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16장 1화 개혁 권고
항구 입항절차가 즉각 진행되었다. 프랑스와 베트남 병사 및 관리들은 대한제국의 방문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둘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다.
“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대한제국 기술자와 근로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사망자 수습은 일차적으로 완료하였으니 이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시지요.”
“사망자가 몇 명이나 나왔습니까?”
“기술자와 보조 인원에서 스무 명이 조금 넘습니다. 대부분 반란 과정이나 반란 이후 구타를 비롯한 폭력 혹은 질병에 의하여 사망하였습니다.”
프랑스 장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참으로 유감스럽다고 말하였다. 대한제국에서 베트남에 파견한 토목기술자가 250명에 보조 인원을 포함하면 500명에 달한다.
생각 외로 피해가 적은 편이라 안심하였다. 기술자들이 쿨리 반란이 시작된 공사현장 근로자가 대부분이라 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사망자가 50%에 달할 거라 추정했었다.
“이들은 공사가 모두 중단되어 하노이 인근의 숙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고생이 많으시군요. 모두 대한제국으로 데려간 뒤 후속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요. 그럼 기술자들은 넘어가고 수가 더 많은 농장 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반란군 놈들이 참으로 간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모든 프랑스인을 죽이고 대한제국 사람을 자신들의 노예 겸 인질로 삼더군요. 모두 구출하여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장교의 당당한 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동맹국의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보호하여 자긍심을 지킬 수 있었으리라.
그 자긍심과 잔혹성은 다른 이야기지만.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아서 베트남 관리를 바라보았는데 눈빛만 보아도 지금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제발 이 미치광이들을 말려주십시오.’
비 맞은 개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데 공포와 폭력에 얼마나 시달렸을까. 병사들에게 각 공사현장과 농장에 있는 사람들을 수습하게 명령하고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시신이 뭔 제물포 앞바다 어선처럼 떠다니네.”
일준이는 계속 밀려오는 머리가 없는 시신을 확인하고 헛구역질을 하였다. 대충 세어보아도 오백 명가량이 죽었는데 그나마 이 정도면 프랑스치고 온건한 수준이다.
“어선이라는 말 듣고 소름이 돋았다. 그나마 온건하게 처리해서 어선은 안 보이네.”
“어선? 온건? 대체 뭔 소리야?”
“프랑스 혁명기에는 단두대 돌릴 시간도 없다면서 폐선에 사람을 묶어놓고 배를 천천히 침몰시켰어.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 친척 단위로 천천히 익사 당했지.”
방데 학살 당시 사용된 처형, 정확히는 학살 방법 중 하나이다. 단두대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구타나 창칼로 죽여도 오래 걸린다며 저런 미친 짓을 자행했다.
일준이는 자신의 다리와 배 갑판 그리고 물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질색을 하며 말했다.
“그럼 단두대로 모가지를 썰어대는 이 끔찍한 꼴이 좋다는 말이야?”
“사람이 죽는데 할 말은 아니지만 아주 좋은 상황이야.”
질려 버린 일준이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귀까지 막았다. 계속 떠내려가는 시신을 피하며 나룻배를 타고 하노이까지 올라갔다.
하노이 시내로 들어가자마자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나폴레옹 3세가 주장하여 개수한 하노이의 길거리는 배수구가 제법 많은데 여기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대체 얼마나 많이 죽인 거지?”
“아마 하루당 오백 명은 가뿐히 넘어가지 않을까?”
대한제국 병사들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청나라 놈을 넷이나 쏘아 죽였다고 자부하던 조선-청나라 전쟁 참전자도 새하얗게 질린 채 우리를 호위하였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하노이 시내에서 홍 강으로 목과 머리가 분리된 시신이 옮겨졌다.
일준이는 이 시신을 보더니만 헛구역질을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샤를 루이가 주도한 것 같은데 제정신이야? 대체 뭔 짓을 저지르는 거야?”
“개입이 없을 거야. 이 양반 성격과 출신을 감안하면 재판을 주도하는 사람은 순수하게 프랑스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같아.”
“아주 모가지를 썰어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같네.”
“왕 목 한번 썰어보면 국가가 달라지게 마련이지.”
내가 알기로 하노이는 태자이자 훗날의 베트남 황제, 사덕제가 관리하는 도시라 하였다. 우리가 방문하였음에도 사덕제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하노이의 베트남 시민들이 우리를 환영하였다. 반면 옛 왕궁으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며 아예 입구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궁금해서 프랑스 장교에게 질문을 하였다.
“사람들이 안 보이는데 이유가 뭐요?”
“이 장소에서 반란을 일으킨 수괴 소조귀라는 쿨리를 처형하였습니다. 본보기로 삼으려고 다미앵처럼 처형하였지요.”
“다미앵처럼 처형하였다? 제정신이시오?”
“한센 박께서 옳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준비가 부족하여 녹인 납이나 송진을 쓸 수 없었고 대신 조개껍질을 사용하여 조금 덜 고통스럽게 처형하였지요.”
장교가 말한 다미앵은 루이 15세의 암살 미수범이다. 당시 처형은 상세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잔혹성은 끔찍함 그 자체였다.
능지형으로 사람을 수천 조각으로 분해해도 다미앵의 처형보다 온건한 수준이다.
바닥에 깔린 콘크리트-박석 포장로에는 당시의 처형을 증명하듯 다섯 군데의 불타 버린 흔적이 있었다. 이를 목격한 베트남 사람은 물론 태자 폭티마저도 정신이 반쯤 나갔다가 돌아왔으리라.
옛 왕궁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베트남 금군이 나서서 말을 전해주었다.
“태자전하께서 정무에 임하시느라 잠시 뒤 방문하라 하셨습니다. 접견을 청하는 이들은 먼저 광장으로 나아가 재판을 경청하라 하더군요.”
“알겠습니다. 광장에는 저와 배짱이 두둑한 군관 세 명만 다녀오기로 하겠습니다.”
일준이는 절대 안 가겠다면서 손사래를 쳐댔다.
녀석은 일단 나폴레옹 3세를 설득하게 프랑스 대사관으로 보냈다. 이후 배짱이 두둑한 병사 세 명과 역관을 선발하였다. 혹시나 몰라 구토용 봉투를 준비해 두고 피비린내가 점점 진해지는 방향으로 향하였다.
광장에 가니 예상대로 재판이 벌어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프랑스인들이 꾹꾹 억눌러 참고 있는 증거로 혁명기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방금 전 사형을 집행한 단두대에 프랑스인들이 달라붙었다. 이들은 시신을 걷어차 수레 위에 널브러트리고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흐르는 단두대 날을 끌어 올렸다.
다음으로 새하얀 가발을 올린 판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주변 청중들이 침묵하자 그는 명령을 내렸다.
“피고를 압송하시오.”
“살려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명나라 시절의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한족들이 줄줄이 끌려왔다. 이들은 동북아시아인과 동남아시아인의 중간쯤 되는 외모를 지녔는데 아마 명나라 말기에 도주한 사람들의 후예 같았다.
줄줄이 끌려 나온 이들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대신 살려달라고 빌어댔다. 판사는 이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죄목을 읊었다.
“이자들은 반란을 선동한 놈들이 도주하였을 때 이들을 신고하지 않고 보호하였다. 반란을 선동한 상인들의 뒷배가 확실하니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동의하는가?”
-동의하오! 놈들을 모두 죽이시오!
-사형! 사형!
약간의 돈을 벌어보겠다면서 반란을 선동한 한족들은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이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법 대신 자신들의 인맥을 믿었다.
그 인맥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이다. 상황 판단을 한 번 잘못한 대가로 이들 모두가 단두대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용기 있는 베트남인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옳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노이의 남부인 서도(西都 - 타인호아시의 옛 명칭)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서도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친인척이 방문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반론이 제기되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베트남 사람에게 쏠렸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장년 남성은 수많은 시선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였다.
-놈 또한 가담자다! 놈을 재판에 회부하라!
당연히 프랑스 혁명기의 재판답게 피고를 옹호한 사람도 단두대로 올라가는 꼴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인 판사는 나를 비롯한 병사들을 슬쩍 바라보고 말하였다.
“얼핏 보면 옳은 주장이나 시기가 옳지 않다. 반란이 일어나고 보름이 지났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타인호아에 사는 사람이 이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억울합니다! 저에게 몸을 의탁한 먼 친척들은 자신들의 증언을 믿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과정이 너희들의 범죄를 증명한다. 증언만 오갔는가 아니면 뇌물이 오갔는가?”
한족을 비롯한 화교가 중시하는 중국 대륙 특유의 꽌시(關系) 문화, 앞으로는 의리를 주장하며 뒤로는 체면과 인맥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뇌물이 당연히 오간다.
“본 판사가 자료를 확인하였다. 은 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뇌물이 오갔으니 이 뇌물을 근거로 간접적으로 반란에 참여하였음을 증명한다. 즉시 사형에 처하라.”
우레와 같은 함성이 치솟아 오르며 아이들을 제외한 온 가족이 단두대로 끌려갔다. 병사들은 시선을 돌리고 역관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봉투를 움켜쥐었다.
나 또한 고개를 돌렸고, 단두대의 밧줄이 끊기고 쿵 소리가 나자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바로 시신이 운반되고 다음 피고가 옮겨졌다. 이번 재판은 그나마 사형 판결이 선고되지 않았다.
“본 판사는 이들의 태만과 방임행위를 알고 있으나 판결할 권한이 없다. 반란 초기 진압 실패와 방임행위에 대한 조사 자료를 베트남 황제와 법무부에 전달할 것이다.”
베트남의 군부와 관료들마저 재판 대상이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들은 처형 대상이 아니었으나 조사 자료가 베트남 조정에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에서 분노를 억눌러 참았을 뿐 완전히 해소된 상황은 아니었다.
다시 별궁으로 돌아와 폭티를 접견하였다.
폭티를 접견한 적은 없으나 그는 잠도 설치고 제대로 식사도 못 하였는지 반쯤 시체 몰골이 되어 있었다. 인사를 올리니 그는 건성건성 받아들였다.
“대한제국에서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 방문한 박현상이라 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박 후작 아니시오. 내 태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를 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소.”
대놓고 도와달라고 요청하는데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수많은 서류 더미를 보여주며 말하였다.
“재판을 확인한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었소. 어떻게 보시오?”
“일 년 이내, 아무리 늦다 하여도 삼 년 이내에 군부와 관료들에 대한 처벌을 실시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분노할 것 같습니다.”
“그 분노의 끝은 대규모 침공이겠지. 민간인 천사백 명과 해군 육백 명으로 반란군을 짓뭉개 버린 군대인데 일만 명 정도 상륙하면 망국의 길에 빠질 것 같소.”
사덕제의 판단은 정확했다. 본래 역사에서 베트남은 사덕제의 치세에 프랑스의 공세를 받고 1882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한다.
그나마 철저한 쇄국정책과 청나라의 지원을 등에 업은 상황의 결과물이었다. 지금 상황은 쇄국도 청나라의 지원도 없으며 베트남 전체가 약점을 노출해 버렸다.
지금 벌어진 일은 조선으로 따지면 임오군란 수준의 사태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임오군란의 원인은 부패와 태업이나 아편 반란의 원인은 부패와 권력 부재이다. 여기에 베트남의 부패한 군인들이 프랑스에게 명분까지 제공해 버렸다.
폭티는 책상에 이마를 들이박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알기로 프랑스와 대한제국은 신뢰를 구축한 동맹이오. 수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대한제국의 사람들을 보호하였소.”
“그야 계약에 의거하여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박 후작은 아직도 외교적 수사(修辭)에 얽매여 있는 거요? 솔직히 말해주시오. 대한제국 입장에서 이 나라가 프랑스의 식민지나 괴뢰 국가로 전락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좋지 않습니다. 아무리 동맹이라도 힘을 가지면 태도가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동남아 전체가 프랑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뭔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패권을 언제나 움켜쥐려는 프랑스는 베트남을 시작으로 인도를 능가하는 식민지 만들려 하리라.
이 위대한 확장은 개선되어 가던 영국-프랑스 관계를 엉망으로 만든다. 이후에는 동방 패권을 확보할 목적으로 폭주하는 프랑스에게 대한제국이 피해를 입는다.
폭티는 가만히 생각해 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하였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국제 외교관계를 이해한 표정을 짓고 나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가장 좋은 말이오. 다만 이 나라가 어떻게 나아가면 좋겠소?”
“프랑스가 원하는 대로 내부를 정리하십시오. 명백한 혐의가 있는 자를 중심으로 처벌을 내려 파직이나 재산 압류 처벌을 내리고 몇 명 정도는 사형을 시켜야 할 겁니다.”
“군부에 함부로 손을 대면 차크리(현 태국) 놈들이 크메르(캄보디아)를 앞세워 공격할 거요. 여기에 참파의 잔당들도 들고일어날 것이고.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소이다.”
그의 판단은 아주 정확하다.
본래 역사의 베트남이 부패한 군부, 아예 군벌을 형성한 놈들을 제거하지 못한 이유가 사방이 적대국가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뇌하는 이유도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였으나 해결책이 없어서이다.
결국 폭티가 절박한 표정으로 나에게 애원하듯이 말하였다.
“그나마 대한제국군이 주둔하면 군부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소.”
“최악의 선택이십니다. 태자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좋은 수단을 내버려 두고 국가의 힘을 갉아먹는 방법만을 택하십니까?”
“그러하면 다른 방안이 있소? 사형 대상이야 군부에서 가장 부패한 놈들로 선별해 보지. 파직과 재산 압류 처벌을 받은 놈들의 불만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소.”
“많은 돈이면 불만을 해결하고도 남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태자전하의 손발을 많이 만들어내시어 대규모 개혁을 단행해 보심이 어떠합니까?”
폭티는 돈이 나올 구석이 어디에 있냐면서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폭티를 깨우쳐 주기 위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문을 열고 하노이의 광장을 가리켰다.
“지금 수많은 한족들이 반란 선동 혐의로 사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친인척도 사형을 당하는데 이 범위를 조금 확대하고 사형 대신 재산 압류를 실시하시지요.”
“그게…… 말이나 되오? 화교(華僑)들의 재산을 압류하라? 각지에서 인맥을 통해 상인으로 활동하며 부를 축적한 이들인데? 이들을 건드리면 수많은 민란이 일어날 거요!”
“되고도 남습니다. 민란을 넘어선 대규모 반란은 이미 진압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화교들이 이 나라의 왕족과 혼인으로 인맥을 형성하기라도 하였습니까?”
화교는 세대를 거듭해도 해당 국가에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한다. 물론 베트남에 있는 화교 중 일부는 동화하였으나 이들은 이미 유전적으로도 베트남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 인맥을 형성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뭉친 화교들을 탄압하여 돈을 우려내면 된다. 인구의 5%를 탄압해 95%를 먹여 살리는 길이다.
폭티는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사람을 저금통처럼 보시는구려. 저금통에 돈이 두둑하게 차올랐으니 깨트린다는 말 아니오.”
“바로 보셨습니다. 저금통이 멋대로 떨어져서 발등을 깨트렸는데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폭티는 한참을 고민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방 안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한숨을 쉬고 말하였다.
“권고대로 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구려. 화교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이들을 추방해야지.”
“추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한제국에서 청나라 사람을 잘 융화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이들이 인맥으로 상업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기술을 발휘할 장소를 만들어보시지요.”
조선-청나라 전쟁 이후 한반도로 유입된 청나라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을 단위로 쪼개져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복을 입으며 간혹 자기들끼리 모임을 가지는 것이 전부라더라.
심지어 2세는 대부분 대한제국 사람과 결혼하였다. 냄비 하나만 가지고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갖춘 이들인데 일등 신랑감이라던가. 이 사례에 대한 설명도 나중에 알려주면 충분할 거다.
점점 자신감이 생겨나 표정이 밝아지는 폭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대한제국의 영향력도 확충할 겸 당부를 하였다.
“우리 대한제국을 대표하여 대남국(大南國 - 베트남의 국호)의 개혁과 개방 정책이 성공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와병 중이신 황제폐하께서 쾌차하시면 개혁을 추진하시지요.”
“염려하지 마시오. 상세한 방법은 대한제국과 함께 논의하면 좋을 것 같군.”
“그러하면 저희도 적극 동참하겠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황제인 소치제는 얼마 안 가 마흔의 젊은 나이에 죽을 황제이다. 20일 넘게 혼수상태로 있는데 이 상황에서 깨어나면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솔직히 말해 소치제가 깨어나는 것 보다 죽는 것이 개혁에 바람직하다. 어중간하게 깨어나면 원한을 앞세울 수 없으나 사망하면 그 원한을 되갚을 목적으로 한족 탄압이 가능하다.
폭티와의 접견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에게 배정된 숙소에 들어갔는데 일준이가 와인 병을 들이켜다가 나를 바라보고 말하였다.
“네가 말한 나폴레옹 3세와 접견을 끝냈다. 이 인간 완전 순두부도 아니고 연두부 수준인데?”
“순두부? 대체 뭔 일이 있었냐?”
“내가 말재주가 없기는 하지만 감정에 호소하고 뭐고 다 집어치워야 할 수준이더라.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허둥거리기만 하는 인간이야.”
녀석은 술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바로 다음 와인 병을 뜯고 입에 대버렸다. 다시 와인을 들이켠 일준이는 숙소 벽을 주먹으로 후려치더니만 말하였다.
“난 도저히 설득 못 하겠으니 네가 설득 좀 해봐라. 나는 각지의 농장에 방문해서 피해 규모를 확인할게.”
이번 사태 수습을 위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나폴레옹 3세다. 이 양반이 나서지 않으면 처형이 계속된다. 결국 베트남에 있는 모든 한족들의 머리가 몸과 분리될 거다.
그러면 베트남의 개혁도 불가능해지고 베트남 정부가 이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작업도 난해해진다.
대체 뭔 상황일까 궁금하여 이 인간이 웅크리고 있는 대사관으로 들어갔다.