뭘 더 가르칠 생각도 없으니 그냥 한숨을 쉬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몸을 돌렸다.

은찬이는 이를 보면서 말하였다.

“예전에 갈루아 교수님을 보았는데 교수님이 사람은 미적분을 할 수 있어야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 친구 기준은 너무 높으니까 은찬이는 염려하지 마려무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은찬이는 아내 품에서 잠들었다.

여유가 생긴 아내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계산에 몰두하였다. 나도 경제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니 슬쩍 물어보았다.

“올해는 괜찮을 것 같지만 내년이 되면 북방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여유분이 칠백만 석이 넘어갈 거요. 앞으로 오 년 뒤에는 천오백만 석이 넘어갈 것이고.”

“어느 정도 곡식에 여유가 있으면 좋은 일이지만 몇 년 뒤에는 문제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이 나라는 공업을 키우기 위하여 여유 농작물을 사용하는 형편입니다.”

“옳은 말이오. 이대로 북방에서 곡식이 계속 유입되면 곡물 가격이 내려갈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지주들은 몰라도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겁니다. 지금은 쌀 한 석에 신냥으로 넉 냥 하고 여섯 푼인데 오 년 뒤에는 석 냥 여덟 푼까지 떨어질 것 같군요.”

대한제국이 공업화로 인한 부작용을 겪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곡물가격 조정이다. 이 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이 생활의 여유를 가지지만 감질날 정도로 곡물 가격을 조절하였다.

‘농사지어 보았자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소득이 별로인데 공장에 갈까?’

딱 이런 생각이 들 정도의 곡물 가격인 쌀 한 석당 4냥 이상 5냥 이하로 조절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소규모 농민들이 자연스럽게 공장에 들어가고 자영농들은 점차 넓은 땅을 경작하였다.

이런 전제조건이 북방에서 생산되는 대량의 곡물로 무너지게 되었다.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북방에 세금을 거두거나 세금을 올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업을 추진할 여유 자금이 생겨날 것이요 이를 출자하여 변통하면 어떻겠습니까?”

“태상황(太上皇 - 순조)께서 북변을 평정하며 공언을 하였는데 이를 무효로 할 수 없는 노릇이오. 그렇다고 제국이 되자마자 세율을 올렸다가는 백성들이 곤혹스러워하겠지.”

“그렇다면 금리를 내려서 대처하심은 어떠합니까?”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격이지. 생산이 부족하여 곡물 가격이 올랐다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서 금리를 내리면 나라의 종잣돈을 갉아먹는 격이 아니겠소.”

내가 조선시대에 오기 전에 경험한 끔찍한 인플레이션이 떠오른다. 황산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 하는 세계 2위 군사대국이 저지른 미친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었다.

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한 곡물수출 불가와 흉년이 겹치며 식량이 부족해져서 물가가 상승하였다. 반면 지금 대한제국이 겪는 사태는 생산 증가로 인한 곡물 인플레이션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극명하다. 곡물 가격이 내려가고 상대적으로 화폐 가치가 올라가니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공장으로 몰려들 것이다.

그렇다고 공장을 마구잡이로 늘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런 과정에서 임금 삭감이나 불법을 자행하는 공장주도 늘어날 것이고 탁지부와 상공부에서 계획한 정책도 엉망이 되리라.

모든 사태를 해결하려면 시간이 답이었다.

아직도 불안해하고 있는 아내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해주었다.

“곡식 가격이 내려가면 축산업이 발달할 거요. 몇 년 정도 버티면 되겠지.”

“가축을 접붙여서 수를 늘린다 하여도 바로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짧게 잡아도 삼 년, 길게 보면 오 년은 걸릴 것입니다.”

뭘 해도 한동안 진통을 겪고 침체로 인한 후유증을 겪어야 하는데 이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 푸념하듯 말하였다.

“물론 곡물 가격 하락으로 인하여 이 나라가 기나긴 침체를 겪지는 않을 거요. 앞으로 오 년이 지나고 늦어도 칠 년이 지나면 북방에서 세금을 거두며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데.”

“그 칠 년이라는 세월이 두렵습니다. 내년부터 삼백만 석으로 시작하여 끝에는 칠백만 석 정도를 조정에서 구매하지 않는 한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겁니다.”

“차라리 곡물을 청나라에 수출해 버릴까.”

보고에 의하면 중국 남부지역은 이미 양귀비 농사에 뛰어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곡식이 부족해질 지경이라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곡물을 갈구하는 다른 국가가 떠올랐다.

“왜에 이 곡식을 모두 수출하고 금을 받아오면 어떠하겠소?”

“금이라 하셨습니까? 귀금속으로 거래할 것이면 첫째가 은이요 둘째가 금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삼백만 석에 달하는 막대한 곡물을 팔고 금을 받으면 금화만 가치가 내려갈 것인데요.”

“은이야 청나라와 다른 나라의 무역을 통해 벌충할 수 있지 않소. 몇 년이 지나면 썩어 문드러지는 곡식을 억지로 조정이 사들이는 것보다 금과 은을 비축하여 사업을 해야지.”

현대 국가라면 이 충격을 견디기 힘들겠지만 지금은 근대이다. 경제가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않으니 화폐가치와 곡물가치를 잘 조절하여 이 반응속도만 조절하면 버틸 수 있다.

여기에 막부를 상대로 휘두를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 곡물 수출이 가능해졌다. 처음에는 일본의 경제적 정상화에만 10년 이상을 소모할 계산을 했지만 이제는 5년이면 충분하다.

남은 것은 막부와의 접촉이었다.

업무에 복귀하고 열흘이 지나자 동래에서 전보가 올라왔고 바로 내가 근무하는 관청에 도달하였다.

[조선 통신사를 대한 통신사로 명칭을 변경하여 재개하겠습니다. 내년 삼월 이후 아무 때라도 좋으니 대한제국에서 통신사를 보내올 일정을 알려주십시오.]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이 보고는 바로 효명제에게 들어갔고 효명제 또한 통신사 재개라는 목적이 마음에 들었는지 즉각 파견하기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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