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14장 1화 대한 통신사(1)
일본의 대한 통신사 요청은 즉각 접수되어 조정에서 주요 과업으로 다루어졌다. 특히나 양 궐내각사 가운데 내가 속한 외부가 있는 좌 궐내각사가 가장 바쁘게 움직였다.
식사를 마치고 경복궁으로 출근하니 궐내각사의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다.
오늘도 각지에서 입수한 정보를 분석하는 외부(外部) 관원들의 고생을 생각하며 들어가니 하인들이 이미 일을 돕고 있었다.
“오늘도 고생이 많군. 일이 많이 고단하지는 않은가?”
“새로 정궁이 된 경복궁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닙니까.”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지게로 물을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아직 기술이 부족하여 수도관을 부설할 수 없으니 필요한 물 사용량은 모두 인력으로 벌충해야 한다.
한반도 기후가 문제이지. 현대에도 수도관은 두꺼운 단열재를 깔고 열선으로 가열하는데 가끔 예측 이상의 한파로 동파한다. 이 시대 기술력으로 수도관을 부설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일본이라면 수도관 부설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외부에 얼마 전 들어온 관원이 인사를 올렸다.
“외무 부대신님을 뵙습니다. 기침하셨습니까?”
“자네가…… 홍 성여(成汝)였던가? 야근을 한 모양인데 새로 입수한 정보는 정리하였나?”
“정리를 하느라 야근을 하였습니다. 덕분에 귀가도 못 하고 몸을 씻었지요.”
외부에 새로 배정된 관원인 홍우길(洪祐吉)이었는데 추사 김정희의 지인이자 흥선군 이하응과 막역한 사이였다. 이런 인맥에도 불구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아직 외부대신으로 임명된 내 상관 권돈인(權敦仁)은 출근하지 않았으나 외조에 사람은 넷이나 출근해 있었다.
입수한 자료를 보니 대한 통신사가 재개되어 일본 열도의 세력들이 온갖 서신을 보내오고 있었다.
“장주(長州 - 조슈)에서 자신들이 통신사를 처음 배알하기로 하였다고?”
“예전의 습속을 재현하는 자리이니 많은 것을 준비했다 하였습니다. 서역의 학문을 배운 학자들을 비롯하여 대한에 보여줄 것도 받을 것도 많다는 찬사를 보내더군요.”
“그 외에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서신을 보내왔으니 일본의 막부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알 것 같군. 손암 선생이 남기신 승사록(乘槎錄)이 틀린 말이 아니었어.”
일본 막부의 통제력은 여러 방면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를 통해 학문을 입수하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지방 세력들이 꿈틀대는 상황이다.
그러니 대한 통신사를 받아들여 새 문물을 입수할 창구를 열어젖히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각 번에서 급하게 보낸 서신을 읽고 있으니 어느새 권돈인이 출근하였다.
“이재(彛齋 - 권돈인의 호) 대감님을 뵙습니다.”
“진일 자네가 미리 출근하였군. 서류는 잘 확인하였는가?”
“물론입니다. 여기 홍성여가 잘 정리하였으니 쉽게 확인할 수 있더군요.”
내가 붉은 잉크로 주석을 첨부한 서류를 확인한 권돈인은 이를 확인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의정부에서 근무하는 서희순보다 못해도 그도 외교관이다.
“왜…… 이제는 일본이지, 아무튼 일본 전역을 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군.”
“참 우스운 일입니다. 막부를 만나기로 하였는데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요.”
“이러다가 통신사 일정이 이리저리 늘어질 것 같다네. 구주(九州 - 큐슈) 일대를 순방하라고? 제정신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권돈인이 피식 웃자 나도 피식 웃었다. 통신사는 엄연히 국왕의 뜻을 전하는 외교 사절단이니 각 번을 방문할 필요는 없다.
기존에 보내던 조선 통신사는 항해 기술이 부족하여 일본 내부를 움직였지만 지금 조선은 윈드재머와 증기선을 운영하는 나라이다.
권돈인에게 맞장구를 치듯이 말하였다.
“황제 폐하에게 보고를 올릴 적에 바로 일본의 도읍인 강호(江戶 - 에도)로 들어가기를 청함이 마땅합니다. 일정도 단축할 수 있고 올바른 뜻을 전할 수 있지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라네. 옛 통신사 기록을 보니 팔 개월의 일정인데 자네와 좌찬(좌참찬, 외무 담당) 대감께서 팔 개월 동안 자리를 비우다니 말이나 되는가.”
바로 효명제에게 보고를 올리게 되었다.
효명제는 이미 1845년 양력 4월 15일. 음력 3월 9일로 통신사 일정을 정해두었는데 우리의 보고를 듣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대한 통신사가 아무 집에나 들락거리는 도적의 무리라도 되는가? 외부에서 정한 판단이 지극히 옳으며 나 또한 같은 생각을 할 뿐이노라.”
“하오면 일본의 각 번에 서신을 보내어 도읍인 강호로 집결하라 명하겠사옵니다.”
“응당 그리 하여야지.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면 일이 번거롭게 되니 꼭 필요한 사람만 보내라 제안을 하라. 이 말을 무시하면 아예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전함이 마땅하다.”
효명제는 우리의 보고를 듣고 서류를 확인하며 반대로 통신사 인선을 정한 서류를 전달해 주었다. 권돈인은 이 서류를 읽고 효명제를 바라보았는데 고개를 끄덕이면서 뜻을 정했음을 명시하였다.
이제 내 차례가 되어 서류를 확인하였는데 생각 외로 많은 사람을 보냈다. 기존 통신사는 잘해야 500명인데, 대한 통신사는 1,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보냈다.
심지어 기존 통신사는 대부분의 체류 비용을 일본에서 제공하여 민란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는데 체류 비용은 물론 미곡 5만 석, 4,500톤까지 제공하기로 하였다.
“미곡 오만 석이라면 대한에서 사용하는 신형 풍벽선 세 척으로 옮겨야 할 수량이옵니다.”
“엄연히 칭제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일깨우려 하는데 그 정도 수고는 해야 하지 않겠나. 더군다나 외부 부대신의 정책을 시행하려면 미리 선물을 내놓아야지.”
신형 윈드재머는 정말 쉴 새 없이 활동하였다. 빠르고 적재량도 많은 배이니 조종이 힘든 점을 감안해도 한 달에 세 척 정도가 양산된다더라. 이런 물동량이지만 한계는 명확하였다.
내년으로 예정된 아일랜드 대기근, 한창 유럽에서 활동하는 이하응이 직면할 대재앙은 막을 수 없었다. 곡물을 잔뜩 적재한 윈드재머가 전속력으로 항해해도 유럽까지 두 달이 걸린다.
대한에서 아무리 애를 써보았자 일 년에 곡식 15만 톤을 보내는 것이 전부이며 그동안 발생할 물류 수입 저하를 생각하면 돈을 보내는 것이 나은 형편이다.
다음으로는 서류에서 인선을 확인하였다. 1,200명에 달하는 인원 중에는 호위 병력이 기병 200기, 엽병과 전열보병 200명이고 나머지 800명 가운데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신 박현상 아뢰옵나이다. 일본에 보내는 사람 가운데 승려가 오십 명이나 끼어 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얼마 전 의순(意恂 - 초의선사의 법명)이 간곡히 청하기를 서역에서 대한의 명성을 일깨웠으니 불법을 퍼트릴 길을 달라 청하였다. 듣자 하니 수계(受戒)가 문제라던가.”
“대한의 승려들이 구족계(具足戒)를 내려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불자들을 배려하시니 이 은혜가 이어질 것이옵니다.”
예전에 정약용에게 지나가듯 들은 말이 있었다. 이 나라는 수백 년 동안 불교를 탄압하여 새 승려가 될 구족계가 진행이 안 되어 평생 비구(比丘)로 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구족계를 받은 승려가 10명, 최소 4명이 집결해야 수계를 내릴 수 있는데 이 인원도 충족하기 난해한 것이다. 반면 일본에는 구족계를 받은 승려가 많으니 50명 가운데 대다수가 수계를 이행할 수 있으리라.
다음 항목은 학자들이었는데 학부 휘하 대학인 국립이학대학과 국립국학대학에서 50명의 인원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 항목에는 국립이학대학 총장인 일준이가 끼어 있어서 물어보았다.
“총장이 파견될 필요는 없을 것 같사옵니다. 하물며 양 대학의 총장이 모두 파견되는 것도 아니고 국립이학대학 총장 한 명만 파견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옵니다.”
“자네의 벗인 용태(조일준의 자)가 꼭 일본에 다녀오고 싶다 하였노라. 듣자 하니 일본에서 학문을 배운 이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새 가르침을 내려주고 싶다 하였지.”
“본인의 뜻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옵니다.”
일준이는 아마 일본에서 어설프게 학문을 익힌 놈들이 있다고 도장 깨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이외에는 외무 업무를 처리할 대신들과 각종 기술자들이 방문하였다.
기존 통신사라면 악공(樂工)이나 마상재 같은 기예를 익힌 사람을 보내는데 이제는 기술자들을 방문시킬 시대였다. 일본에서 어떤 기술을 익히기를 원하는지 보여주려는 것 같았고.
“신은 폐하께서 정하신 바에 어떠한 흠결도 찾을 수 없사옵니다.”
“십덕 후작이 보기에도 마음이 놓이니 짐의 마음 또한 놓이는군.”
그놈의 십덕 후작 좀 어떻게 해야겠다. 나도 칭제건원 이후 4개월 동안 호를 만들어 이를 퍼트려야 하였는데 모두 실패했다.
-십덕이 뭐 어때서. 열 가지 덕이니 이보다 좋은 호가 어디 있는가?
은퇴한 순조와 잠시 접견을 하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 태상황까지 인정한 십덕 후작이라니 너무나 끔찍하지만 탈출할 수도 없어서 난감할 뿐이다.
제발 새로운 호를 찾기를 원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1845년 양력 4월 10일, 대형 함선이 드나드는 평양의 남포에서 대한 통신사로 파견될 선박에 오르게 되었다.
“부디 짐의 온건한 뜻을 전하고 성신교린(誠信交隣 - 성실과 믿음으로 사귄다)의 뜻을 담은 옛 통신사의 습속을 그대로 이행하도록 하라.”
“황제폐하의 뜻을 온건히 이행하여 일본을 이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로 만들 것이옵니다.”
기차를 통해 주요 인사들과 함께 남포까지 방문한 효명제는 내 손을 맞잡으며 신신당부를 하였다. 가급적 이번 대한 통신사 한 번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완벽히 정립해야 하니까.
나를 포함한 주요 인사들이 기함인 발해급 대조영함에 오르자 희뿌연 연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이번 통신사에 배정된 선박은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8척으로 정해졌다.
기함인 대조영함, 운송용 선박인 윈드재머 3척이며 나머지 4척은 호위함인 대형 프리깃으로 구성되었다. 윈드재머가 바람을 받아 가속해 앞으로 나서자 일준이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역시 풍역선이 빠르긴 하네. 가속을 제대로 받으면 바다 위의 열차 수준이잖아?”
“열차보다 빠르지. 지금 30㎞의 벽을 넘느냐 마느냐 싸우고 있는데.”
일준이는 이번 기회에 일본 학자들의 두개골을 모두 터트리고 싶었는지 갈루아를 포함한 그랑제콜부터 학문을 이수한 중진 교수들을 끌고 왔다.
여기에 에이다도 끼어 있었는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이 의아했다. 여기 데려온 이유가 궁금해서 일준이에게 물어보았다.
“에이다는 왜 데려왔어?”
“일본 학자들이 여자한테 학문으로 박살이 나면 얼마나 쪽이 팔리겠냐? 에이다에게는 휴가 삼아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 좀 가르치라 했어.”
“그러다가 네모로직 퍼트려서 사람들 머리통을 다 터트려 버리는 거 아닐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지. 요즘 들어 신형 직조기 개발에 난항을 겪어서 수학 문제를 내면서 머리를 식히는데 내가 따라가기 버거운 수준까지 치솟고 있어.”
갈루아는 ‘사람도 아닌 멍청이를 사람으로 만든다.’라는 교육 철학을 가지고 쉽게 풀어서 설명하였다. 반면 에이다는 교수로서 연구 활동만 하기에 남을 가르쳐본 경험이 부족하다.
일본 난학자들이 일준이와 갈루아 그리고 에이다를 비롯한 수많은 괴물들에게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런 기대를 품고 4일의 항해를 거쳐 에도까지 나아갔다.
“일본 사람들이 맞이하러 나왔군요. 준비가 고단하였을 텐데 참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를 환영하겠다고 어선에 지붕을 씌우고 꽃을 잔뜩 올려서 꽃배를 만들어냈군.”
호위 병력을 지휘하는 임건보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30척 단위로 형형색색의 꽃을 올리거나 아예 조화(造花)를 올린 어선 수백 척이 주변을 에워쌌다.
이 과정에서 상세히 살펴보니 각 선단이 따로 운영되는 모습이 보였다. 배의 형태도 다르니 막부가 아닌 각 번에서 보낸 어선도 있으리라.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이득을 챙기려는 각 번의 모습이 보여서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이걸 제지하지도 못하는 에도 막부에게도 실망한 김에 장난을 좀 치려 하였다.
“잠시 배를 멈춰줄 수 있겠소? 그 틈을 타서 나룻배를 내려서 저 어선을 모는 어부들과 관리들에게 은자를 내어주시구려.”
“생각하여 보니 저들은 억지로 끌려 나와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겠습니다.”
“어부에게는 은자를 한 냥, 관리에게는 다섯 냥 어치를 내어주되 이 비용은 막부에서 미리 제공하였다고 명시하시오.”
윈드재머 세 척은 돛을 접어가며 속도를 늦추었고 나머지 배는 정선하여 내 명령을 이행하였다.
어선 대부분이 돛을 접고 멈추자 이들을 놀리고 싶어서 명령을 내렸다.
“대조영함의 돛을 아예 접고 증기기관만 추진하여 만으로 진입하시오.”
“연료 소모가 조금 많아질 것 같습니다.”
“혹여나 풍랑을 겪을 일에 대비하여 기준 연료량의 세 배를 지참하였으니 괜찮소.”
일준이는 내 옆에서 어선들을 바라보며 조만간 벌어질 일을 기대하였다. 내 명령대로 돛이 다 접힌 대조영함이 바람도 측풍인 상황에서 앞으로 나서니 어선들이 따라오지도 못하고 멍하니 굳어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어선들이 돛을 펼쳤지만 대조영함의 추진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먼저 출발한 윈드재머를 추월한 대조영함은 항구로 예인될 준비를 하였는데 반응이 늦었다.
“저거 보게나.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아무 일도 못 하고 가만히 있지 않은가.”
“외부 부대신께서도 참 얄궂으신 일을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기선(汽船)으로 기선(機先)을 제압하시다니요. 망원경으로 보니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있군요.”
일본 사절단이 철선 네 척, 대조영함과 윈드재머의 정보를 입수했으니 쇠로 된 배는 예상하였으리라. 반면 돛도 안 펼치고 연기를 뿜으며 급가속을 실시하는 배는 평생 본 적이 없겠지.
한참을 있으니 좀이 쑤신 관리가 증기를 뿜어 기적(汽笛)을 울렸고 그 우렁찬 소리가 도쿄만을 뒤흔들었다. 그제서 반응한 관리들이 명령을 내려 대조영함을 정박시키려 움직였다.
예상보다 훨씬 무거운 대조영함은 기항 직전 마지막으로 증기기관을 추진하여 균형을 유지하여 정박하였다. 지난 한 달 동안 훈련한 해병들은 보람찬 표정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미리 준비한 대로 사람들이 운집하여 환호성을 질러대며 통신사를 환영하였고 가장 먼저 내가 내려서 인사를 올렸다.
“대한 통신사가 당도하였으니 저 박현상이 황제폐하께서 명하신 신성교린의 원칙을 지킬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앞에서, 일준이와 호위 무관 지휘자인 임건보가 양옆에서 인사를 올리자 상대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조…… 대한에서 여기까지 방문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막부의 명을 받아 여러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복어처럼 볼이 불룩한 젊은 남자가 인사를 올렸는데 양복 차림의 일준이가 키가 너무 커서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마침 아는 사람이라 적당히 받아주었다.
“혹여나 조상께서 옛 정이대장군의 신하인 정이직정(井伊直政, 이이 나오마사)이 아닙니까? 임진년의 변을 일으킨 왜추의 부하를 수없이 도륙한 명성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식이 많으실 줄은 몰랐군요. 여독이 깊으실 것 같으니 며칠 휴식을 취하시지요.”
이 양반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다. 형제가 너무 많아 각종 학문과 취미생활을 익혀서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가문을 승계하기 위한 비상용 막둥이 취급을 받았던가.
능력도 출중하고 도쿠가와 가문의 충신이니 개국을 주장하던 사람이다. 물론 이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유도 명확하니 칼에 맞아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 시대의 거물이,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거물이 맞이하였으니 잘된 일이다.
우리가 휴식을 취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쉬라 하니 슬쩍 말하였다.
“만세일기 천재일회(萬歲一期 千載一會)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차례의 귀한 만남을 속히 행하고 싶으니 어서 안내해 주시지요.”
“참으로 좋은 말이로군요.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 파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 각 번에서 우리와 접견하여 미리 뇌물공세를 펴기 위해 여독을 풀어달라는 명목으로 숙소에 손을 대었으리라.
이이 나오스케는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에도 성으로 안내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